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 베일과 소통 사이…재벌 출입기자가 본 '재벌집 막내아들'

문창석 기자 2022. 12. 27. 0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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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이성민이 17일 오후 서울 여의도 페어몬트 앰배서더 호텔에서 진행된 JTBC 금토일드라마 '재벌집 막내아들'(연출 정대윤/극본 김태희) 제작발표회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2022.11.17/뉴스1 ⓒ News1 권현진 기자

(서울=뉴스1) 문창석 기자 = "정말 그래요?"

최근 연일 시청률 기록을 경신하며 화제 속에 종영한 대세 드라마 '재벌집 막내아들'이 방영되는 동안 기자가 주변에서 가장 많이 들은 질문이다.

4년 가까이 재계를 출입하면서 삼성·LG·SK·한화 등 대기업을 취재한 기자에게 지인들이 가장 궁금했던 건 정말로 재벌들이 '재벌집 막내아들' 내용처럼 살고 있는지였다.

아쉽지만 기자도 명확한 답을 내놓진 못했다. 대기업 오너 일가들과 직접 대화를 나눌 기회가 제한돼서다. 그래서 기자도 최근 기업인들을 만날 때면 늘 같은 질문을 하게 된다. "정말 그래요?"

재밌는 건 극 중 '순양' 같은 대기업에 실제로 다니고 있는 다수의 기업인들은 이 드라마에 비판적이라는 점이다. 드라마적 재미와는 별개로, 이렇게 재벌가의 암투를 과장해서 다룬 '재벌 마케팅' 콘텐츠가 은연중에 반(反)기업 정서로 연결된다는 것이다.

기업인들 중 "단순한 킬링타임용"이라는 평가는 차라리 좋은 편에 속했다. "무협지가 더 현실적"이라거나 "이젠 우리(재벌기업)가 드라마에서 시어머니보다 더 강력한 최종 보스가 됐다"는 조소도 나왔다.

이들이 주로 비판하는 건 극 중 대기업 오너의 비윤리적 인식이 드러나는 부분이다. 가령 순양가(家) 불법 승계를 위한 비자금을 조성하는 과정에서 주가 조작으로 개인투자자들이 막심한 피해를 입어 주인공이 지적하자, 순양그룹 회장인 진양철은 "그 사람들을 니가 와 걱정하노? 니는 평생 서민으로 살 일이 없다"고 말한다.

정도경영에 대해선 "내한테는 돈이 정도(正道)"라며 단칼에 자르고, 노사관계에 대해선 "머슴을 키워가 등 따습고 배부르게 만들면 왜 안 되는 줄 아나? 지가 주인인 줄 안다"고 일갈한다.

한 대기업 오너를 지근거리에서 봐 왔던 재계 고위 관계자는 이렇게 말한다.

"진짜 재벌집 사람들이라면 절대로 그렇게 이야기하지 못한다. 기업인이 가장 경계하는 게 선민의식이다. 본인이 화성인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지구인을 상대로 한 회사 경영을 접을 수밖에 없다. 어린 날 한 순간의 치기로 그런 생각을 하더라도 혹독한 경영 수업 과정에서 100% 바뀐다. 내가 지금까지 직접 보고 들은 오너 일가는 특권층이 아니라 밤새 일하는 하드워커에 가깝다."

아마도 그의 말은 사실일 것이다. 드라마인 이상 상당수의 대사나 상황이 허구라는 점은 감안해야 한다. 하지만 중요한 건 대중들은 현실에서 일어난 여러 사건·사고들을 보며 재벌들의 그런 말과 행동이 실제로 있을 법한 일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재벌집 막내아들'에서 다뤄진 정경유착, 비자금 조성, 불법승계, 경영권 다툼 등은 모두 현실에서 일어났던 일이다. 수 년 전 불거졌던 한 대기업 오너 일가의 갑질 논란은 오히려 창작물이 현실을 따라가지 못했고, 최근 터진 재벌 3세들의 마약 스캔들은 이젠 놀랍지도 않다는 게 놀랍다. 기업인들이 우려하는 반기업 정서는 재벌을 다룬 수많은 영화·드라마가 아니라 여기에서 출발한 것이다.

일부 기업인은 본인의 위치에서 업무에 매진하는 게 해결책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가끔 일탈 행위를 하더라도 수출을 늘리고 일자리만 많이 만든다면 국민들이 나의 진심을 알아주리라는 생각은, 단순히 마름들을 등 따습고 배불리 먹이면 좋아할 것이란 지주의 마인드와 다르지 않다. '사업(事業)'과 '보국(報國)'이 동의어였던 건 군사정부 시절까지다.

미디어에서의 왜곡된 모습으로 반기업 정서가 강화되는 현상에 대해 당사자인 재벌기업 총수가 직접 고민한 적이 있다.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지난해 12월 대한상공회의소 회장 자격으로 가진 송년 인터뷰에서 했던 말을 그대로 옮겨 본다. '재벌집 막내아들'이 기업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를 강화한다고 생각하는 기업인들에게 조금이나마 답이 될 듯 하다.

"영화·드라마에서 과장된 형태로 (재벌이) 표현되면 '저 사람들은 나쁜 것 같다'고 생각하죠. 그래서 소통이 필요합니다. 우리 기업인이 누구냐를 제대로 보여주는 게 중요합니다. 드라마에서 나오는 기업인의 모습이 정말 그럴 것이라고 착각하는 건 문제죠. 기업인들이 그렇지 않다는 걸 알려줘야 합니다. 실제로 기업인이 (TV에) 나와서 어떤 생각과 스토리를 갖고 있는지 보여줘야 한다고 봅니다. 올해는 제가 많이 나갔지만, 내년·후년에는 다른 기업인들에게 출연을 권유할 겁니다. 나와서 직접 소통하고 보여줘야 합니다."

"정말 그래요?"라는 지인들의 질문에 명확한 답을 내놓진 못했지만, 어림짐작으로는 답변하고 있다. 3년 전 장교동 한화빌딩을 방문해 한 취재원을 만나고 나온 기자는 퇴근시간에도 유독 붐비지 않는 한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이윽고 도착해 열린 엘리베이터의 안쪽에는 김승연 회장이 서 있었다. 눈이 마주친 김 회장은 기자에게 손짓하며 "얼른 타"라고 말했다.

동승한 경호원들은 '감히 회장님 전용 엘리베이터를 세운 간 큰 직원'인 기자를 어이없다는 듯 쳐다봤다. 괜찮다며 재촉하는 김 회장의 말에 탔지만 한화 직원으로 알고 있었기에 기자임을 밝히진 않았다. 업무는 괜찮냐는 질문에 "열심히 하겠습니다"고 말하고 1층에서 내렸다.

김 회장이 자택에서 '재벌집 막내아들'의 진양철처럼 살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나중에 엘리베이터를 타려는 사람에게 자리를 내어줄 수 있는 일반적인 상식을 가진 인물이라는 점이다. 어쩌면 '괴물'로 묘사되는 재벌은, 그가 실제로 어떤 사람인지 판단할 수 없는 공백을 대중문화 콘텐츠가 채운 것일지도 모른다. 결국 그 공백은 '재벌집'이 스스로 나서서 메워야 한다.

themoon@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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