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학과 이탈에 추가합격 6차까지 뽑기도
반도체 계약학과의 수시 모집 결과를 보면 한국이 범정부 차원에서 육성하겠다는 한국 반도체산업의 현주소가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주요 대학의 1차 추가 합격 결과만 봐도 연세대 시스템반도체공학과는 40명 모집에 29명(72.5%), 한양대 반도체공학과는 24명 모집에 17명(70.8%), 고려대 반도체공학과는 20명 모집에 12명(60%)이 추가 합격했다. 최초 합격자 중 절반 이상이 등록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이들 상당수는 복수로 합격한 의대를 선택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 같은 이공계 기피·의대 선호 현상 속에 반도체 업계는 고질적인 인재난에 시달린다. 반도체 업계에 따르면 매년 필요한 반도체 인력은 1600명이지만 대학에서 배출되는 관련 전공 졸업생은 650명 수준이다. 이 중 기업이 특히 필요로 하는 석·박사급은 150여 명에 불과하다. 기업들이 궁여지책으로 100% 취업을 보장하는 반도체 계약 학과를 주요 대학에 잇따라 설립하고 있지만 기피 현상은 여전한 것이다.
◇연세대·고려대 반도체 학과, 삼성·SK 취업 보장됐지만 절반 이상이 의·약대로
내년에 기업이 참여하는 채용 조건형 반도체 계약학과는 올해의 배 이상이 된다. 올해는 고려대(SK하이닉스), 성균관대(삼성전자), 연세대(삼성전자) 3개 대학에서 뽑았지만, 내년에는 한양대(SK하이닉스), 서강대(SK하이닉스), 카이스트(삼성전자), 포스텍(삼성전자)이 반도체 계약 학과를 신설해 총 7개 대학에서 신입생 360명이 입학한다. 주요 대학 반도체 계약 학과는 졸업 후 최소한의 채용 절차만 통과하면 100% 계약 기업으로 취업이 보장된다.
하지만 이런 혜택에도 불구하고 반도체 계약 학과에 합격한 학생들은 의대에 중복 합격하면 의대를 선택해 떠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서강대 시스템반도체공학과의 경우 정원 20명에 추가 합격자가 47명에 달했다. 1차 추가 합격자에서도 정원을 채우지 못해 6차까지(26일 오후 3시 기준) 추가 합격자를 뽑았다. 한 대학입시 전문가는 “의대는 졸업하면 자격증이 나오는데 반도체 학과는 ‘취업’ 외에는 그만큼 보장된 게 없기 때문”이라며 “최근 글로벌 반도체 시장이 침체기로 돌아선 것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각 대학과 기업은 반도체 계약학과 신입생 이탈을 막기 위해 다양한 시도를 하고 있다. 카이스트는 합격 발표와 함께 합격자 집으로 ‘웰컴 키트’ 소포를 보냈는데, 여기에는 이광형 카이스트 총장과 경계현 삼성전자 대표 이름으로 된 편지도 포함됐다. 똑같은 내용이 아니라 합격자가 제출했던 자기소개서 내용을 인용해 ‘앞으로 ○○분야를 잘 공부하길 바란다’와 같이 각각 다른 내용의 편지를 보낼 정도로 정성을 쏟았다.
◇배터리 산업 이끌 화공과는 추가 합격자가 정원 100% 넘겨
배터리 인력을 키워내는 화학공학과 역시 찬밥 신세인 것은 비슷하다. 연세대 화공생명공학부의 경우 모집 정원이 47명인데, 추가 합격자가 49명인 것으로 나타났다. 최초 합격자들은 대부분 다른 대학을 택했고, 2차에 걸친 추가 모집 끝에 예비 합격 번호 49번까지 추가 합격이 이뤄진 것이다.고려대의 경우에는 상황이 더 심각해 정원 44명에 예비 합격번호 62번까지 추가 합격이 이뤄졌다. 배터리 업계도 국내 대학과 손잡고 배터리 계약 학과(주로 석·박사 과정)를 만들어 등록금과 장학금을 지원하고, 졸업 후 해당 기업에 취업하도록 유도하고 있다.
김용석 성균관대 전자전기공학부 교수(현 반도체공학회 부회장)는 “국내 반도체 기업의 주요 경쟁자인 대만 TSMC는 자국 내 인재들이 입사를 가장 선호하는 기업이고, 대만 학생들은 의대 진학보다 공학을 연구해 TSMC 입사를 원한다”며 “이런 차이가 조금씩 벌어지기 시작하면 우리 주력 산업의 글로벌 경쟁력은 점점 떨어질 수밖에 없고, 10년, 20년 뒤에는 암울한 미래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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