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인의 크리스마스’ 하누카, 백악관서도 매년 기념행사

홍익희 전 세종대 교수 2022. 12. 27. 0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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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익희의 新유대인 이야기] [51] 12월 하순 유대인 축제 하누카의 유래와 의미
백악관, 하누카 상징 촛대에 불붙이며 유대인 명절 축하 - 지난 2010년 12월 미국 워싱턴DC 백악관에서 열린 연례 하누카 축하 행사에서 유대인 소년 벤 레티크가 촛대에 불을 붙이는 모습을 버락 오바마(오른쪽에서 둘째) 당시 대통령과 부인 미셸 오바마(오른쪽에서 셋째) 여사, 조 바이든(현 대통령·맨 오른쪽) 당시 부통령이 나란히 서서 지켜보고 있다. 촛대에 불을 붙이는 의식은 하누카 풍습에서 가장 중요한 절차로 꼽힌다. 백악관은 해마다 대통령이 직접 참석하는 하누카 축하 행사를 개최해왔다. /백악관

한국계 랍비 앤절라 북덜(Angela Buchdahl)은 2014년 12월 백악관에서 열린 하누카 행사에서 “우리 건국의 아버지들은 진정으로 종교의 자유와 모든 사람을 위한 평등한 기회의 나라를 건설하도록 영감을 주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2014년에 ‘아시아계 미국인 여성 랍비’가 ‘아프리카계 미국인 대통령’을 위해 백악관에서 메노라(촛대)에 불을 붙일 것이라고는 그들이 상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라는 말로 하누카 행사를 시작했다.

헬레니즘에 맞서 히브리즘 지키다

하누카의 유래를 살펴보자. 유대 민족이 역사의 굽이 굽이에서 마주쳤던 역경이 많았지만 그 가운데서도 모든 것을 마술처럼 그리스 문화에 동화시켰던 헬레니즘의 거센 바람 앞에 히브리즘을 지켜내는 일은 정말 힘들었다.

기원전 333년 알렉산더 대왕이 페르시아의 속국인 유다를 정복했다. 그 10년 뒤 알렉산더 대왕이 열병에 걸려 33세의 젊은 나이로 죽자 그의 지휘관들은 제국을 셋으로 분할해 통치했다. 그리스 본토 마케도니아를 차지한 안티고노스 왕국, 이집트 방면에 프톨레마이오스 왕국, 페르시아 중심지에 들어선 셀레우코스 왕국이 그것이다. 그 뒤 더 분열되기도 했지만 크게 프톨레마이오스와 셀레우코스의 양강 구도가 정착되었다. 프톨레마이오스는 이집트 알렉산드리아를 수도로 삼은 후 유다를 점령해 자치령으로 삼았다.

유대인 명절 하누키를 상징하는 촛대 ‘메노라’. 가운데 기다란 촛불 양옆으로 여덟 개의 촛대가 있는 것은 예루살렘 탈환을 기념해 신전에 밝힌 등불이 8일간 타올랐다는 데서 유래한 것이다.

알렉산더 대왕의 유다 점령은 짧은 기간이었지만 유대인들에게 헬레니즘 문화 충격을 주었다. 기원전 300년에 이르러서는 헬레니즘 제국 내 유대인들은 우수한 헬레니즘 문화에 푹 빠져 벌써 헬라(그리스) 사람이 다 되어 있었다. 그들에게 히브리어는 이미 외국어나 다름없었다. 성경을 못 읽는 유대 젊은인이 많아 민족의 정체성을 유지하기 힘들었다. 이때는 유다 왕국이 멸망한 지 이미 300년이 훨씬 지난 때로 유대인들은 나라 없는 백성들로 여러 나라에 흩어져 살고 있던 시기였다. 이산 유대인들은 생업 때문에 그리스어를 아주 자연스럽게 쓰고 있었다. 특히 젊은이들은 히브리어를 거의 잊어버리고 그리스어를 사용해, 히브리어 성경을 읽을 수 없어 그리스어로 번역해야 할 필요가 생겼다.

