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역에서 금수탑을 바라보노라니

한겨레 2022. 12. 27. 0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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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심정] 원철스님의 소엽산방]

경북 안동시 임청각. 일제가 민족정기를 말살하기 위해 임청각을 나누어놓은 철로. 안동시 제공

고택과 고탑 앞을 가로지르던 철길을 걷어내면서 시작된 안동 임청각 주변은 공원화 사업으로 분주하다. 특히 탑 앞을 가로막고 서있던 방음벽 철거만으로도 그 동안 답답함과 숨막힘이 어느 정도 해소되었다. 덕분에 높이 17m 7층인 한국 최고 규모를 자랑하는 전탑(塼塔, 돌을 벽돌처럼 깎아 만든 탑, 국보)이 더욱 훤출하다. 찾는 이들은 동남서북으로 돌면서 사방에서 배례(拜禮)할 수 있고, 또 멀리서 가까이서 원근(遠近)을 오가며 바라볼 수 있도록 본래 공간을 회복한 것이다.

늦가을 푸른 하늘을 이고 서있는 도로표지판에는 ‘안동 법흥사지 칠층 전탑’ 그리고 ‘고성 이씨 탑동종택’이라고 써놓았다. 유명한 종갓집 앞에도 ‘탑동’이란 말은 빠지지 않았다. 그만큼 고택과 전탑은 둘이면서 또 하나됨을 추구했던 것은 이 가문의 불가적 인연이 한몫했다. 이 집안 출신인 고려 말 행촌 이암(杏村 李嵒 1297~1364) 선생은 공민왕 때 고위 관료를 지냈다. 말년에는 벼슬을 버리고 강화도에 은둔하면서 1363년 <단군세기>를 저술한 역사학자이기도 하다. 동생은 운암(雲庵)이라는 고승이었다. 또 16국사를 배출한 승보종찰 송광사의 13대 국사를 지낸 각진(覺眞 1270~1355) 대사가 삼촌이라고 조용헌 선생은 족보를 추적하여 저서 <명문가>에 밝혀 두었다.

안동시 귀래정. 안동시 제공

‘탑동 103 카페’라는 입간판이 서 있는 솟을대문을 지나 고택 안으로 들어갔다. 마당의 직사각형 연못에는 서리를 맞고서 말라버린 연잎과 연실이 가득하다. 법당 자리로 추정되는 터에 지어진 전형적인 한옥 안으로 들어갔다. ‘북정’(北亭)과 ‘영모각’(永慕閣)이란 현판이 걸려 있다. 정자 기능과 사당 기능을 함께 하는 공간임을 짐작케 해준다. 현재는 ‘북카페’로 운영되고 있다. 여기서 바라보는 전탑 풍광이 가장 일품이다. 창호문을 열고서 앉고 서기를 반복하며 탑을 전체적으로 혹은 부분적으로 살폈다. 카페 주인이 차와 디저트를 갖다주며 한 마디 던졌다.

“정말 탑에 진심이시네요.”

안동을 다녀온 지 며칠 뒤 서울 종로 인사동 어느 갤러리에서 열린 ‘탑 사진전’을 찾게 되었다. 작가는 언젠가 새벽 경주 감은사 탑 앞에서 뭔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삘’이 꽂이더라고 했다. 그 감동은 인물·패션 분야 사진에서 탑 사진까지 영역을 넓히는 계기가 되었다. 특이한 것은 탑의 뒷배경을 인물사진 찍을 때처럼 암막천으로 완전히 가리고는 오직 탑만 드러나게 하는 방법을 사용했다. 그리하여 사진을 감상하는 이로 하여금 모든 시선을 탑에 집중토록 만들었다. 관람객들은 이구동성으로 ‘정말 탑에 진심’이라고 입을 모았다.

