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칠부 다이어리] 고생 끝에 오른 5,115m 꼭대기는 ‛야크 화장실'
지난번 도르파탄Dorpatan에서 하돌포Lower Dolpo까지 진행한 나는 좀 더 북서쪽으로 가보기로 했다. 이곳 역시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곳이다. 돌포Dolpo 지역은 네팔에서도 가장 외진 곳 중 하나로 하돌포와 상돌포로 나뉜다. 춥고 척박한 곳이라 1년 농사를 지어도 4~5개월분의 식량밖에 수확하지 못한다.
두나이Dunai(2,140m)에서 흔들다리를 지나 돌포 안쪽으로 향했다. 아무리 새로운 길을 추구해도, 걷다 보면 같은 길을 여러 번 갈 때가 있다. 이 흔들다리만 해도 벌써 세 번째였다. 쳅카Chhepka(2,720m)에 도착하자 첫 손님이라며 가장 좋은 방을 내줬다.
"디디 로컬 창 미토 처(누나 로컬 창 맛있어요)."
포터 다와는 내가 창을 좋아한다는 걸 알고 물어보기도 전에 알려줬다. 막걸리와 비슷한 이곳 술인 창은 네팔 전통이라기보다 티베트 문화다. 그중에서도 돌포는 티베트 문화가 잘 유지되고 있는 곳 중 하나다. 주인 여자는 맑은 창인 니가르Nigar 한 통을 가져왔다. 니가르는 막걸리 맑은 부분과 비슷해서 맛이 더 좋았다.
우리가 가는 길에는 사람 발자국보다 야크 발자국이 많았다. 녀석들은 떼로 몰려다니며 길을 비켜주지 않기도 했다. 난감해하고 있는 인간을 무심하게 쳐다보기만 했다. 야크는 순한 동물이지만 건드려서 좋을 게 없었다. 자극하지 않으려고 조심하는데 가이드 겸 포터인 라전이 회초리를 들고 나타났다. 야크들은 라전의 어설픈 위협에 비켜주는 척만 했다.
산두와Sanduwa(3,000m) 직전에 흔들다리를 만났다. 대부분 여기서 폭순도호수Phoksundo Lake(3,600m)로 가지만 우리는 다리를 건너 풍모Pungmo(3,500m)로 향했다. 풍모 가는 길도 온통 야크 발자국이었다. 길 한가운데 앉아 있던 야크는 맞은편에서 남자 다섯이 내려오자 부리나케 산으로 달아났다. 푸석푸석한 땅에서 먼지가 한껏 피어올랐다.
계곡 안쪽에 자리한 풍모는 해가 금방 떨어졌다. 오후 3시밖에 안 됐는데도 밤처럼 추웠다. 로지Lodge(여행자 숙소) 주인은 나무로 만든 작은 방을 내줬다. 문득 사는 동안 이렇게 작은 방 하나면 되지 않을까 싶었다. 안에 딱 필요한 것만 넣고 살아도 왠지 잘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완만한 계곡을 따라갔다. 지도에 표시되어 있지 않지만 쓸 만한 야영지도 몇 군데 지났다. 잘 찾아가는가 싶더니 유룽 콜라Yulung Khola와 푸푸 콜라Phuphu Khola 사이에서 헷갈렸다. 두 길 모두 뚜렷했다. 생각 없이 걸었으면 분명 푸푸 콜라 쪽으로 갔을 것이다.
지도를 몇 번이나 들여다보면서 우리는 왼쪽, 유룽 콜라로 가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입구에 있는 돌무더기에 타르초Tarcho(경전을 적은 다섯 색깔의 깃발로 만국기 형태이다)가 잔뜩 있어서 좋은 표식이 됐다.
오후 4시의 네팔식 백반
하이캠프High Camp(4,550m)는 다와가 먼저 발견했다. 그는 야영지를 미리 파악해 두고 요리할 공간까지 만들어 놓았다. 바람이 덜 닿는 곳에 돌을 쌓고 그 안에 주방 장비를 풀었다. 다와는 대충하는 법이 없었다. 무엇을 하든 적극적이고 알아서 했다. 그동안 봤던 포터 중에서 가장 영리하고 일을 잘했다.
겨울이 오고 있는데도 주변에 방목하는 야크가 많았다. 야크는 폭설이 내릴 때 아무것도 먹지 않고 일주일을 버틸 수 있다고 한다. 배를 덮는 풍성한 털을 보면 어떤 추위에도 까딱없을 것 같긴 하다. 해가 물러가자 추위가 엄습했다. 낮인데도 텐트 안에서 입김이 나오는 것을 보니 밤이 길 것 같았다. 라전은 오후 4시에 달밧Dal Bhat(네팔 주식으로 밥과 반찬, 콩수프가 나온다)을 가져왔다. 날이 더 어두워지기 전에 밥을 먹고 치워야 했다.
야크들은 어디에 있다가 다시 나타났는지 이른 아침부터 풀을 뜯었다. 시린 손을 주무르며 라전과 텐트를 정리했다. 간밤엔 진저리나게 추웠다. 체감상 이곳 하이캠프의 추위는 고도 5,800m 이상이었다. 몸 전체가 으슬으슬했다.
11월의 서쪽은 예상보다 추웠다. 찬 기운에 콧물이 뚝뚝 떨어졌다. 나중엔 저 혼자 주르륵 흘러내렸다. 이런 곳을 걸을 때마다 그만 와야지 하면서도 금세 잊는다. 그리곤 다시 찾을 궁리를 한다.
