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프] 인간의 '선택'은 자유의지일까, 그저 운명일까
선택의 이유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신경외과 1년 차 전공의의 낮고 묵직한 목소리가 퍼진다.
"응급 환자가 수술방으로 올라가야 하니 모두 내려주세요."
뇌출혈 환자가 누워있는 침상을 1년 차는 머리맡에서 운전했고 인턴이었던 나는 발밑에서 밀었다. 야간 신경외과 응급 수술방에 도착했을 때 수석 전공의 4년 차(치프)는 2년 차와 함께 수술 장갑을 낀 양손으로 팔짱을 끼고 있었다. 무균 상태의 장갑 낀 손이 머리 위로 올라오거나 허리 아래로 내려가면 다시 세균에 오염될 수 있어서 수술 준비를 마친 집도의는 팔짱을 낀 채 환자를 기다린다. 환자를 수술대 위로 이동시킨 후 환자를 옮겼던 침대와 함께 수술실 밖으로 빠져나가려던 순간이었다.
"손이 부족하니까 인턴 선생은 (수술 방에) 들어와."
치프의 말이 반가울 리 없다. 밤샘을 한다고 따로 휴식을 주는 것도 아니고 다음 날 오전 6시부터 있을 중환자실 인턴잡을 누가 대신해줄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치프의 명령은 그야말로 '열정 페이'를 요구한 것이다. 환자의 두피는 물음표 모양으로 벗겨져 나갔다. 두피 아래 혈관 속에서 혈액이 방울방울 떨어질 때면 곧이어 전기로 지혈하는 살 탄 냄새가 이어졌다. 두개골은 하얀빛을 냈다. 사람마다 피부색은 달라도 뼈 색은 같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드릴로 두개골 세 곳에 구멍을 낸 후 전기톱이 그 사이를 오가며 뼈가 열린다. 신경외과 선생님들은 '뚜껑을 연다'고 표현했다. 회색빛의 뇌막은 금방이라도 터질 듯이 부풀어 올라 있었고, 그 안쪽으로 붉은빛이 서려 있다.
"원래는 뇌막 밑이 하얗다. 이 환자는 밑에 피가 고여 있어서 빨갛게 보이는 거야. 뇌막을 젖히면 바로 보일 거야."
뇌막은 얇은 고무 막 같았다. 치프는 핀셋으로 뇌막의 한 끄트머리를 잡고 가위(메젬바움)로 오려냈다. 가위질은 거침이 없으면서도 신중했다. 뇌를 짓누르고 있는 핏덩어리를 빠르게 제거하면서도 아래쪽 가위 날이 뇌를 다치게 하지 않아야 하기 때문이다.
선택하는가, 선택당하는가?
철수에게는 k→t→d→q→v의 알파벳들이 0.5초 간격으로 나타났다. 철수는 d가 나타나자마자 오른쪽을 누르겠다고 마음 먹었고, 실제 누른 건 1초 후인 v가 나타날 때였다. 이런 과정에서 철수의 뇌에서는 어떤 변화가 나타나는지 뇌 기능 MRI로 관찰했다. 철수가 오른손을 움직여 버튼을 눌렀을 때 철수의 오른쪽 손을 담당하는 뇌 부위가 큰 파형을 나타냈다. 이 시각은 알파벳 v가 나타냈을 때와 일치했는데 당연한 결과였다.
연구팀의 궁금증은 철수의 오른손을 움직이게 한 파형이 언제 시작됐는지였다. 다시 철수에게 나타난 알파벳을 살펴보자. 0.5초 간격으로 k→t→d→q→v가 나타났고 철수는 d에서 머릿속으로 결정한 후 v에서 눌렀다. v에서 나타난 오른손 움직이는 파형은 d에서 시작하리라고 예상했다. 시간으로 따지면 v보다 1초 전이다. 그런데 예상을 크게 빗나갔다. 오른손을 움직이게 한 파형은 v의 10초 전이었다. 철수는 자신이 오른쪽을 누르겠다고 의식하기 전에 자신도 모르게 이미 오른쪽을 선택한 것이다.
▶ 관련 논문 보기
[ https://www.nature.com/articles/nn.2112 ]
거짓말 같은 이 연구 결과는 2008년 관련 최고 분야 저널인 네이처 뉴로사이언스(IF 24.88, 2020년 기준)에 실렸다. 이 실험이 불러온 파장은 작지 않았다. 인간의 자유의지(free will)를 부정하기 때문이다. 뇌출혈로 쓰러진 환자가 뇌수술을 통해 회복하는 과정을 지켜본 순간에 나의 자유 의지로 신경외과를 선택했다고 나는 의식하고 있지만, 그 이전에 나도 모르는 어떤 조건들에 의해 나는 신경외과를 선택했다는 의미이다. 이럴 경우 신경외과를 선택했다기보다는 신경외과에 내가 선택 당한 것이라고 표현하는 게 더 논리적이다.
날숨과 시행착오 그리고 상상력
[ https://www.cell.com/trends/cognitive-sciences/fulltext/S1364-6613(21)00093-0 ]
이에 대해 철학자들은 과학이 완벽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태양을 중심으로 지구가 돌고 있지만, 그것을 몰랐던 시절처럼 자유의지가 있지만 아직 그것을 과학이 입증하지 못하고 있는 시기일 뿐이라는 것이다. 철학과 과학의 흥미진진한 논쟁을 지켜보노라면 삶이 허무해지기도 하고 반대로 신성해지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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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s://premium.sbs.co.kr/article/vP0ARYMMVE ]
조동찬 의학전문기자dongcharn@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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