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규홍의 큰 나무 이야기] 폐허가 된 절터를 지키는 나무
사람이 떠나도 나무는 남는다. 처음 뿌리내린 곳에서 사람보다 오래 살아야 하는 것이 나무의 운명이다. 가뭇없이 사라진 사람살이의 터전에서 옛사람의 자취를 찾는 데에 나무를 기준점으로 삼는 건 그래서다.
원주 부론면에는 오래전에 마을 살림살이의 중심이었던 큰 절집 법천사(法泉寺)의 이름을 따 ‘법천리’라 부르는 마을이 있다. 마을의 중심은 휑뎅그렁하게 남은 폐허의 절터다. 절터 한편에 옛 스님의 탑비가 남아 있긴 하지만, 사람살이의 다른 흔적은 조금도 남아 있지 않다. 거짓말처럼 사라진 절집의 내력을 알고 있는 건 오로지 한 그루의 늙은 느티나무뿐이다.
폐사지 한복판에 우뚝 서 있는 느티나무의 몸통에는 그가 살아온 긴 세월의 자취가 그대로 남아 있다. 줄기 안쪽은 썩어 문드러졌다. 세월의 풍진을 켜켜이 쌓은 나이테도 따라서 사라지고 겨우 껍질만으로 살아남았다. 버티고 서 있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다. 자신의 안쪽을 텅 비워낸 채 살아야 했던 나무의 질긴 생명력이 안쓰럽다.
늙은 느티나무가 서 있는 자리는 한창 융성하던 시절에 절집의 중심이었으리라. 현재까지 발굴된 절터를 바탕으로 보든, 지광 스님의 현묘탑비가 세워진 위치를 기준으로 헤아리든 필경 나무 부근에는 법당이 있었을 게다. 느티나무는 법당 앞의 너른 마당에 서서 절집을 들고나는 사람들의 그늘이 되어, 사람살이를 품어 안고 살아온 나무였던 게 틀림없다.
이제 나무는 돌아보는 사람이 없다. 껍데기만 남은 나무가 얼마나 더 이 자리에 서 있을지는 알 수 없다. 사람들이 돌아보지 않는 동안 수명을 마치고 창졸간에 쓰러질 수도 있다. 나무마저 이 절터에서 사라진다면, 그때 사람들은 이곳에서 무엇으로 사람살이의 향기를 탐색할 수 있을까 아득해진다.
아무것도 없는, 아니 사람의 눈으로는 지금 옛 사람살이의 흔적을 아무것도 찾을 수 없는 너른 절터에서 홀로 서서히 죽어가는 느티나무 앞에서 ‘죽어가는 모든 것을 사랑해야겠다’던 옛 시인의 심사를 짚어보는 세밑이다.
고규홍 나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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