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의존 줄여 인도·베트남을 K반도체 생태계로 끌어들여야”[아듀 2022 송년기획 - 기로에 선 K반도체]

이재덕 기자 2022. 12. 26. 2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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③ 미·중 패권경쟁 사이
미국 중심 공급망 재편으로
한국, 중국 시장을 잃겠지만
차세대 반도체 새판 짜기 기회

“미국의 반도체 공급망 재편은 한국엔 가장 큰 시장인 중국 시장의 상실을 의미하지만 어차피 그건 ‘상수’였습니다. 미·중 갈등이 아니더라도 중국은 이미 반도체 자급을 추진하고 해외 업체 의존을 줄이고 있었기 때문이죠. 오히려 중국에서 빠져나와 디커플링(탈동조화)하며 반도체 전략을 짜기에 좋은 기회가 된 겁니다.”

권석준 성균관대 화학공학과 교수(사진)는 지난 5일 경향신문 인터뷰에서 “중국과의 디커플링 동안 차세대 반도체 등의 분야에서 한국의 입지를 강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반도체 신소재와 차세대 반도체용 나노 소자 등의 분야를 연구한 권 교수는 올 9월 <반도체 삼국지>라는 책을 냈다. 이 책에는 ‘글로벌 반도체 산업 재편과 한국의 활로’라는 부제가 붙었다. ‘21세기의 페르시아만’이라고 할 만한 한·중·일 동아시아 반도체 산업 지형을 분석하고, 한국의 전략을 제시한 책이다.

현재 미국의 대중국 반도체 제재는 전방위적이다. 미 상무부는 2018년 중국의 D램 기업인 ‘푸젠진화’ 제재에 이어, 2019~2020년에는 화웨이(하이실리콘 포함)를 제재 대상에 포함했다.

권 교수는 미국의 ‘화웨이 때리기’가 한창이었던 이때가 “중국이 저부가가치 칩 제작에서 벗어나 고부가가치 칩을 만들기 시작한 변곡점”이었다고 했다. AP를 넘어 그래픽처리장치(GPU), 신경망처리장치(NPU) 등으로 이어지는 인공지능(AI) 반도체로 가는 길목에서 제재를 가하기 시작했다는 설명이다. 이 같은 AI 반도체는 ‘미사일’ ‘함정’ ‘무인기’ 등 중국의 국방 산업에 활용될 가능성이 높다.

미국은 2020~2022년 중국의 파운드리 업체인 SMIC에 첨단 장비가 들어가는 것을 막더니, 지난 8월에는 최첨단 반도체를 설계할 수 있는 설계자동화프로그램(EDA)의 중국 수출까지 금지했다. AI와 슈퍼컴퓨터용 반도체와 첨단 장비의 중국 수출도 막았다. 이 과정에서 중국에 낸드와 D램 공장이 있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1년 유예를 받았다. 중국 내 최신 생산시설을 정리하기 위한 시간이 주어진 셈이다.

권 교수는 “미국은 자신이 계획하는 큰 그림에 따라 미리 포석을 깔아두고 중국의 반응을 보고 있다”며 “중국이 여기에 대응해 나오면 바로 다음 포석으로 중국을 압박하고 있다”고 말했다. 화웨이가 AI 반도체 개발에 나설 조짐을 보이자 제재를 시작하고, SMIC와 YMTC가 각각 초미세공정과 3D 집적기술 개발에 나서자 기다렸다는 듯 SMIC와 YMTC에 대한 제재를 가했다는 설명이다.

권 교수는 “미국 정부도 반도체 규제가 미·중이 모두 손해를 보는 ‘루즈-루즈 게임’이란 것을 알고 있지만, 이 과정에서 중국이 더 많이 잃는다면 해볼 만한 게임이라고 판단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 상황에서 한국은 인도나 동남아시아 등으로 눈을 돌려야 한다는 게 권 교수 주장이다. 그는 “중국이 맡던 생산기지나 소비시장으로서의 역할은 인도나 동남아 등으로 다변화할 수 있다”고 했다. 이어 “이들 지역은 인구가 많고 경제성장률도 높다”며 “K반도체 생태계 안으로 끌어들여야 한다”고 말했다.

미국의 제재에 당장 중국이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다. 지금의 반도체 기술 대부분이 미국 기술을 이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극자외선(EUV), 심자외선(DUV) 등의 노광장비를 만드는 네덜란드와 일본에도 미국은 자국 기술이 들어간 장비의 중국 수출을 제한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그럼에도 중국은 ‘산업의 쌀’인 반도체를 포기할 수 없다. 중국은 현재 자립 기술을 확보하는 데 투자를 집중하고 있다. 예컨대 네덜란드 ASML의 EUV 노광장비를 구하는 게 어렵게 되자 ‘빛 공장’이라고 불리는 방사광가속기로 EUV를 만들어 반도체 산업에 활용하는 식이다.

다만 중국의 반도체 기술이 향후 ‘갈라파고스화’할 가능성도 있다. 자체 기술을 개발하다 보면 다른 세계의 반도체와 호환되지 않는 문제가 발생할 여지가 있다. 권 교수는 “중국이 믿고 있는 건 거대한 내수 시장 외에도, 화학·물리학·공학·재료과학 등 자국의 기초과학이 세계 최고 수준이라는 사실”이라며 “그 가운데 혁신 기술이 하나라도 나온다면 그게 차세대 반도체에서 ‘디스럽티브 기술(파괴적인 기술)’이 될 수도 있다”고 덧붙였다.

미국 주도 ‘양자’ 연구그룹에
한국 기업·정부출연기관 등
서둘러 들어가 입지 키우고
학교 등 기초연구 지원해야

당장 한국에 시급한 것은 차세대 반도체 부문에서의 영향력을 키우는 일이다. 권 교수는 “양자 정보통신기술(ICT) 등 미국이 주도하는 차세대 반도체 연구그룹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양자 ICT 부문에서 국내 기업과 정부 출연기관들이 덩치도 키우고 논문도 많이 내서 적극적으로 이런 연구그룹에 관여할 수 있어야 한다”며 “이들 연구그룹 내 중국 측 인사들이 있던 빈자리를 지금 일본이 노리고 있다”고 말했다. 미국과 동맹국들(한국·일본·대만)의 반도체 협의체인 ‘칩4’ 내부에서도 주도권 경쟁이 벌어지는 모습이다. 특히 일본은 최근 미국과 함께 2나노(㎚)급 첨단공정 개발을 위한 공동연구에 들어가기로 했다. 대만 TSMC도 미 애리조나주에 3~4나노 반도체 생산을 추진하는 등 칩4 안에서 합종연횡이 숨가쁘게 진행되고 있다.

정부는 어떤 역할을 해야 할까. 권 교수는 “과거처럼 정부가 밑그림을 다 그리려고 해서는 안 된다”며 “학계와 정부 출연 연구기관들이 기초 연구를 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 고가인 EUV 장비를 마련하지 못해 기술 개발을 못하는 중소기업들을 위해 방사광가속기 일부를 EUV용으로 배정하는 등 길을 터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했다. 풍력 등 재생에너지 기반을 확대해 반도체 기업들의 에너지 전환을 돕는 것도 정부의 일이라고 지적했다.

<시리즈 끝>

이재덕 기자 duk@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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