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귀은의멜랑콜리아] 재난 ‘이후’가 트라우마를 만든다

2022. 12. 26. 2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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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난 발생한 곳에 혐오도 기생
2차 가해, 트라우마 본질적 요인
담론 갈등에 희생자 가족 소외
‘생존자’라는 말도 적절치 않아

연말이다. 우리는 이 연말 분위기를 즐긴다. 이미 월드컵도 즐겼고, 크리스마스 분위기도 즐겼다. 서울 한복판에서는 빛축제가 열렸다. 이런 향유가 집단무의식이 된다. 이태원 참사에 대한 정치인의 비윤리적 발언이 아니어도 우리는 이미 이 향유의 분위기 속에서 참사를 잊는다. 권력자는 정치가 아니라 축제로 국민의 무의식 속으로 들어간다. 권력자는 아무 제스처도 취할 필요가 없다. 국민이 축제를 원할 때 그것을 막지만 않으면 된다. 축제 속에서 참사의 흔적은 저절로 묻힌다.

집단 트라우마에 대한 인류학적 처방은 희생양 세우기다. 이는 단순히 희생당하는 존재라는 뜻이 아니다. 집단의 분노와 불안을 빨아들이는 블랙홀을 뜻한다. 희생양은 상징적 과녁 같은 것이다. 과녁은 순식간에 정해진다. 집단무의식은 트라우마 상황에 즉각적으로 반응하기 때문이다. 국민 시선은 국민 안전의 수장에게로 향했지만, 그는 그 자리에 서지 않았다. 대통령은 “책임은 있는 사람한테 물어야지, 그냥 막연하게 다 책임지라는 것은 현대사회에서 있을 수 없는 이야기”라 했다. 맞는 말이다. 책임지라는 것이 아니다. 슬픔과 분노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채널을 만들어야 한다는 의미다. 이 채널이 현대사회의 희생제의를 대신한다.
한귀은 경상국립대 교수 작가
채널이 없으니 고통을 호소하는 자에게 혐오가 쏟아진다. 2차 가해는 트라우마를 악화시키는 원인이 아니다. 트라우마를 만드는 본질적 요인이다. 트라우마는 최초의 자극 상황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그 이후 발생한 또 다른 자극과 연결될 때 비로소 트라우마가 된다.

과거엔 재난이 일어나면 연대가 만들어졌다. 반공 이데올로기가 그래서 살아남았다. 언제든 재난의 위험이 있으므로 대한민국 국민은 연대해야 했다. 역설적으로, 연대를 부활시키기 위해 재난이 필요했다.

지금은 다르다. 재난이 발생한 곳에 혐오도 기생한다. 피해자의식 때문이다. 초양극화 사회는 자신을 박탈된 존재로 인식하게 만든다. 누군가 내 것을 빼앗아 축재한 것같이 느낀다. ‘나는 고통받는다, 고로 보상받아야 한다’는 정체감이 생긴다. 이들은 더 고통받는 사람을 끌어내리려 한다. 고통에도 우선순위가 있는 듯, 다른 이의 보상 가능성을 미리 박탈하려 든다. 그 보상마저 자기 권리를 착취한 것처럼 여기기 때문이다.

매체 과잉도 문제다. 세계 전체가 실시간으로 중계된다. 개인의 삶도 전시되고 전파를 탄다. 타인의 삶을 모를 수 없는 세상이다. 한 개인은 전 세계인과 비교되고 경쟁한다. 피해자의식, 박탈감이 더 깊어진다. 여기에, 이를 이용하는 정치인이 있다. 무능한 정치인은 가장 직접적인 감정을 이용하여 권력의 기반으로 삼는다. 포스트민주주의, 포퓰리즘, 팬덤 현상으로 이어진다. 피해자의식은 포퓰리즘·팬덤정치와 상생한다.

온갖 리서치 업체에서 정량화된 통계를 쏟아낸다. 데이터는 돈이다. 돈을 매개로 판매된 데이터는 진실인 양 유포된다. 수치화된 통계는 진실의 착시를 만들고 이것은 탈진실의 원료가 된다. 여기저기서 진실의 형식을 띤 탈진실이 쏟아져 나온다. 탈진실은 혐오와 비난의 산지가 된다. 탈진실끼리의 담론 갈등이 벌어진다. 이 갈등은 희생자 가족을 소외시킨다. 그 담론 때문에 참사 가족의 목소리는 더 들리지 않게 된다. 혐오의 담론도, 그들을 도와야 한다는 담론도 모두 당사자의 목소리를 짓누른다.

증거를 인멸하고 조작한 사람이 구속된 것도 징후적 탈진실이다. 10·29 참사가 조작사건으로 프레임이 바뀐다. 그들이 구속될 때 집단의 뇌리에 박히는 것은 거짓말을 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증거 조작에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될 때, 사건 자체는 잊힌다.

재난에서 살아남은 자에게 ‘생존자’라는 용어를 쓴다. 10·29 참사에서 ‘생존자’라는 말은 적절치 않다. 이들은 살아남은 생존자가 아니라 가족과 연인, 친구를 잃은 사람이다. 생존자라는 용어는 희생자와 이원대립이 되고, 이들을 희생자의 그림자로 만들어 버린다. 이들에게 불안, 충동, 우울 장애 등이 있을 수 있다는 맹목적 진단 또한 이들의 개별성을 지우고 환자 프레임을 씌우는 일이다.

“본인 생각이 좀 더 굳건하고 치료 생각이 강했으면.” 국무총리의 이 말은 그의 공감력 부족을 뜻하지 않는다. 트라우마에 대한 무지를 뜻한다. 트라우마 치료 의지가 있어야 한다는 말은 그 자체로 모순이다. 어떤 의지가 있다면 그건 이미 트라우마가 아니다. 극도의 무기력이 트라우마의 증거이기 때문이다. 증상은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보살펴져야 할 뿐이다. 트라우마는 공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공감할 수 없기에 배워야 하는 것이다.

이태원에 함께 갔던 친구를 잃은 고등학생이 자살했다. 숙박업소에서 자살했다는 것은 극한의 고립감과 단절감을 의미한다. 그는 아무도 없는 곳에서,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자신도 그곳이 어딘지 알려 하지 않은 채 사라지려 했던 것이다. ‘없음’으로 돌아가려 했던 것이다.

참사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지금, 트라우마를 일으키는 수많은 사건이 일어나고 있다. 그들이 우연히 죽었다면 우리도 우연히 살아남았다. 두 위치는 얼마든 바뀔 수 있다. 그래서 살아남은 자에게 죄의식이 발생한다. 죄의식은 갖지 말아야 하는 것이 아니다. 그 죄의식을 안고 살아야 한다. 고통을 잊는 것이 아니라 고통과 함께 살면서 그것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의 치유는 회피가 아니라 그 회피에 대한 저항에 있다.

한귀은 경상국립대 교수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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