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쿠아리움 체험이 아무리 화려한들 <아바타: 물의 길>
세계와 감각의 확장으로 나아가지 못한 <아바타: 물의 길>아바타:>
<아바타: 물의 길>을 개봉 첫날 3D관에서 관람했다. 13년 전 <아바타>를 영화사의 혁명으로 치켜세우는 세간의 평에 동의할 수 없던 나였기에 <아바타: 물의 길>이 특별히 더 흥미로우리라 기대하지는 않았다. 짐작은 크게 빗나가지 않았다. 2D로 봤다면 과연 감흥이 확연히 떨어졌을까. 이야기의 엉성함을 상쇄할 영상 체험의 진폭이 상대적으로 약할 수밖에 없을 테니 그럴 법도 하지만, 이 영화의 3D 이미지에서 감각의 새로운 지평을 별반 발견하지 못한 입장에서는 단언하기 어렵다. <아바타: 물의 길>을 돌비 시네마나 아이맥스로 관람한 이들의 찬탄에 가까운 후기를 읽으면서도 재관람 의지는 생기지 않는다.
개봉 초기라 아직 판단은 이르나 <아바타>에 쏟아지던 열광만큼은 아니라도 <아바타: 물의 길>에 대한 반응은 대체로 호의적인 편이다. ‘192분에 달하는 상영시간을 버티기에 서사는 더없이 진부하다. 그러나 압도적인 컴퓨터그래픽(CG) 구현 역량과 영상미는 대단하다.’ 한 편의 영화를 두 층위로 쪼개어 평가하는 경향이 좀 이상하지만, 이렇게 평가하는 이들은 <아바타> 시리즈가 어차피 이야기에 중점을 둔 작품은 아니므로 이분법적 세계관에 고착된 서사의 빈곤함이 큰 문제가 아니라는 견해를 공유한다. 그렇다면 두 편 모두에 대한 상찬의 근거로 사람들이 줄곧 두루뭉술하게 동원하는 ‘영상미’의 정체를 좀더 구체적으로 들여다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판도라 행성은 육체성을 발현하는 판타지 공간
<아바타>에 사로잡힌 관람자에게 이 영화가 창조한 3D 영상미는 실감의 문제와 분리될 수 없다. 어려운 이야기가 아니다. 관람자인 ‘나’와 영화 속 세계 사이에 마치 스크린이라는 장막이 증발한 것처럼 그 장소에 내가 존재하는 듯한 느낌. 그곳이 비현실적일수록 쾌감은 더해진다. 우리가 리얼리즘 영화 속 일상의 풍경을 굳이 3D 영상으로 반복 체험하러 극장에 갈 확률은 거의 없을 것이다. 요컨대 판도라 행성이라는 완전한 가상의 시공간에서 이크란이라는 낯선 생명체를 타고 하늘을 나는 것처럼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활동에 육체적으로 동행하는 감흥이 그 실감의 요체다. 그건 서사적 단계를 경유해서 인물에게 감정 이입한 결과이기보다는 스크린 바깥을 향해 공격적으로 촉수를 뻗는 이미지에 즉각적으로 접속하는 환영에 가깝다.
<아바타> 속 제이크 설리의 변모하는 상태 혹은 정체성은 이 영화를 보는 관람자의 욕망과도 연동된다. 초반, 제이크는 하반신이 마비된 전직 해병대 군인으로 아바타 프로그램에 참여하기 위해 판도라 행성에 투입된다. 그는 적어도 이곳에서는 나비족을 닮은 자신의 아바타로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다. 결말에 이르러 그가 나비족 편에서 인간과 전쟁을 벌이며 마침내 나비족의 당당한 일원이 될 때 그의 변화를 설득할 이야기의 내적 개연성은 중요하지 않다. 이 단선적인 서사의 결론을 ‘기계문명 대 대자연’의 구도 안에서 후자의 가치를 옹호하는 태도로 읽는 건 과한 해석이다.
