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응용 과학이 아닌 과학의 응용’ 파스퇴르가 인류에게 남긴 선물
미생물학과 화학에 조예가 깊었던 루이 파스퇴르. 19세기 생물학, 농학, 의학 및 위생학 분야의 가장 큰 과학적 혁명들 뒤에는 그가 있었다. 파스퇴르는 광학 이성질체를 발견했고, 백조목 플라스크를 활용한 실험을 통해 생물속생설을 입증했으며, 저온살균법을 제시했다.
또한, 닭 콜레라 백신과 탄저병 백신을 개발했다. 특히, 광견병(공수병)에 걸린 개에 물린 9살의 조세프 마이스터에게 그가 개발한 세계 최초의 광견병 백신을 접종해 소년을 죽음에서 구해낸 사례가 널리 알려졌다. 인간에 대한 백신 접종의 개념이 정립되지 않았던 시절, 이는 과히 전 세계인을 놀라게 한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그렇다면 오늘날까지 살아 숨 쉬는 그의 가장 빛나는 유산은 무엇일까? 혹자는 파스퇴르 우유라 할 수도 있겠다. 파스퇴르의 저온살균법을 활용한 제품으로 언제든 마트에서 찾아볼 수 있으니 국내에서는 그리 여겨질 수도 있겠다. 그러나 필자는 파스퇴르연구소를 꼽는다. 파스퇴르연구소는 과학적 성과를 공중보건으로 연계하기 위해 평생을 헌신한 그의 산물이다.
파스퇴르는 전 세계로부터 모집한 후원금을 기반으로 1887년 프랑스 파리에 첫 번째 파스퇴르 연구소(Institut Pasteur)를 설립했다. 파스퇴르 연구소는 지금까지 일리야 메치니코프, 프랑소와 바레-시누시 등 10명의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했으며, B형 간염 예방 백신 세계 최초 개발, 에이즈(AIDS) 바이러스 규명 등의 과학적 공헌을 했다.
첫 번째 파스퇴르 연구소 개관 후 135여 년이 지난 현재, 전 세계 25국의 33개 멤버로 구성된 파스퇴르 네트워크(Pasteur Network)가 활동 중이다. 자신을 ‘파스퇴르인’이라 명명하는 2만3000여 명의 감염병 및 공중보건 전문가들은 세계 각지에서 기초연구, 교육, 보건의료 활동을 펼치며 신변종 감염병에 대한 파수꾼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한국에도 파스퇴르인이 있다. 경기도 판교테크노밸리에 위치한 한국파스퇴르연구소가 바로 그들이다. 한국파스퇴르연구소는 감염병 연구를 통해 공중보건에 기여하는 국내 비영리 연구기관이다. 2004년 한국과 프랑스의 과학기술 협력의 일환으로 설립되어 프랑스 파스퇴르연구소의 바이오·의학 분야 전문성과 한국의 정보통신(IT) 기술을 접목했다.
10여 국 출신의 연구진은 이곳에서 파스퇴르연구소의 공통적인 사명인 연구, 교육, 국제협력, 공중보건을 기치로 감염병에 맞서 싸운다. 특히, 신·변종바이러스, 내성세균, 기생충으로 인한 질병 퇴치를 목표로, 치료·예방·진단 전략 수립에 매진하고 있다. 주요 연구 분야는 코로나19, 메르스(MERS, 중동호흡기증후군), 중증열성혈소판감소증후군(일명 살인진드기바이러스), 지카, 결핵, 바이러스성 간염, 항생제내성균 감염, 소외질병, 암 등이다.
한국은 세계적 수준의 연구기관인 파스퇴르연구소를 국내 유치함으로써 국가 연구개발 역량 선진화를 도모하고자 했다. 이에, 한국파스퇴르연구소는 글로벌 공중보건을 향한 파스퇴르인의 사명을 이어가는 동시에 국가 감염병 대응 전략 자산으로서의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고 있다.
특히 코로나19 팬데믹 발생 초기인 2020년 초, 치료제 후보물질을 신속하게 도출해 발표했고 국제적인 네트워크를 활용해 멕시코, 세네갈, 호주 등지의 글로벌 임상시험으로 연계했다. 이는 코로나 치료제 연구개발을 촉진하는 고무적 성과로서 국내외 과학계의 주목을 받았으며, 20개국 이상의 국가원수와 유엔(UN) 사무총장, 세계보건기구(WHO) 사무총장 등의 글로벌 리더가 다수 참여하는 국제회의인 제3회 파리평화포럼에서 발표되며 전 세계에 널리 알려졌다.
또한, 코로나19, 메르스, 항생제내성균, 간염, 간암 등에 대한 신약 후보물질을 개발해 기술이전했다. 연구소 R&D 파이프라인의 가장 선두주자는 내성 결핵을 효과적으로 치료하는 혁신신약 후보물질인 Q203(텔라세벡)이다. Q203은 연구소의 스핀-오프 바이오벤처인 큐리언트에 기술이전 후 현재 임상 2a상까지 개발이 완료됐다.
