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적] 난쏘공이 남긴 것
2022년 12월 어느 날 경의선숲길. 고층 건물들 사이에 조성된 산책로는 도심 속 오아시스 같다. 반려견을 데리고 나온 어르신들, ‘힙하다’는 입소문이 난 맛집들을 찾은 젊은이들로 붐빈다. 1906년 서울 용산과 평북 의주를 잇는 철로가 한 세기 만에 지하화되며 보행자에게 완전 개방된 이 길은, 사실 많은 이들의 눈물로 적셔져 있다. 숲길 시작 지점인 신계동의 철거민 강정희씨부터 끝 지점인 홍대입구역 주변 칼국숫집 두리반의 안종녀씨까지. 이 모두 ‘용산 참사’가 일어난 2009년 이후 도심 경관 재정비 과정에 밀려난 철거민들이다. 이들이 떠난 자리엔 어김없이 30층 높이의 마천루가 들어섰다.
빈곤사회연대 활동가 김윤영씨는 <가난한 도시생활자의 서울 산책>이라는 책에서 “경의선숲길을 걸을 때면 주변에 아파트가 지어지며 내쫓긴 삶들을 기억해 달라”며 이 철거민들을 소개했다. 2010년 서울시 지가지수가 90.02, 마포구 89.22, 공덕역 83.01, 홍대입구역 72.69였으나 2016년 경의선숲길 개통 후 서울시 지가지수는 110.95, 마포구 114.23, 공덕역 132.05, 홍대입구역 170.37로 급등했다. 한 장소에 터 잡았던 많은 사람들이 쫓겨나지만 소수의 사람들이 개발 이익을 가져가는 구조. 이 부조리한 구조는 1978년 조세희 작가의 소설집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난쏘공)>에서 그려진 이래 한번도 바뀐 적이 없다. 달라진 게 있다면, 1970년대 ‘난장이’ 일가가 25만원에 팔아넘기고 45만원에 거래된 아파트 입주권이 지금의 ‘난장이’들은 도저히 넘볼 수 없는 고액이 되었다는 것뿐.
전직 대통령과 국무총리 등 유명 인사들뿐 아니라 다수의 평범한 시민들이 25일 작고한 조 작가를 애도하고 있다. 작가의 작품이 더 나은 세상을 꿈꿔온 사람들에게 세대를 초월해 사랑받았다는 의미일 것이다. 교과서에 실리고 입시에도 출제되면서 <난쏘공>은 2017년 문학책으로는 처음으로 300쇄를 찍었다. 이 책을 그렇게 많이 읽었는데 세상은 왜 바뀌지 않았을까.
예순 넘어서도 집회 현장에서 카메라와 수첩을 들고 취재하곤 했던 노작가는 생전 냉소주의에 빠지는 것을 경계했다고 한다. 잊지 말아야겠다. 그가 달을 향해 쏘아올린 작은 공을.
손제민 논설위원 jeje17@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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