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장이들의 고단한 삶이 계속돼, 당신과 작별하지 못합니다
휴대전화에 아드님 번호가 떴을 때 바로 받지 못했습니다.
한 번, 두 번, 세 번. 몇 차례의 신호를 흘려보낸 것은 ‘아니길 바라는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근래 선생님께 전화도 문자도 가닿지 않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아드님을 통해 소식을 듣고 있었습니다. 선생님의 병환이 깊어지고 있다는 이야기에 ‘오지 않길 바라는 날’이 오게 되면 꼭 연락 주시길 부탁드렸습니다. 성탄절 저녁 날아든 아드님의 번호를 보며 그 자체가 선생님의 부고인 것 같아 받기가 두려웠습니다. 아드님은 “조금 전 조용히 떠나셨다”며 끝내 아니길 바랐던 소식을 전했습니다. 선 채로 머리를 감싸 쥐고 울었습니다.
선생님의 병이 깊어진 건 ‘그날’ 이후였습니다.
생전 선생님은 당신의 병을 의식할 때마다 2005년 11월15일을 이야기하시곤 했습니다. 쌀개방에 반대하는 농민들의 죽음이 이어지던 시기였습니다. 한 여성 농민이 농약을 마시고 생사(11월17일 사망)를 오가던 그때 선생님은 카메라를 들고 농민집회에 참석했습니다. “경찰 물대포를 맞고 내 앞에서 농민들이 쓰러지는데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글로 묘사할 수 없는 호흡과 신음들”을 카메라로 담다가 선생님도 물대포에 맞았습니다. 그날 이후 앓는 날이 잦아졌고 선생님은 눈에 띄게 수척해졌습니다.
선생님이 찍은 그날의 사진들을 몇 년 뒤에 볼 수 있었습니다. 경찰 방패에 맞은 농민이 얼굴에 피를 쏟으며 쓰려져 있었습니다. 물을 뒤집어쓴 백발의 소설가는 추위에 떨며 깨진 카메라로 그 장면을 기록했습니다. 사진 속 상황들을 설명하며 선생님은 “영영 잊을 수 없는 날이 됐다”고 했습니다. 뇌에까지 이른 병이 그날과 닿아 있다고 선생님은 생각했습니다.
책상에 쌓인 필름들 속에서 세상에 글을 내보내지 않는 시간 동안 선생님이 어디에서 무엇을 바라보고 계셨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그 세상은 고요하지 않았고 평화롭지도 않았습니다. 선생님의 눈길이 머문 세상엔 사람들이 보고 싶어하지 않는 것들로 가득했습니다. 선생님은 글을 쓰지 않는 대신 “현장에 있지 않으면 쓸모없는 기계”인 카메라를 들고 ‘난장이들’의 곁을 지켰습니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200쇄 기자간담회(2005년 12월1일)를 마치자마자 선생님이 향한 곳도 집회 중인 농민들에게로였습니다.
‘그날’로부터 정확히 만 10년이 되던 날 선생님과 나눴던 이야기가 기억납니다. 전날(2015년 11월14일) 민중총궐기대회에 참여한 백남기 농민이 서울 종로구청 앞 사거리에서 경찰 물대포를 맞고 쓰러졌습니다. 선생님은 “숨이 막히고 내가 죽는 것 같다”고 하셨습니다. “말을 할 수 없고 글도 쓸 수 없다”고도 했습니다. 그 숨막히는 말들에 저도 숨이 막혔습니다.
‘난쏘공’이 300쇄를 찍고 100만부가 팔리는 기록을 세웠지만 선생님은 그래서 더 가슴 아파했습니다. 책이 세대를 바꿔가며 읽혀도 난장이들의 고단한 삶은 바뀌지 않았습니다. 선생님은 ‘난쏘공’이 필요 없는 시대를 기다렸으나 그 시대가 오는 것을 보지 못하고 떠나셨습니다.