이러한 성과는 한국, 프랑스 양국의 연구역량과 혁신기술이 융합한 결과다. 한국파스퇴르연구소는 고위험 병원체 연구에 특화된 생물안전3등급(BL3, BSL-3) 연구시설을 2008년 국내 최초로 승인 받았다. 특히, 본 시설 내에서 이미지 기반 신약개발 스크리닝 플랫폼을 가동해 신변종 감염병에 대한 치료제와 백신의 후보물질을 신속하고 정확하게 찾아낸다.
이를 위해 살아있는 세포 내에서 발생하는 감염, 치료, 면역 등의 복잡한 현상을 정밀하게 분석하는 고유의 이미징 기술을 활용한다. 연구진은 인공지능(AI), 3D 연구모델, 비침습 기술, 빅데이터 등의 최신 기법을 접목하고, 프랑스 파스퇴르연구소와 공동연구유닛을 구축해 이미징 기술 고도화를 위해 끊임없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연구소는 고유의 감염병 연구 기술과 인프라를 활용해 국가 감염병 대응에 기여하고 국내외 산학연 연구자를 지원한다. 범정부 감염병 연구기관 협의체, 과기부 바이러스연구협력협의체, 질병청 항바이러스제 약물평가 거점 실험실, 국가전임상시험지원센터 등에 참여하고 있으며, 국내외 산학연 연구자에게 신약·백신 후보물질의 효능 평가를 위한 스크리닝 기술 지원도 제공한다.
특히, 연구소는 과학기술정보통신부의 지원을 바탕으로 신규 생물안전3등급 연구시설, 생물자원은행 등으로 구성된 바이러스연구자원센터를 구축중이다. 본 센터는 2023년 완공 후 오픈랩 형식으로 운영되어 산학연 연구자가 공동으로 활용할 수 있는 수도권 지역 바이러스 기초연구의 핵심 인프라로 활용될 것으로 기대된다.
또한, 한국파스퇴르연구소는 파스퇴르 네트워크 내 아·태지역의 대표 연구소로서 활동중이다. 정례 미팅, 공동 워크샵 등을 통해 지역 내 10개 멤버간 과학적 교류와 협력을 촉진하고 감염병 공동대응 기반 마련을 위해 박차를 가하고 있다.
아울러, 소외질환신약개발재단(DNDi), 글로벌항생제내성연구개발비영리단체(GARDP), GloPID-R, 국제보건기술연구기금(RIGHT foundation) 등 감염병 분야 주요 국제기관과 광범위한 국제협력을 수행한다. 이러한 노력에 파스퇴르 네트워크의 풍부한 자원을 더해 한국와 글로벌 과학 커뮤니티를 연결하는 가교를 제공한다.
차세대 과학자 양성과 바이오 생태계 조성을 위한 노력에도 힘쓰고 있으며, 과학기술연합대학원대학교(UST) 석박사 과정, 바이오 스타트업 육성 프로그램 등을 운영한다.
상기 일련의 활동은 한 세기를 넘어 루이 파스퇴르와 한국파스퇴르연구소를 관통하는 가장 주요한 가치로 수렴된다. 바로 연구 성과의 실용화다. 파스퇴르는 ‘응용과학이 아닌 과학의 응용(applications of science)’을 주장했다. 한국파스퇴르연구소는 2000년대 초 ‘중개연구’를 국내에 선도적으로 도입했다. 기초연구 결과에 머물지 않고, 데스밸리(death valley)를 지나 인류의 건강 증진에 기여하는 상용적 성과로 이어질 수 있도록 역량을 집중한다. 신약 후보물질, 백신 플랫폼, 진단 바이오마커 등 탁월한 연구 성과를 창출하고, 국내외 바이오 기업 및 벤처에 기술이전해 후속개발로 연계한다.
2022년 한국파스퇴르연구소는 연구개발 5개년 전략을 수립하고, 감염병 대응 플랫폼 고도화, 전문인력 양성, 국제 네트워크 활성화를 골자로 하는 세부계획을 정비했다. 이는 국가 감염병 대비·대응의 핵심 축이자 아·태지역 감염병 거점 연구소로서 글로벌 공중보건에 기여하는 역할을 공고화 하기 위한 중기 로드맵이다. 또한, 인류의 보다 건강한 삶을 위해 연구 혁신을 거듭하고 실용화를 위해 끊임없이 정진하는 파스퇴르인의 신념이 담겼다. 이것이 루이 파스퇴르가 우리에게 남긴 선물이다.
“과학에 평생을 바친 이에게 가장 큰 행복은 새로운 발견들을 쌓아가는 것이겠지만, 연구 결과가 실용적인 활용으로 빠르게 연계될 때의 기쁨은 한없이 크다.” (루이 파스퇴르)
“To him who devotes his life to science nothing can give more happiness than increasing the number of discoveries, but his cup of joy is full when the results of his studies immediately find practical applications.” (Louis Pasteu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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