[시평]식민지 상처, 국격으로 보듬을 때 됐다

2022. 12. 27. 1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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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훈 前 외교통상부 통상교섭본부장

한국선 죽창가, 일본에선 혐한

과거사가 미래 발목 잡는 현실

위안부·징용 배상 문제가 핵심

돈 문제는 당당히 우리가 해결

日 교과서에 ‘반성 담화’ 수록

자유민주주의 연대 복원 절실

지난 수년간 한국과 일본 관계는 최악의 상태에 있었다. 아베 신조 전 총리의 우익 노선과 ‘한국 무시’ 태도에 비춰보면 양국 관계 경색은 필연일 수밖에 없었다. 저쪽에서는 혐한(嫌韓) 감정에 불을 지르고, 이쪽에서는 ‘죽창가’가 등장했다. 이런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모멘텀은 어디에도 없었다. 양국에 각각 새 정부가 들어선 지금 정부 간, 정치권 및 민간 차원에서 접촉이 간간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일본이 우리의 대외 관계에서 갖는 의미는 많은 외국 중 하나라기보다는 훨씬 더 중요하다. 동북아의 안정과 평화를 위해 양국 간 협력이 긴요하고, 경제적으로도 많은 분야에서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다. 더 크게는 인권과 자유민주주의 및 시장경제를 신봉하는 우방으로서 인류 번영에 함께 이바지할 수 있다. 그런데도 양국이 미래를 바라보는 순간 과거사 문제가 앞을 막는다. 이 문제에 관한 합당한 해결 없이는 지속적 친선·우호와 미래 협력에 관한 논의는 물거품이 되기 일쑤다. 모처럼의 대화 분위기가 좋은 결말을 내놓을 수 있길 바라면서,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제언한다. 과거사 문제는 일제가 한반도를 식민 지배한 역사를 일본이 어떻게 인식하느냐의 문제와 그 시기에 있었던 가해를 어떻게 배상·보상할 것이냐 하는 문제로 집약된다고 본다.

첫째, 위안부와 강제노역에 대한 배상·보상 문제에는 길고 긴 우여곡절이 있었다. 위안부 문제는 어렵게 정부 간 합의(2015년 12월)를 이뤘으나, 논란 끝에 화해치유재단도 해산(2018년 11월)하게 됐고, ‘윤미향 사건’으로 관련 시민운동의 진정성도 크게 손상되는 혼란을 겪었다. 또한, 강제노역에 관한 대법원 판결(2018년 10월)은 1965년의 청구권협정 해석 문제까지 소환했고, 수출 규제로 우리를 길들이려 했던 일본에 대해 우리 정부는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 종료로 응수하면서 양국 관계는 최악으로 치달았다.

가해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므로 가해의 정도를 금액으로 따져서 요구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돈만으로 이 문제를 해결한다는 것은 정말 개운찮다. 저들의 협량함을 꾸짖는 한편, 한때 나라의 무능으로 인해 우리 국민이 당한 치욕과 상처는 우리가 보듬는 게 국격을 세우고 국민적 자존심을 지키는 일이라고 생각된다. 지금 대한민국은 세계 10위권 경제 규모와 600조 원이 넘는 예산을 운영하는 정부가 있다. 배상·보상에 관한 온갖 법리를 떠나, 옛일이든 앞일이든 우리 국민은 우리가 보호한다는 당당한 자세로 해법을 찾기를 소망한다.

둘째, 식민 지배 역사에 대한 인식 문제는 일본이 어떤 형식으로 사과하느냐의 문제로 귀결된다고 본다. 일본인들은 일상생활에서 미안하다는 표현(스미마센)을 입에 달고 살 정도다. 그런데 과거 이웃 나라에 끼친 피해에 대한 사과에 있어서는 아주 인색하다. 같은 주축국으로서 패전국이 된 독일과는 사뭇 다른 태도인데, 일각에서는 이를 섬나라인 일본은 많은 나라와 국경을 접한 독일과 달리 이웃 나라와 어깨를 스칠 일이 거의 없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기도 한다. 일본은 외교 행사 등을 통해 총론적으로 반성하고 사죄한다는 표현을 했지만, 위안부 등 구체 사안에 들어가 위법성이나 강제성을 애써 부인하는 태도를 보여 온 사실에 비춰보면 1993년 고노담화(위안부 동원 과정에서 강제성과 일본 정부의 관여 인정)와 1995년 무라야마담화(식민 지배에 대한 반성)는 의미가 있다고 본다.

문제는, 이런 공식 담화가 시간이 지나고 정권이 바뀌면서 평가절하되고 역사의 한 대목으로 자리매김하지 못하는 데 있다. 실제로 일본의 젊은 세대에서 과거사에 대한 교육을 통해 이런 담화의 존재를 알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일본은 이 공식 담화를 역사적 배경과 함께 교과서에 수록해 학생들이 배울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 담화들이 임시방편이었거나 미봉책이 아니었다면 양국 관계의 중요성과 미래 협력을 위해 교과서에 수록하지 못할 이유도 없을 것이다.

이상의 두 가지 접근은 양국이 공히 기존 입장에서 조금씩 물러서야만 가능하다. 이로써 과거사 문제를 일단락지을 수 있다면, 상호 신뢰를 바탕으로 미래 협력을 쌓아가는 훌륭한 계기가 될 것으로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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