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칼럼] 민주주의와 시장경제, 그리고 자유담론
벌써 25년여 전으로 기억된다. 김대중 대통령의 자택 앞 당선 일성이 바로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병행 발전론이었다. 우리 정치학도들로서는 왠지 수업 시간에 다루던 이론을 현실에서 직면한 느낌이어서 감탄과 의아함이 교차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당시 외환위기를 맞이한 한국은 민주주의를 희생해서라도 경제를 회생시키는 것이 필요하다는 관성에 난감해하고 있을 때였다. 지금도 박정희 모델을 찬양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으니 당시에는 어떠했겠는지 생각해보면 그 분위기를 쉽게 짐작할 만하다. 일부 엘리트들은 잘살기 위해서는 민주주의라는 사치품쯤은 후일 찾아도 된다는 생각에 젖어 있었고, 냉전기 정치학자들이 ‘근대화론’ 즉 민주주의가 경제발전에 자동적으로 따라오는 전리품이라고 설명한 맥락도 모른 채 오로지 선경제론을 주장하는 아류 이론들도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발전국가’ 모델의 모범국 중의 하나인 대한민국호는 글로벌 충격에 대처할 준비가 충분하지 않았고, 아시아 최강의 제조업 기지를 구축해가고 있던 한국이었지만 몰려오는 외환위기 앞에 구제금융 신청이라는 굴욕적 사태에 직면했다. 외환위기의 책임을 지고 스스로 물러나도 시원찮을 집권당은 얼굴만 갈아 끼운 선거 운동으로도 재집권 운동의 기세를 올렸다. 경제 위기 극복을 위해서 민주주의는 잠깐 미뤄도 되는 것이고 노동 운동과 같은 민중 진영의 요구는 반경제적이라는 주장이 다시 세를 얻는 데는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외환위기 당시의 집권당이 외환위기 극복의 주역으로 나서겠다는 뜻이었지만 지지 세력은 급속히 재결집하였다. 결과는 김대중 후보가 보수 후보와의 연대를 통해 가까스로 당선될 지경이었다. 39만표 차이…. 그 격렬했던 선거전은 사실상 경제발전과 민주주의 실현의 우선순위를 둘러싼 전쟁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을 성싶다.
물론 분단 한국이 북한이라는 성질 사나운 라이벌을 앞에 두고 있는 한, 안보 비용 문제를 둘러싼 대안들이 후순위 어젠다가 될 수 없다. 민주주의와 경제발전 문제만을 의제화하기에는 대북 안보나 한·미 동맹에 대한 해법을 둘러싼 다양한 정책 조합에 대한 논란을 외면하기 어렵다. 이와 관련해 냉전기 한국은 미국에 대한 동맹 편승을 통해 안보 비용 문제를 해결하는 손쉬운 경로를 걸어왔고, 그 대가로 한국의 민주주의는 북한을 주적으로 하는 고색창연한 자유로 채색되어 왔다. 김대중 대통령과 같은 민주주의자가 정치 인생 내내 빨갱이라는 낙인을 벗기 위해 어렵게 투쟁해 온 것은 이런 이유에서였다. 백낙청 선생과 같은 분이 한국의 ‘발전국가’가 남북의 기득권 세력이 이해관계로 얽혀 공생·대치하고 있는 대쌍동학을 해결할 의사도 능력도 없다고 비판하는 분단체제론을 제기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읽힌다.
1998년 김대중 정부의 집권 이후 분단 안보(평화) 문제에 대한 포괄적 해결 방식이 곧 민주주의를 열어가는 대안이요, 민주주의를 지키는 가운데 경제 시스템의 왜곡과 주름을 풀어갈 때 경제개혁 또한 순조롭게 진행될 것이라는 김대중식 해법이 굳게 자리한 것은 냉전기 역사에 비추어보면 획기적인 대사변이었다. 단언컨대 그 이후 여나 야를 막론하고 포괄적 안보(평화)와 민주주의, 경제발전의 3위 1체라는 복합 해법을 부인하는 대안은 없다.
현 대통령의 자유론도 그 점에서 큰 차이는 없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왠지 대통령께서 자유를 강조할 때마다 1980년대 헌법 해설서를 읽는 느낌이 되살아나는 건 왜일까? 지난 40년 사이 자유의 의미는 진화해 ‘국가로부터의 자유’인 해방의 제례로 받아들여지고 있지만, 대통령께서 예의 그 강렬한 눈빛으로 자유를 설파할 때 알 수 없는 공포와 불안을 느끼게 되는 건 왜일까? 대통령께서 남북관계를 언급할 때, 당신의 언론관을 드러낼 때, 그리고 경기 침체를 논할 때, 한결같이 애국주의 국가관과 위기론이 떠오르며, 그 위기 극복과정이 ‘국가의 자유’와 소외 계층의 아우성으로 점철될 것 같은 느낌은 기우이길 바란다.
자유가 대통령 스스로 내건 모토라면 공정은 유권자가 대통령 후보자에게 붙인 구호이다. 자유가 땅에서 발을 떼고도 유효할 수 있는 구호라면 공정은 흙수저 민생을 동전의 양면으로 하는 분배의 철학이다. 자유의 주창자이신 대통령이지만 민생이 무엇을 원하는지 잊지 말아야 하는 이유이다. 끝으로 ‘복권 없는 사면’이라는 이상한 카드로 한 정치인의 자유를 흠집 내지 말았으면 좋겠다는 소망도 덧붙인다.
이정철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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