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사일언] 팥죽의 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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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시절, 학교에 가다 보면 전통 시장을 거쳐가야 했는데 그 한쪽 구석에는 죽집이 있었다. 연탄 난로 위에 커다란 은색 솥이 놓여 있고 그 안에 걸쭉한 검붉은 액체가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때때로 주인아저씨가 삽처럼 커다란 국자로 휘 하고 저으면 하얀 쌀알이 드문드문 보이곤 했다.
저건 대체 무슨 요리지? 무슨 맛이려나? 하지만 팥죽이라는 말을 듣고 손사래를 치며 달아났다. 소보로와 크림빵만 좋아하고 단팥빵은 싫어했던 어린이에게 팥죽은 ‘호랑이가 좋아하는’ 음식일 뿐이었다. 하지만 어른이 된 뒤, 새로 이사한 동네의 오래된 팥죽 집은 나에게 맛의 신기원을 열어주었다. 뭉근하게 오래 끓여서 깊은 맛이 나는 팥죽과 신선한 겉절이 김치의 조화란, 어째서 이제까지 이걸 못 먹고 살았는지 땅을 치고 싶을 정도였다.
대체 이 땅의 사람들은 언제부터 팥죽을 먹고 살았을까. 아주 먼 옛날 중국 공공씨의 아들이 죽어서 전염병 귀신이 되었고, 이걸 내쫓기 위해 팥죽을 먹기 시작했다고 했는데, 이 풍습은 어느새 한국으로 넘어오게 된 것이다. 1년 중 가장 낮이 짧고 밤이 긴 날인 동지. 원래는 작은 설[亞歲]이라고 할 만큼 중요한 날인 이때, 사람들은 음기를 내쫓기 위해 양(陽)의 기운이 있는 빨간 팥으로 죽을 끓여 기둥에 바르거나, 집 안 곳곳에 뒀다가 먹으며 불운을 쫓았다.
요즘도 그런 풍습을 따르는 사람이 많은지 작년 이맘때 동지를 맞아 아끼는 죽집을 찾았다가, 어마어마한 인파에 밀려 슬프게 돌아섰던 적이 있다. 올해는 뭐가 그리 바빴는지 동지가 언제인지도 모르고 넘기고 말았다.
그런데 꼭 동지에만 먹으라는 법도 없다. 팥죽 자체가 맛있어서 먹었다는 기록도 많다. 목은 이색의 글에 따르면 고려 시대의 팥죽은 질게 쑤어서 석청(꿀)을 넣어 먹는, ‘음울하고 사악한 기운을 몰아내면서 배 속도 윤택하게 만드는’ 음식이었다. 조선 시대도 물론이었다. 효종의 장인이었던 장유도 지금과 똑같은 팥죽을 먹었고, 정조는 숙직을 서고 있는 병사들에게 팥죽을 나눠 주었다. 귀신을 쫓기 위해, 떠난 고향이 그리워서, 아니면 그냥 좋아해서 수많은 이가 팥죽을 먹었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내일은 내가 아끼는 오래된 팥죽집으로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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