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쏘공’ 조세희 작가 별세, 그는 떠났지만 그의 질문은 그대로 남았다

김송이·전지현 기자 2022. 12. 26. 21:50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저마다의 ‘대답과 추모’
2011년 7월 1일 조세희 작가가 서울 마포아트센터에서 열린 인권센터 창립 기념식에서 강연하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소외된 시민들 구석진 곳에서
깃발 들고 서 있을 것 같은 분
약자 위해 살아야겠다는 결심
난쏘공은 내 인생의 전환점
이 책이 읽히지 않아야 하는데
잊힐 수 없는 시대 오지 않아”
문인·시민 추모 발길 이어져

첫 시작, 시대적 아픔의 상징, 꺾이지 않는 고전, 인생의 전환점, 현재진행형….

‘나에게 <난쏘공>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시민들은 저마다의 대답을 내놓았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난쏘공)을 쓴 조세희 작가가 향년 80세로 눈을 감았다. 산업화 시대 도시의 그늘을 비추며 빈민과 노동, 인간됨과 사랑, 계급과 소외의 문제를 여백 많고 따듯한, 그러면서도 서늘한 시적인 문체로 형상화해 한국문학사에 한 획을 그은 고인의 빈소가 26일 서울 강동구 강동경희대병원 장례식장에 차려졌다. 조용히 빈소를 찾은 시민들은 그의 삶과 작품세계에 존경을 표했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는 ‘나에게 난쏘공이 어떤 의미였는지’를 되새기며 고인을 추모하는 글이 이어졌다.

이날 오전 10시40분쯤 가장 먼저 빈소를 찾은 시민 이준희씨(32)는 “나에게 <난쏘공>은 ‘첫 시작’ ”이라고 했다. 이씨는 “스무 살에 <난쏘공>을 읽고 소설을 쓰기로 했다. 소설을 쓸지 말지 고민했는데 (그 고민의) 시작이 조세희 작가님이었다”며 “부고 기사를 보고 (고인을) 잘 보내드려야겠구나 생각했다”고 말했다. 이날 오전 4시쯤 부고 소식을 접한 그는 8시부터 빈소가 차려지기를 기다렸다고 했다.

지난 25일 향년 80세에 지병으로 별세한 조세희 작가의 빈소가 서울 강동경희대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26일 한 지인이 조문하고 있다. 강윤중 기자

30여년 전 한국민족예술단체총연합에서 글공부를 하며 고인과 연이 닿았다는 김한종(57)·박명기(57)·박상혁씨(51)도 빈소를 찾았다. 이들은 “문하생이란 표현은 과하고, 선생님의 뜻을 개인적으로 존경해온 사람들”이라며 “8년 전 뵙고 또 찾아봬야지 했는데 이런 자리에서 뵙는다”고 했다.

박명기씨는 “어떤 집회나 현장에 조그만 카메라를 들고 나타나는 모습이 그려진다. 멀리 떨어져 보는 게 아니라 늘 현장에 있던 사람”이라고 고인을 떠올렸다. 고인은 1985년 카메라를 들고 탄광이 있는 강원도 사북 지역을 찾았다. 그 결과물이 산문집 <침묵의 뿌리>이다. 이후에도 소외된 이들이 힘겹게 싸우는 현장에서 허옇게 머리가 센 고인이 카메라를 든 모습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다. 박상혁씨는 고인이 ‘깃발 같은 분’이라고 했다. 그는 “아름다운 이상향을 꿈꾸며 세상이 바뀌어도 한 구석에서 늘 인간을 향한 깃발을 들고 서 있을 것만 같은 사람”이라고 했다.

1990년대 말 경희대 국문과에서 고인의 강의를 들었다는 정재혁씨(48)는 “항상 (우리 사회) 현실의 어려움을 알아야 한다” “<난쏘공>이 의미 없는 사회가 돼야 한다”고 했던 고인의 말을 회상했다. 그는 “섣불리 선생님을 표현해 누를 끼치고 싶지 않고, 첨언이 없어도 충분히 훌륭하신 분”이라고 조심스러운 존경을 표했다.

용인시 기흥구에서 빈소를 찾은 강태우 목사(51)는 “대학생 때 읽은 <난쏘공>은 이런 사회에 필요한 존재가 되어야겠다, 사회적 약자를 위해 살아야겠다고 생각한 계기였다”면서 “<난쏘공>은 인생의 전환점”이라고 했다.

고인은 숙환을 앓다 지난 3월 말 코로나19에 확진된 이후 투병 생활에 집중해온 것으로 전해졌다. 고인의 차남인 조중헌씨는 “저희 아버지가 다른 분들에게 가슴에 남는 작가로 감사하게도 많은 분들이 추억해주시더라”며 “아버지와 아버지가 남기신 메시지를 (독자들이) 좋게 품어주셨으면 한다”고 말했다.

SNS에도 전날 밤부터 애도의 물결이 이어졌다. 충남 당진에서 농원을 운영하는 국소정씨(44)는 빈소를 찾는 대신 인스타그램에 <난쏘공> 표지와 함께 “이분의 소설을 연습장에 손으로 꾹꾹 눌러쓰며 읽었던 기억이 있다”는 추모글을 올렸다. 국씨는 통화에서 “고인이 많이 사랑받고 회자되는 이유는 소시민으로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감수성과 맞닿아있기 때문일 것”이라며 “<난쏘공>은 현재진행형”이라고 했다. 그는 “나도 공을 쏘아올렸던 난장이고, 그 공은 지금 어디에 있을지…현실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고 했다.

온라인상에는 <난쏘공>과 산문집 <침묵의 뿌리> 표지와 글귀 등을 공유하며 각각의 책들이 어떤 의미였는지 추억하는 게시글도 보였다. “<난쏘공>이 읽히지 않는 시대가 와야 하는데 아직도 사람들이 뼈아프게 공감한다는 것이 아쉽다” “조세희 선생님이 꿈꾼 세상은 여전히 우리 모두의 숙제로 남아있다” “여전히 잊힐 수 없는 시대는 오지 않았다” “냉소주의에 빠지지 말라는 말씀 기억하겠습니다” 등의 추모글이 이어졌다.

이날 장례식장에는 출판업계와 문재인 전 대통령,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등이 보낸 조화가 놓였다.

김송이·전지현 기자 songyi@kyunghyang.com

Copyright © 경향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