제이크가 판도라 행성에 남는 선택은 나비족을 보호하기 위한 책임감이 아니라 마비된 몸으로 돌아가지 않으려는 안간힘으로 보는 편이 차라리 설득력 있다. 그에게 나비족의 나라는 서사적으로 정당한 장소가 아니라 제한 없는 육체성을 발현하는 판타지 왕국이다. 마찬가지로 관람자에게 그곳은 2D 영화의 전제인 물리적이고 심리적인 감각과 조건, 이를테면 프레임이라는 사각의 틀이나 스크린과 관람자 사이의 거리 등을 일순간 무너뜨리는(실은 그런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기술력의 전시장이다. 제이크와 관객은 2차원 평면에도, 서사에도 구애받지 않고 한계에 대한 감각을 제거하며 단숨에 다른 차원으로 이행해버리는 기술의 욕망을 공유한다.
영상미 집약된 바다 장면은 서사의 빈곤 덮어
<아바타: 물의 길>에서 사람들이 실감하는 영상미는 <아바타> 때와는 조금 다른 맥락에 놓이는 것 같다. 한계를 뛰어넘은 육체성에의 동화나 그 환영이 빚어낸 해방감을 2편의 핵심이라고 말하긴 어렵다. 우선 서사적 차원에서 제이크의 동력은 더는 탈주나 이행이 아닌 정주 욕망이다. 이제 그에게는 육체적 능력을 발휘하며 만끽하는 자유보다 판도라 행성에서 꾸린 가족과 뿌리를 내릴 안정된 터전이 절실하다. 호기심을 주체하지 못하고 창공과 숲을 가로지르는 어린 아들의 육체를 엄격하게 훈육하고 길들이는 일이 그의 임무다. 영화 말미를 장식하는 그의 말은 “아버지는 지킨다”다. 이처럼 앙상하고 촌스러운 가족주의 뼈대의 도입 자체에 대단한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영화가 내세우는 지극히 인간 중심적인 가족주의가 초현실적 시공간에서 3D로 활보하는 육체적 모험심을 물질적으로든 의미론적으로든 거듭 ‘집’의 서사로 소환해 제어한다는 점은 언급해둘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 기술적 차원에서 이제 관람자에게 실감의 문제는 13년 전과는 다른 위상을 점한다. <아바타>에서처럼 3D 이미지에 의해 영화 속 세계에 입회한 것 같은 기분이 지금 시점에서도 신선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제임스 캐머런이 진일보한 기술력으로 속편에 공들인 지난 시간 동안 관람자의 시지각적 경험의 층위 역시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확장됐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특수 제작된 헤드셋 안경 하나로 눈앞에 펼쳐진 가상현실(VR) 속 주인공이 되어 움직임을 조종하는 엔터테인먼트 체험은 그리 낯설지 않다. 이를테면 판도라 행성에 들어가 제이크의 아바타를 실감 나게 구경하는 대신 온전한 일인칭 시점에서 ‘내’ 것으로 ‘실감’할 수 있게 된 시대에 <아바타: 물의 길>이 창조한 새로운 영역은 뭐라 해야 할까.
캐머런의 야심은 이 영화의 영상미에 찬탄하는 사람들이 하나같이 거론하는 바다 장면에 집약된다. 이들은 종종 “초대형 아쿠아리움”, 더러는 “해양 다큐멘터리”라는 말로 온갖 해양 생명체와 작은 기포 하나하나까지 살려낸 물속 시퀀스의 황홀함을 표현한다. 이런 비유는 관람자가 서사에 대한 기대 없이도 <아바타: 물의 길>을 즐길 수 있는 이유를 제시한다. <아바타>의 3D 이미지가 입체성으로 의도한 감각적 자극을 <아바타: 물의 길>은 시각적인 거대함과 운동의 세부로 시도한다. 시작과 끝의 경계 없이 이어지며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바다의 광활함, 그 안에 사는 셀 수 없이 다양한 개체의 활기, 대형 고래처럼 생긴 생명체 ‘톨큰’의 존엄한 존재감, 바다 생태계에 육체의 리듬을 맞추는 나비족의 대범하면서도 섬세한 움직임 등은 이 영화의 3D 기술이 한껏 과시되는 부분이다.
