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반세기 광주 지역 민주화운동의 든든한 대들보였죠”

한겨레 2022. 12. 26. 2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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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신이의 발자취][가신이의 발자취] 고 박형선 해동건설 회장을 추모하며

고 박형선 회장은 말년들어 유홍준 석좌교수와 함께 답사여행을 즐겨했다. 사진은 2018년 여름 중앙아시아 파미르고원 답사 때로, 왼쪽부터 고 박 회장, 필자 유 교수, 안병욱 가톨릭대 명예교수. 유홍준 교수 제공
2018년 여름 실크로드 천산남로 답사 때 기념사진. 왼쪽부터 안병욱 명예교수, 유홍준 석좌교수, 임진택 명창, 고 박형선 회장. 유홍준 교수 제공

19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투옥 고초
출소 뒤엔 고향에서 농민운동 투신
1993년 귀국한 윤한봉과 민중운동

광주 민주화운동의 대들보 박형선(해동건설 회장)이 지난 12월24일 급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향년 71. 부음을 전해들은 친지들은 한결같이 믿기지 않는 죽음에 넋을 놓았다. 다른 동네 사람들에겐 박형선이라는 이름이 낯설 것이지만 지난 반세기 민주화운동에서 박형선은 대체 불가능한 넉넉한 품으로 <수호지>의 시진같은 분이었다.

박형선에게는 남주형, 한봉이형, 인태형, 강철이형, 병욱이형 등 ‘성님’이 1천명, 권행이, 광우 등 아우가 1천명은 된다. 게다가 우리가 부르는 ‘임을 위한 행진곡'은 5·18민주화운동 때 시민군 대변인으로 최후를 맞은 윤상원과 불의의 사고로 숨진 ‘들불야학’ 선생 박기순의 영혼결혼식을 위해서 김종률이 작곡하고 황석영이 백기완의 ‘묏비나리’를 가사로 만든 민중가요인데 그 박기순이 바로 박형선의 여동생이다. 그리고 광주 민주화운동의 대부이자 상징인 합수 윤한봉의 매부이기도 하다.

박형선은 1951년 전남 보성에서 농사꾼의 아들로 태어나 광주일고와 전남대를 나온 호남의 토박이이다. 1974년 민청학련의 유신철폐 운동 때 긴급조치 4호 위반으로 징역 10년을 선고받았다. 그때 비상고등군법회의에서 그는 “군인들이 나라는 안 지키고 지금 여기서 뭣하고 있는 거냐”고 호통치었다.

출소 후 1976년, 박형선은 고향으로 내려가 가톨릭농민회 회원으로 농민운동에 투신하였다. 그러나 고문 후유증으로 생긴 허리통증으로 앉아 있기도 힘들어 양의, 한의 명의를 찾아가고 요가도 해보았지만 낫지 않자 민간요법으로 뱀탕이 좋다하여 이를 있는 대로 끓여 먹고 움직일 만하게 되었다.

1980년, 비상사태가 선포되자 그는 광주로 올라와 윤한봉과 합류하였는데 5·18 예비검속에 걸려 상무대 영창으로 끌려가 갖은 고문을 당했다. 그때 제발 허리는 때리지 말아 달라고 했는데 오히려 허리에 더 매질을 가했다고 한다.

구속에서 풀려난 뒤 박형선은 보성건설을 창업하고 한편으로 민주화운동에 헌신하였다. 유월항쟁 직후 김대중은 그에게 광주 서구에 출마하라고 권했다. 그러나 그는 정치는 안 한다고 거절했다. 그리고 1993년 미국으로 망명했던 윤한봉이 귀국하면서 함께 들불열사기념사업회, 민족미래연구소를 설립하고 민중운동을 열성적으로 전개하였다.

그리고 2002년 봄, 노무현이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나섰을 때 이른바 ‘광주의 선택’을 주도하였다. 노무현 대통령은 이를 죽을 때까지 고마워하였다. 하지만 그는 노 대통령 재임 시절 거리를 두고자 했고 여럿이 식사 초대를 받아 청와대에 한 번 가봤을 뿐이었다.

‘민주화운동 물적 토대’ 꿈꾸며
건설사 세워 중견기업으로 키워
‘민주화 운동 재단’ 미완의 꿈으로

2002년, 박형선은 민주화운동의 물적 토대를 마련하겠다고 해동건설을 설립하여 중견기업으로 성장시켰다. 그리고 2007년 윤한봉이 유언으로 남긴 민주화운동을 위한 재단을 만들기 위해 사업에 열중하였다. 그러면서 부산저축은행에 투자한 것이 뜻하지 않은 재앙으로 돌아왔다.

2012년 부산저축은행이 파산되면서 수사기관은 이 은행이 광주일고 출신들의 회사이고 박형선이 대주주로 들어온 것과 해동건설이 급성장한 배경에 노무현 정부의 개입이 있었다고 의심하였다. 그러나 박형선의 해동건설은 회계가 투명하였고, 탈세도 없었고, 비정규직이 한 명도 없었다. 권력을 낀 특혜나 비리란 애시당초 없었다. 해동건설은 오히려 이명박 정부 때 급신장했다. 하지만 끝내 박형선은 알선수뢰라는 죄목으로 1년 6개월간 감옥을 살았다.

지난 2019년 5월 임진택 창작판소리 ‘오월광주 윤상원가’ 첫 서울 공연이 열린 서울시청에서 함께한 모습이다. 왼쪽부터 안병욱 명예교수, 고 박형선 회장, 유홍준 석좌교수, 화가 김정헌 416재단 이사장, 화가 임옥상. 유홍준 교수 제공
2019년 5월 임진택 창작판소리 ‘오월광주 윤상원가’ 서울 첫 공연을 보러온 고 박형선 회장 가족과 함께한 사진이다. 오른쪽부터 이애주(2021년 작고) 명예교수, 김정헌 416재단 이사장, 박 회장, 유홍준 석좌교수, 박 회장의 부인과 아들 가족. 유홍준 교수 제공

출소 이후 박형선은 여전히 민주화운동의 성님, 아우들과 돈독한 인간관계를 맺으며 민주화운동을 위한 재단을 만드는 일에 열중하던 중 갑자기 세상을 떠난 것이다. 그의 성님과 아우들은 박형선이 강철같이 튼튼한 줄 알고 있었지만 내장 수술을 두 번이나 받은 병력이 있었다. 그 모두가 고문으로 얻은 병이었다.

그가 세상일을 잊고 즐겁게 노닐던 것은 나와 답사여행을 다닐 때였다. 그는 2018년과 2019년 나와 함께 파미르고원과 실크로드에 다녀온 것을 평생의 추억이었다고 했다. 지난 여름엔 합수 윤한봉 기념사업회 회원들과 부여로 나를 찾아와 ‘백마강 달밤’을 한껏 즐기고 ‘성님, 내년엔 경주로 갑시다이’ 하더니 홀연히 혼자 떠났다.

박형선은 억울한 옥살이를 하면서 마음을 달래기 위해 장편 <자서전>을 집필하였다. 윤경자 제수씨! 읽어보았나 모르지만 형선이가 당신을 얼마나 사랑하고 존경했는지 아오. 그리고 아들 찬아! 지웅아! 너의 아버지가 얼마나 존경스러운 우리 시대 위인인지 알았으면 쓰겄다.

형선이! 몹시도 서운하네만 편히 잘 가게나. 가서 자네 성님 아우 맞이할 터를 좋게 닦아놓고 있게나.

유홍준/명지대 석좌교수·한국학중앙연구원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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