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죽었는지는 알아야 할 것 아닌가” [2022 올해의 인물]

주하은 기자 2022. 12. 27. 0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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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이태원 참사’는 한국 사회에 깊은 슬픔을 남겼다. 게다가 진상 규명은 더디게 진행되고 있다. 2022년의 아픈 기억은 2023년의 과제로 남았다.
고 이민아씨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경기도 여주 자택에서 취재진에게 딸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시사IN 신선영

〈시사IN〉이 선정한 2022년 ‘올해의 인물’은 ‘이태원 참사를 기억하는 사람들’이다. 2022년 10월29일, 158명이 희생된 이태원 참사는 희생자와 유가족, 생존자와 그 주변 사람들, 일반 시민들의 삶까지 뒤흔들었다. 대형 참사 앞에서 정치와 관료제는 무능했고, 우리 사회는 어떻게 참사를 기억하고 추모해야 할 것인지 근원적인 질문 앞에서 여전히 방황하고 있다. 참사를 추모하는 이들의 아픔은 물론이고 해결해야 할 질문과 과제가 여전히 산적한 상태로 2023년을 맞이한다. 굳건한 연대와 온전한 추모가 이어져야 한다는 뜻을 담아 ‘이태원 참사를 기억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한다.

10월30일 오전 6시, 아침 일찍 출근한 이종관씨는 전화 한 통을 받았다. 딸 이민아씨(24)에게 사고가 일어났다는 전화였다. 무슨 말인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그에게 상대방은 ‘얼른 TV를 틀어보라’고 말했다. 이종관씨는 그제야 전날 밤 이태원에서 벌어진 참사에 대해 알게 됐다. 집에 들러 아내 이진희씨를 태우고 서울로 바삐 달려가면서도 딸이 아직 살아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놓지 않았다.

정오쯤 서울 한남동주민센터에 도착해 실종자 신고를 했다. 2시간 후 영등포경찰서에서 전화가 왔다. 경기도 부천에 있는 순천향대병원에 이민아씨가 있다는 소식이었다. 병원에 도착한 그는 바로 영안실로 가라는 안내를 받았다. 아버지는 영안실에서 마주한 딸을 알아보지 못했다. 딸의 얼굴은 알아보기 어렵게 쪼그라들어 있었다. ‘내 딸이 아닌 것 같다’고 말하는 순간, 얼굴에 있는 점이 아버지 이종관씨의 눈에 띄었다. 오른쪽 턱에 큰 점이 있어서 아버지는 어렸을 때부터 ‘점박이’라는 별명을 부르곤 했다. 딸이 맞았다.

웬만해선 부모에게 손을 벌리지 않는, 독립심이 강한 딸이었다. 많이 도와주지 못해 미안하다고 말하는 부모에게 이민아씨는 자신이 하고 싶은 일에 대해서는 스스로 세운 계획이 다 있다며 오히려 화를 내곤 했다. 캐나다에서 전문대를 졸업한 이민아씨는 한국방송통신대학교에 편입해 직장 생활과 학업을 병행하며 대학원 유학을 준비했다. 유학 자금을 모으려고 주말엔 물류센터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참사 이후 물건을 정리하기 위해 찾아간 딸의 자취방에는 그간 고생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월급 200만원’이 써 있는 근로계약서부터 학업계획서까지, 중요한 서류들을 차곡차곡 모아둔 딸의 파일을 보며 더 마음이 아팠다고 아버지 이종관씨는 말했다. “자기 생활비를 알아서 충당하면서도 주식도 사고 적금까지 들었더라고요. 맏딸이라고 자기 혼자 어떻게든 해보려고 한 것 같아서 미안하고 죄스럽죠.”

참사 이후 부모는 딸의 흔적을 하나씩 모으기 시작했다. 딸의 친구들에게 연락을 돌려 딸과 찍은 사진을 받아 전부 인화했다. 왜 이렇게 많은 사진을 인화하느냐는 사진관 주인의 말에 아버지 이종관씨는 답하지 못했다. 그저 빨리 해달라고만 말했다. 이민아씨가 초등학교에 들어가기도 전 캠코더로 틈틈이 찍었던 영상들도 모아 한 개의 영상으로 만들었다. 이 영상을 매일 하염없이 돌려 보는 일은 부모의 유일한 낙이 됐다.

유류품으로 돌아온, 참사 당일 이민아씨가 입었던 옷마저 버리질 못했다. 그나마 수습 과정에서 하의와 외투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상의만 부모에게 돌아왔다. 어머니 이진희씨는 “핏자국이 묻은 이 옷을 남들은 태워줘야 한다고 하는데 저는 못하겠더라고요. 여기 남아 있는 딸 냄새라도 매일 맡지 않으면 못 견딜 것 같아요. 그날 얼마나 아팠을까 그런 생각이 계속 들어서요”라고 말했다.

부모는 아직 이민아씨의 유골함을 안치할 곳을 정하지 못했다. 몇 군데 봉안당을 돌아다녀봤지만 마음에 드는 곳이 없었다. 1930~1940년대 생인 다른 고인들 사이에 딸을 두는 것이 싫었다. 결국 부부는 자신들이 나중에 묻힐 묘지에 딸을 함께 묻기로 결정했다. 봄이 되면 좋은 곳을 찾아 딸을 먼저 묻어주자는 계획을 세웠다. 이민아씨가 사용하던 방 책상에는 아직 갈 곳을 찾지 못한 유골함이 영정 사진 앞에 놓여 있다.

이민아씨의 부모는 무엇보다도 딸이 어떻게 사망하게 되었는지 알고 싶다고 말한다. 한강진역 부근에서 이민아씨와 생일파티를 하고 함께 이태원으로 향했던 친구는 디스크가 파열된 채로 기절했다가 구조돼 당시의 상황을 정확히 기억하지 못했다. 딸이 어떤 응급조치를 받았는지, 어떻게 부천에 있는 병원에 옮겨지게 되었는지 부모는 여전히 알지 못한다. 아버지 이종관씨는 “다른 사람들은 어차피 죽은 거 무슨 의미가 있냐고 할지 모르겠지만, 가족들에겐 그게 아니에요. 아무리 참혹해도 자기 자식이 어떻게 죽었는지는 알아야 할 것 아닙니까. 대단한 도움을 달라는 게 아닙니다. 정부에서 알고 있는 정보라도 유족에게 알려달라는 겁니다”라고 말했다.

참사가 발생한 지 2주가 지난 11월13일, 아버지 이종관씨는 답이 오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딸에게 카카오톡 메시지를 보냈다. “내 딸 어디 있니?” 딸의 이름은, 이민아씨가 원하던 대로 ‘이쁜 딸’로 저장돼 있었다. 메시지 옆에는 지워지지 않은 ‘1’ 표시가 덩그러니 남았다.

※이태원 참사 2차 피해 우려가 있어 이 기사의 댓글 창을 닫습니다.

고 이민아씨의 아버지가 딸에게 보낸 카카오톡 메시지 옆에 아직 ‘1’ 표시가 남아 있다. ⓒ시사IN 신선영

주하은 기자 kil@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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