이러한 위기를 맞아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의 유대 원로들은 ‘토라’를 그리스어로 번역하기로 했다. 당시 상업과 무역 중심지인 알렉산드리아에 거주하는 유대인 수가 예루살렘보다 많았다. 지금의 뉴욕 격이었다. 이로써 성경의 그리스어 번역 작업이 이루어졌다. 기원전 300년경에 만들어진 그리스어로 번역된 구약성경을 ‘70인역(Septuagint)’이라고 부른다. 최초의 번역 성경으로서 역사적 의의가 크다. 구약성경의 순서도 재배치했다. 오늘날 우리가 읽고 있는 구약성경의 순서도 ‘70인역’의 순서를 따르고 있다.

그 뒤 기원전 200년에는 셀레우코스가 창건한 시리아 왕국의 안티오쿠스 3세가 유다를 정복했다. 오랜 기간 지배한 두 왕조의 영향으로 헬레니즘 문화가 유대인들 사이에 널리 퍼졌다. 유대 지배층들은 헬라어를 자유롭게 사용했고, 부유층과 지식층 특히 사제 계급이 헬레니즘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이에 대해 히브리즘을 지키고자 하는 율법학자들은 크게 반발했다. 그들은 토라와 유대교 생활 방식을 고수하며 헬레니즘에 맞서 하시딤이라는 보수적 유대교 경건주의자들과 함께 활약했다. 훗날 이들이 바리새파가 된다.

이후 헬라파에 반대하는 유대인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안티오쿠스 3세는 예루살렘으로 진격해 1만여 주민을 학살하고 반란을 진압했다. 그리고 예루살렘 근처에 시리아 병사들을 주둔시켜, 자치권을 박탈하고 탄압 정책으로 돌아섰다. 왕은 차제에 여러 민족을 통합한 광대한 제국을 만들기 위해 종교를 통일하기로 했다. 그는 스스로 자신이 제우스의 현신이라고 주장하며 제우스 숭배를 강요했다.

먼저 유대교의 종교의식을 금지시켰다. 그 뒤 이교도를 예루살렘에 이주시켜 유대인과 피를 섞게 하는 혼혈 정책을 폈다. 그는 유대교 말살을 위한 칙령을 선포했다. 내용은 유대인의 안식일과 할례를 지키는 자는 사형에 처한다는 것이었다. 예루살렘 성전에 제우스 신상이 세워지고 율법이 금하는 돼지가 제물로 바쳐졌다. 이에 유대인의 거센 저항이 시작되었다.

기원전 166년 안티오쿠스 4세는 장대한 열병식을 벌여 그의 힘을 과시했다. 열병식에는 2만명의 마케도니아군과 4만6000명의 보병이 참가했고, 그 뒤를 기병 8500명과 306기 장갑 코끼리 부대가 뒤따랐다. 장관이었다. 그런데 이때 유대인의 반란이 시작된 것을 보면, 유대인의 투쟁 정신 또한 놀라웠다. 유대인들은 마카베오 가문의 지도로 곳곳에서 승리를 거두고 마침내 예루살렘에서 제우스 신상을 파괴했다. 이것이 역사상 첫 종교전쟁이다.

왕의 토벌군 물리친 마카베오 5형제

마카베오 5형제는 몇 번의 소규모 전투에서 왕의 토벌군을 물리쳤다. 그러자 왕은 군사령관 세론을 직접 보냈지만 이번에도 마카베오 형제들이 물리쳤다. 당시 왕은 페르시아와의 전쟁에 신경을 써야 할 형편이었지만 5형제 군대를 진압하기 위해 대규모 군대를 파견했다. 진압군은 보병 5000명과 정예 기병 1000명이었다. 이에 대항하는 마카베오 5형제의 병력은 3000명에 불과했다. 그러나 이 전쟁에서도 예상을 깨고 마카베오 군대가 이겼다.