유려하고 정교하지만 혁신이라기엔…
충돌과 파괴, 속력의 피상적인 스펙터클과 달리 끊임없이 유동하는 물의 속성을 3D는 어떤 식으로 받아들여 재현할 것인가. 물의 유연함은 어떤 질감으로 다시 탄생할 것인가. <아바타: 물의 길> 개봉 소식을 처음 접했을 때, 가장 궁금했던 건 제임스 캐머런의 상업적 감수성이 고안한 기술과 무정형인 ‘물’의 만남이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캐머런이 설계한 물 시퀀스가 기술의 유려함과 정교함으로 빛난다는 데 일견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도입부에서 말했듯 감각적 혁신을 일으키는 데까지 나아갔다고 말하기는 망설여진다.
다소 거친 비교이긴 하지만, 관람자의 육체를 관통하는 체감의 차원에서라면 언젠가 방문한 웅장한 아쿠아리움에서 느꼈던 감정의 파고가 훨씬 강렬하다. 사면이 유리로 둘러싸인 아쿠아리움 터널을 마치 ‘물의 길’을 통과하듯 걷는 동안 나를 덮친 건 사방에서 헤엄치던 생명체들의 아름다움만이 아니라, 어쩌면 그보다 몸서리쳐지는 섬뜩함이었다. 인공적으로 만든 아쿠아리움이라 해도 바다 한가운데 그들과는 완전히 다른 낯선 종으로 존재하는 기분 때문이었을까. 내 시야에 포괄되지 않고 언어로 서사화할 수 없는 세계에 대한 실감이 경이와 두려움을 동시에 자아냈을 것이다.
<아바타: 물의 길>의 바닷속 장면이 전시한 매끈한 영상미는 그런 경험과 다르다. 이것은 사람들 생각처럼 서사가 부재한 순수한 활동이 아니다. 그 기저에는 대사 없이도 전달되는 단조롭지만 강력한 관점, 의인화로 순화되거나 의미화되고 영적으로 대상화된 물의 서사가 자리한다. 톨큰에게 부여된 뜬금없는 시점 숏이나 그의 몸속을 헤집고 들어가 플래시백으로 끄집어낸 고통의 기억, 바다의 수평적 스펙터클을 아버지 대 아들, 문명 대 자연의 수직적 구도로 환원하는 서사 등이 그 예다.
깜깜한 바다의 속삭임 구현했던 3D 영화 <라이프 오브 파이>
막대한 자본으로 완성된 <아바타: 물의 길>을 보고 극장을 나서면서 무려 9년 전 관람한 3D 영화 <라이프 오브 파이>의 진귀함을 새삼 상기한 건 안타까운 일이다. 주인공과 동물들을 태운 작은 구명보트가 고요한 밤바다를 외롭고 위태롭게 부유하는 대목이었을 것이다. 태양 아래서 잠자던 심연의 빛이 마침내 어둠 속에서 수면 위로 한꺼번에 깨어나 초라한 보트를 감쌌다. 깜깜한 바다와 또 하나의 바다 같던 하늘이 현실은 물론 어느 영화에서도 본 적 없는 방식으로, 무엇에도 길들지 않은 숨을 쉬며 열리고 있었다.
3D 기술이 프레임의 경계를 지우려는 욕망 없이도 세계의 평면에 잠재된 수많은 결을 응시하는 급진적인 눈이 될 수 있다는 감격스러운 사실을 그때 깨달았던 것 같다. <라이프 오브 파이>가 3D 이미지로 일깨운 건 기술력이나 육체적 실감 이전에 여전히 영화가 탐험해야 할 눈의 무한한 가능성이었다. 미지의 바다를 화려한 초대형 수족관으로 만들지 않고도 ‘영화’로 상상한 물의 속성, 인간화되지 않은 물의 고유한 속삭임을 우리는 이미 오래전에 목도했다.
남다은 영화평론가·<필로>(FILO)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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