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에선 '검거왕', 쪽방촌에선 '봉사왕'… 베테랑 형사의 34년 나눔 인생
22년간 영등포 쪽방촌 봉사회 활동
'범인과 형사' 악연, 봉사 인연으로
매주 점심 대접... "나눌 때 행복해"
“형님! 팥죽 좀 같이 저어줘.”
수은주가 영하 10도까지 뚝 떨어진 15일 서울 영등포구 쪽방촌 공터. ‘따뜻한 아랫목 만들기’라고 적힌 앞치마를 두른 60대 남성이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의 부름에 그릇을 씻던 ‘형님’이 한달음에 달려왔다. 두 사람은 긴 나무주걱을 집어 들더니 대형 솥 안에서 펄펄 끓는 팥죽이 바닥에 눌어붙지 않도록 쉴 새 없이 저었다. 분주한 손놀림에도 주걱이 부딪히지 않는 걸 보니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니다. 그도 그럴 것이 봉사활동을 함께한 세월만 17년이다. 인연도 각별하다. 한 사람은 34년 차 베테랑 형사 김윤석(60) 경감, 그가 형님으로 부른 이는 직접 검거한 안승호(64)씨다.
범인·형사→형님·동생, 봉사가 이어준 인연
2005년 서울 강서경찰서 강력반 형사로 일하던 김 경감은 100억 원 상당의 문화재를 훔쳐 판 절도범들을 붙잡았다. 그중에 안씨도 있었다. ‘악연(惡緣)’으로 시작된 만남을 ‘선연(善緣)’으로 바꾼 건 ‘봉사’였다. 죗값을 치르고 나온 안씨에게 김 경감은 “앞으로 좋은 일만 하고 살자”며 봉사활동을 제안했다. 안씨는 그렇게 김 경감이 이끄는 ‘쪽방촌 도우미 봉사회’의 멤버가 됐다.
안씨는 이후 매주 목요일 오전 7시면 어김없이 경기 안성의 자택을 출발해 영등포 쪽방촌으로 출근한다. 안씨는 “부끄럽게도 젊은 시절 도둑질밖에 배운 게 없었다”면서 “나를 세상 밖으로 꺼내 준 사람이 바로 김 경감”이라고 고마워했다. 안씨는 지금은 건축업에 종사한다.
"나눌 때 가장 큰 행복 느껴"
김 경감이 봉사에만 열정을 쏟는 건 아니다. 마포서 형사5팀장인 그의 별명은 ‘검거왕’. 검거 표창장만 10개에, 특진을 두 번이나 할 정도로 수사 능력을 인정받은 베테랑 경찰관이다.
민완 형사에게 어울리지 않을 법한 봉사의 삶은 1989년 경찰에 입문한 그해 시작됐다. 첫 부임지 마포서 아현2파출소 인근에 ‘삼동소년촌’이란 고아원이 있었다. 어느 날 “고아원 생활이 너무 팍팍하다”는 한 원생의 말이 그의 머릿속을 좀처럼 떠나지 않았고, 이따금 고아원을 찾아 아이들을 보살피다 보니 어느덧 봉사의 매력에 푹 빠졌다.
2000년 영등포서로 옮긴 뒤엔 영등포역 옆 쪽방촌에서 끼니를 거르는 노인에게 밑반찬을 주고 집을 수리해 준 걸 계기로 지역주민들과 봉사회를 꾸렸다. 관내 폐파출소 옥상에서 단출하게 출발한 쪽방촌 봉사는 매주 목요일 500인분용 솥 두 개를 갖다 놓고 노인과 노숙인들에게 점심 대접을 할 만큼 규모를 키웠다. 쪽방촌 주민 200여 명과 인근 노숙인 200여 명 등 소외계층의 소중한 한 끼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로 찾는 사람이 한때 절반 가까이 줄기도 했으나 올 들어 다시 늘었다. “감사히 잘 먹고 간다”면서 자리를 뜨는 한 어르신에게 김 경감은 다음 주에도 오라며 살갑게 인사를 건넸다.
김 경감은 나눔에 진심이다. 1년 휴가를 목요일 봉사활동을 위해 몽땅 쓴다. 직장인으로서 쉽지 않은 선택이지만 그는 “나눌 때 가장 행복하다”며 미소를 지었다. 진심이 통했는지 도우미들도 하나둘 모여들어 봉사회 식구는 이제 20명을 훌쩍 넘었다. 직업도 사는 곳도 모두 다르지만 베풂에 대한 신념 하나로 뭉쳤다. 쌀이나 라면을 후원하는 이들도 많아져 얼마 전부터는 강서구 가양동 일대 임대아파트 단지에서 독거노인들에게 매주 신선한 식재료를 나눠주는 일로 활동 영역을 넓혔다.
인생 후반전에도 '봉사'는 계속된다
22년이란 긴 시간은 원치 않은 이별도 남겼다. 맨 처음 그가 돌보던 60여 명의 어르신 중 세상에 남은 이는 3명뿐이다. 20년째 쪽방촌에 사는 주민 김기옥(67)씨는 “김 반장 같은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나. 늘 고맙게 생각한다”고 애틋한 마음을 전했다.
김 경감은 내후년 6월이면 제복을 벗는다. 인생 이모작에 대한 두려움이 엄습할 시점이지만 그는 외려 기대에 가득 차 있다. 트럭을 몰고 다니며 채소 장사를 할 계획인데 “휴가를 내지 않고 마음껏 봉사할 수 있으니 더 좋다”며 들뜬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옆에서 묵묵히 팥죽을 쑤던 안씨가 한마디 거들었다. “제가 참 좋은 인연을 만났죠. 김 경감처럼 남을 위해 남은 생을 바치겠습니다.”
강지수 기자 soo@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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