왕은 이듬해 다시 섬멸 작전에 나섰다. 이번에는 정예 보병 6만명, 기병 5000명을 동원했다. 1년 전보다 10배가 넘는 병력이었다. 이에 마카베오는 보병 1만명으로 맞섰다. 하지만 용병 중심으로 편성된 진압군은 목숨 바쳐 싸우는 유대인들을 당해내지 못했다. 2년간의 끈질긴 싸움 끝에 기원전 164년에 결국 예루살렘을 함락시켜 유다는 독립을 쟁취했다.

이렇게 탄생된 것이 하스모니안 왕조다. 예루살렘은 이후 100년간 하스모니안 왕조에 의해 다스려졌다. 당시 반유대주의와 마카베오 가문의 반란은 구약 외경 ‘마카베오 상·하’에 나와 있다. 이들은 제우스 신상이 들어선 지 3년 반 만인 기원전 164년 12월에 성전을 정화하고 희생 제사를 부활시켰다. 이때 성전 반환을 기념하여 하루 분량의 올리브 기름으로 예루살렘 신전에 등불을 켰는데 그 불이 8일 동안 계속되는 기적이 일어났다. 유대인들은 이를 하느님의 응답으로 여기고 ‘성전 봉헌일’이라는 명절을 만들어 매년 이 기간에 가정에서 8일 밤 동안 촛대의 촛불을 하루 하나씩 늘려가며 밤을 밝힌다. 그래서 이 축제를 ‘봉헌절’ 또는 성전을 수리했다 하여 ‘수전절’이라 부른다. 유대인들은 이를 ‘하누카(Hanukkah)’라 부른다. 백악관은 매년 유대인들을 불러 함께 하누카 행사를 하고 있다.

유대인들의 성전 반환 전쟁 승리를 기념하는 하누카는 12월 하순이어서 기독교인들은 하누카를 유대인들의 크리스마스라고 부른다. 크리스마스 시즌에 ‘메리 크리스마스!’ 인사 대신 ‘해피 홀리데이!’라고 인사말이 바뀐 것도 유대인들을 의식한 배려이다. 하누카 명절은 특히 유대인 아이들이 좋아한다. 부모와 조부모로부터 하누카 기간 8일 동안 매일 선물을 하나씩 받기 때문이다.

뉴욕의 수석 랍비가 된 한국계 북덜

한국계 랍비 앤절라 북덜은 1972년 서울에서 이대 영문과 출신인 불교도 어머니와 미군 장교 출신 엔지니어 유대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났다. 다섯 살 때 워싱턴주 타코마로 이주했다. 북덜은 예일대 종교학과를 나와 뉴욕 헤브루 유니언 칼리지에서 히브리 음악과 랍비 공부를 7년간 했다. 1999년 유대교 예배에서 찬양을 이끄는 ‘캔토어’가 됐고, 2년 뒤 랍비가 됐다. 그녀의 찬양 인도는 흥겨웠고, 여러 파격을 시도했다. 영국 가수 스티브 윈우드의 히트곡 ‘더 높은 사랑’을 유대 찬송가와 혼합하는 등 전통적 찬양에 흥을 더했다. 그러면서도 예배의 엄숙함을 손상치 않았다. 무엇보다 신자들이 좋아했다.

그녀가 뉴욕 ‘중앙 유대교 회당’에 부임한 이후, 예배 참석자는 세 배로 늘었다. ‘중앙 유대교 회당’의 신자가 되려는 대기 신자 수도 3000명을 넘었다. 그녀는 2013년에 신자들의 투표를 통해 뉴욕 중앙 유대교 회당의 수석 랍비가 되었다. 최초의 여성 수석 랍비이자 최초의 아시아계 수석 랍비가 된 것이다. 뉴욕 중앙 유대교 회당의 신자는 7500명인데 북덜이 인도하는 찬양 예배는 온라인으로 더 인기가 있다. 2013년 속죄일의 경우, 20여 개에서 20만명이 뉴욕 중앙 유대교 회당 화상 예배에 함께했다. 이젠 유대인들도 특정 회당의 정식 교인이 되기보다는 자신의 취향에 맞는 예배를 보는 회당을 고르는 ‘부티크 유대교’ 시대가 되었다. 그녀는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랍비 5인에 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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