가다가 멈추기를 반복하다 보니 어느새 고개 언저리가 보였다. 언젠가는 가겠지, 힘든 길에선 늘 그런 마음으로 걷는다. 카그마라 라Kagmara La(5,115m) 정상 주변은 온통 야크 똥 밭이었다. 덩치에 맞게 똥이 사람 얼굴만 했다. 카그마라 라는 예전에 야크 캐러밴Yak Caravan루트였다.
돌포파Dolpo-Pa라고 불리는 돌포인들은 수백 년 동안 무역으로 살아왔다. 그들은 야크와 양가죽, 약간의 식량 등을 가지고 5,000m 넘는 국경지대를 넘어 다녔다. 티베트 창탕고원 호수의 천연 소금과 바꾸기 위해서였다. 돌포인들은 소금과 차, 공산품 등을 교환해 다시 고개를 넘어왔는데, 그때 넘어 다닌 고개 중 하나가 카그마라 라였다.
내려가는 길은 경사가 심하고 벼랑길도 있었다. 이런 곳에서도 야크들은 풀을 뜯는 데 여념이 없었다. 우리보다 1시간 먼저 도착한 다와는 벌써 밥과 반찬을 해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뭐 이런 친구가 다 있지?' 그렇다고 라전이 아무것도 안 하는 건 아니었다. 그는 내가 가파른 길에서 속도를 내지 못할 때마다 기다려줬다.
점심 먹은 곳이 카그마라 페디Kagmara Phedi(4,190m)라서 좀 더 내려가 보기로 했다. 그런데 이게 실수였다. 우리는 내려가고 또 내려갔다. 갈림길이 나올 때마다 희망을 가졌지만 어디에도 야영지가 없었다. 좁고 가파른 길만 줄기차게 이어졌다.
마지막 희망은 토이줌Toijum(2,920m)이었다. 지도에는 계곡이 합수되기 전에 야영지가 있었다. 하지만 막상 그 자리에 도착했을 땐 가장 중요한 물이 없었다. 또다시 하산. 계곡까지 내려가면 뭐라도 있을 것 같았다. 공터가 나타날 때마다 걸음을 멈췄지만 물이 너무 멀거나 없었다.
계곡을 건너자마자 털썩 주저앉았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일단 이곳에 야영지는 없었다. 다와는 여기서 아르미 캠프(군인 캠프로 네팔인들은 그렇게 불렀다)까지 가자고 했다. 이만큼 내려왔는데 다시 올라갈 생각을 하니 다리가 풀렸다. 우리는 자주 선택의 갈림길에 섰고, 그때마다 계속 가는 것으로 결정했다.
결국 아르미 캠프까지 가보기로 했다. 적어도 물은 있을 터였다. 캠프에 도착한 건 어둑해진 뒤였다. 우리는 군인들이 알려준 공터에 텐트를 쳤다. 그들에게 왜 지도에 있는 야영지와 다른지 물었더니 원래 여기가 야영지란다.
후리콧Hurikot(3,010m)부터는 찻길을 따라 걸었다. 요즘 네팔은 이런 식으로 길이 뚫린 곳이 많았다. 비포장도로를 따라가면 길을 잃을 염려는 없었지만 걷기에 지루했다. 점심은 가이리가온Gairigaon(2,900m)에서 먹었다. 사우니(여자 주인)가 달밧을 준비하는 동안 다와가 고기를 썰었다.
선반 위에 오징어 튀김 같은 게 있어서 물었더니, 명절 음식이라며 내줬다. 밀가루 튀김 같은데 맛이 좋았다. 이 집은 구멍가게를 겸하고 있어 수시로 아이들이 사탕을 사러 왔다. 젊은 사우니는 라전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라전이 잘생기긴 했다. 마을을 지나는 동안 아이들이 인사를 했다. 그때마다 나는 '나마스떼(네팔 인사)'로 화답했다.
고생한 포터들에게 준 선물
3일 동안 여러 마을을 지나 줌라에 도착했다. 줌라는 생각보다 커서 어지간한 것들이 다 있었다. 줌라에서 비렌드라나가르까지는 버스로 이동했다. 아침 7시에 출발한 버스는 밤 10시가 되어서야 도착했다.
카트만두로 돌아갈 땐 다같이 비행기를 탔다. 차마 두 친구만 12시간이 걸린다는 야간버스로 보낼 수 없었다(보통 포터들은 버스로 이동한다). 힘들고 열악한 트레킹을 함께한 두 친구에게 주는 선물이랄까. 그렇게 나는 네팔 히말라야에서 또 하나의 새로운 길을 이었다.
카그마라 트레킹 정보
기본일정
두나이-쳅카(2,720m)- 풍모(3,500m)-카그마라 하이캠프(4,550m)-카그마라 라(5,115m)-토이줌(2,920m)-후리콧(3,010m)-마니사구(2,820m)-줌라(2,540m)
카그마라 라는 하돌포에 속하는 곳으로 교통편이 좋지 않다. 트레킹은 9일이지만 이동과 예비일을 포함해 15일 정도 필요하다.
숙소가 열악한 편이다. 로지가 없는 곳이 있어 최소 이틀은 야영해야 한다. 국경과 가까운 지역으로 특별 허가를 받아야 하고 가이드 동행 역시 필수다.
월간산 12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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