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요광장] 유럽의 정물화 '바니타스'
"미술이란 자연을 가장 아름답게,
완벽하게 모방하는 것이며
미술작품의 목적은
눈을 즐겁게 해 줄 뿐만 아니라
영혼 속에 파고들어 현실에서 얻어지는 인상을
마음 속에 새겨 주는 것에 있다"
자크 루이 다비드
Jaques Luies David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는 '합스부르크 600년, 매혹의 걸작들'에 나와 있는 얀 브뤼헐의 <꽃다발을 꽂은 파란 꽃병>(1608)은 생생하고 아름다운 꽃들을 담은 그림이지만 어딘지 생경스럽다. 함께 있을 수 없는 사계절의 꽃들이 한 화병에 담아 있는가 하면 바닥에 떨어진 꽃잎들, 무당벌레, 메뚜기, 파리 등의 벌레들이 이질적이다. 꽃을 특히나 잘 그려 '꽃의 브뤼헐'이라 칭송받았던 얀 브뤼헐의 정물화와 같은 그림들을 허무주의적 회화 '바니타스'라 한다.
'헛됨'을 뜻하는 라틴어 바니타스는 인생의 덧없음과 죽음을 주제로 하는 그림으로, 전도서의 '헛되고 헛되도다. 모든 것이 헛되도다'(바니타스 바니타툼 옴니아 바니타스)의 글귀의 첫 단어에서 유래되었다.
바니타스 정물화는 17세기 네덜란드. 벨기에 북부에서 주로 유행했는데, 당시 16세기 후반부터 17세기 초까지 유럽은 종교 전쟁으로 많은 사람이 죽고 내일의 삶이 보장되지 않았던 때였다. 그래서 죽음은 피할 수 없는 것이라는 깨달음을 주는 그림으로, 과일이나 꽃, 음식들을 해골, 촛불, 깨진 술잔, 죽은 새들과 함께 배치해서 그려 넣었다. 이것들이 상징하는 의미는 유한한 삶, 인생의 덧없음, 허무함 같은 것으로, 인생에서 권력도 아름다움도 지식도 부귀영화도 '죽음 앞에서는 모두 덧없음'이었다. 그래서 바니타스 정물화는 인간이 유한함을 깨닫고 삶을 직시하여 현재를 살아야 한다는 '죽음의 경고' 이기도 하다.
몇 주 전, 80세의 한 노인이 연구소에 오셨다. 30여 년을 원인 모를 통증에 시달리다 마지막으로 속는 셈치고 왔다는 내담자는 한 눈에 봐도 자수성가한 분들의 그 당당함(?)이 역력했다. <아무도 믿어서는 안 된다> 아마도 그 분의 인생철학이었을 것 같았다. 수만 마리의 쐐기가 쏘는 듯한 통증으로 불면의 밤을 지샌 지가 30 여년이 됐다고 했다.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버스 조수 일을 시작으로 안 해 본 게 없다는 그는 고물장수를 하다가 지금은 철강회사를 운영하고 있었다. 이제야 살 만한데 이 몹쓸 병에 걸려서 너무도 억울하다고, 자식 놈들은 모두 내 돈만 노리는 것 같고, 마누라도 자꾸 딴 생각을 하는 것 같다고 했다. 그래 얼마나 억울하시겠나, 열 살 때부터 일을 했으니, 단 한번이라도 자신을 위해서 살아본 적이 있었을까, 자신을 무시하는 듯한 세상의 눈치 속에서, 복수하듯이 돈을 벌어 그래서 이제야 사는 것처럼 사는가 했는데, 눈 앞에 죽음이 떡 하니 버티고 있는데, 그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그 억울함이 화가 되고 분노가 되어 자신의 몸을 스스로 공격해야만 안심이 되는 심인성 자기면역질환까지 생긴 것이다.
가장 치료하기가 어려운 게 노인성 질환이다. 수십 년간 굳어진 마음의 각질들을 벗겨내기가 쉽지 않다. 아니 불가능하다. 다만 그들이 살아냈던 그 경험과 그 경험 끝에 얻은 삶에 대한 신뢰, 자신에 대한 믿음에 기대는 수밖에 없다. 허망하고 부질없는 삶일지라도 오늘을 생생하게 살아내야 한다는 것을, 단 하루를 살더라도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즐거운 일을 해야 함을 말이다.
죽음이 가져오는 허무함은 삶의 의지를 상실하는 허무가 아니라 오히려 유한함에 대한 자각으로 영속할 수 없음을 깨닫게 하는 허무함이다. '죽음을 기억하라'는 'Memento Mori'는 로마에서 승리하는 장군이 행진할 때 노예들에게 시켜서 했던 말이다.
바니타스 정물화는 아름다움을 감상하는 것뿐 아니라 풍요로움 속에서 유한함을 느껴 현실을 직시하게 하는 힘이 있다.
모든 생명의 여정은 시들고 사라지는 과정일 것이다. 그래서 겉으로 보이는 모습에만 집착하면 절망과 낙심에 빠질 수밖에 없다. 지금의 아름다움을 누리지만 한편으로는 변화의 길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 성숙한 삶은 죽음을 인식할 때 가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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