안동역 금수탑. 안동시 제공

법흥사지 전탑을 찾았을 때 이미 ‘탑에 진심’이라는 말을 들었다. 그 날 탑동카페에서 차를 한 모금 하고서 숨을 돌린 후 탑 너머 강 건너편을 바라보았던 기억까지 더듬었다. 나지막한 작은 산이 눈앞을 가려주는 안산(案山) 노릇을 하면서 이 터를 더욱 안온하게 해준다. 언덕 끝자락에는 낙동강과 반변천이 합류한다. 흔히 명당을 말할 때 빠지지 않는 쌍계합수(雙溪合水) 지점은 따로 와부탄(瓦斧灘)이라고 불렀다. 11대 종손인 허주 이종악(虛舟 李宗岳 1726~1773) 선생은 1764년 집 앞에서 배를 띄우고 반변천을 따라 오르면서 주변 풍광을 12폭 그림으로 남겼다. 그 가운데 일곱번째 ‘선사심진’(仙寺尋眞)은 신선이 살고 있을 것 같은 운치 있는 절을 찾는 그림이며 12번째 마지막 그림 ‘반구관등’(伴鷗觀燈)은 반구정에서 민가에 켜진 등불을 바라본다는 주제로 그린 그림이다. 봄이 무르익은 사월 초파일 무렵 5박6일의 뱃놀이 일정이었다.

이 터는 행촌 이암의 손자인 이증(李增 1419~1480)이 안동에 자리를 잡으면서 그 인연이 시작되었다. 그의 둘째 아들 이굉(李汯)은 집 앞의 두물머리인 와부탄에 1513년 귀래정(歸來亭)을 세운다. 이어서 셋째아들 이명(李洺)이 1519년 이 자리에 임청각(臨淸閣)을 건립한다. 이후 세월이 흐르면서 500년 역사를 지닌 고성(固城) 이씨 종택인 1000평 99칸 규모의 한옥이 완성되었다. 일제강점기 때 집 앞으로 철도가 지나가면서 훼손되어 현재 70칸 정도가 보존되고 있다.

임청각 주인이었던 독립운동가 석주 이상룡. <한겨레> 자료사진

그때 철도에는 증기기관차가 달렸다. 옛 안동역에는 증기기관차에 물을 공급했던 급수탑(근대문화유산)을 보존하고 있다. 임청각 주인인 석주 이상룡(石洲 李相龍 1858~1932) 선생은 1911년 1월5일 가산을 정리하여 독립자금을 마련한 후 안동역에서 증기기관차를 타고 칼끝보다 날카로운 삭풍을 헤치며 만주 망명길에 올랐다. 그때 바라봤던 급수탑일 것이다. 하지만 디젤기관차 시대로 바뀌면서 노선 자체가 현재 역 건물 쪽으로 수십m 이상 이동한 것 같다. 이후 급수탑은 기능을 상실하면서 역 경내지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가장자리에 혼자 우두커니 서있다. 하지만 안동역 마저도 2020년 12월 딴 곳으로 옮겨갔다. 임청각 복원을 위한 철로 이전 사업의 일환이다. ‘라떼’ 세대의 인기 대중가요인 ‘안동역 앞에서’ 노래비도 세월이 흐른 뒤에는 후손들이 “역도 아닌 자리에 이 비석이 왜 있느냐?”고 되물을 것 같다. 이미 역으로서 기능은 사라지고 지역사회 문화소통공간으로 변모한 까닭이다.

안동 법흥사지 칠층전탑. 안동시 제공

그럼에도 역 광장 한켠에는 법림사 옛터 오층전탑(보물)과 당간지주가 남아 있다. 법림사 터에는 기차역을 만들었고 법흥사 터에는 종갓집이 들어왔다. 그럼에도 탑은 꿋꿋이 지금까지 그 자리를 지키면서 두 곳이 모두 신라시대 창건된 장구한 역사를 가진 절터임을 말없이 알려준다. 어쨌거나 모든 것은 변해가기 마련이다. 하지만 변해간다는 그 사실을 알려주는 증표라는 점에서 전탑과 급수탑 그리고 노래비와 레일 또 정자터가 주는 의미까지 읽어내는 것은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몫이라 하겠다.

임청각과 귀래정 명칭은 중국 시인 도연명(陶淵明 365~427)의 ‘귀거래사’(歸去來辭)라는 작품에서 비롯되었다. 명시는 시대와 지역을 뛰어넘기에 원저자의 고향집뿐만 아니라 안동종택에도 잘 어울린다.

등동고이서소(登東皐以舒嘯) 동쪽 언덕에 올라 휘파람을 불고

임청류이부시(臨淸流而賦詩) 맑은 물가에서 시를 짓는다.

글 원철 스님(불교사회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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