언젠가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책 제목에 표준어인 ‘난쟁이’ 대신 ‘난장이’를 쓴 까닭은 걱정과 우려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아무리 문학적 은유일지라도 그 단어가 장애인들을 상처 입히길 원치 않았습니다. 자라지 못한 책임은 ‘난장이’가 아니라 그의 성장을 키 117㎝와 몸무게 32㎏에서 멈춰 세운 이 세계에 있었습니다. 마감을 앞두고 “빨리 써서 넘겨야 하는데 못 쓰고 사흘 밤을 꼬박 새워 고작 몇 줄 썼다”는 마지막 문장들에 선생님은 그 마음을 꾹꾹 눌러 새겼습니다.
“아버지를 난장이라고 부르는 악당은 죽여버려.” “그래, 죽여버릴게.” “꼭 죽여.” “그래. 꼭.” “꼭.”
선생님이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끝내 작별하지 못한 사람들은 그 ‘난장이들’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선생님을 떠나보내며 가장 슬퍼할 사람들도 그들일 것입니다.
선생님은 제게 말과 글의 준엄함을 알려주신 분이었습니다. 오래전, 작가와 그를 인터뷰하는 기자로 처음 만났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선생님은 써야 할 글을 가슴에 품은 사람이 되도록 저를 독려했습니다. 만날 때마다, 통화할 때마다 선생님은 제가 무엇을 품고 있는지, 누구를 생각하며 쓰는지 물었습니다. 글을 대단하게 여기지 말되 우습게 여기지도 말라고 했습니다. 글이 넘치는 곳으로 쏠리지 말고 글이 모자란 곳에 문장을 보태라고 했습니다. 저는 그 말들이 글을 대하는 선생님의 마음이라고 여겼습니다.
선생님은 <난쏘공>(1978), <시간여행>(1983), <침묵의 뿌리>(1985) 이후 오랫동안 쓰지 않는 작가로 살아왔습니다. ‘쓰지 못한’이 아니라 쓰지 않는.
“마음에 들지 않는 글을 마음에 드는 것처럼 써내고 싶지 않았다”는 말씀을 기억합니다. 글의 완성도에 대한 높은 기준을 의미할 수 있지만 그것만은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제일 어려운 일은 좋은 글을 쓰는 것, 두번째로 어려운 일은 안 쓰는 것, 세번째로 어려운 일은 침묵”이라던 말씀도 떠오릅니다. 선생님의 침묵은 언어를 배반한 사람들이 이끌어가는 세계에 대한 분노이기도 했습니다. 작가가 아니었다면 오히려 선생님의 말과 글은 늘어났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한 사람의 작가로서 선생님이 이룬 문학적 성취는 컸지만 제게 훨씬 컸던 것은 그 엄격함이었습니다. 세상에게 엄격했지만 그보다 자신에게 가장 엄격했던 사람.
“나는 돌이 날아다니던 시대의 슬픔도 다 쓰지 못한 사람이야. 나는 평생 져온 사람이지만 다만 한 가지는 이겼어. 안 쓰는 것. 쓰지 않는 것은 내 자신에게 건 싸움이었어.”
‘소리 없는 절규’의 의미를 저는 선생님을 보며 이해했습니다. “역사의 빛나는 순간엔 늘 절규하는 사람이 있었고, 순간의 역사가 빛나는 건 그 사람의 절규가 진실하고 아름답기 때문”이란 말을 잊지 못합니다. 선생님이 내린 ‘혁명의 정의’도 마음에 두었습니다.
“아름다운 사람이 죽으면 하늘의 별이 된다고 믿는 것, 고통으로 잠 못 이루고 우는 사람이 있는 한 그 한 사람을 위해 신화는 계속돼야 한다고 끝끝내 믿는 것.”
쓰지 않는 시간이 길었지만 선생님은 늘 쓰길 원했습니다. 이 땅에서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직감한 뒤부턴 쓰지 못한 안타까움을 전하셨습니다.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 몸 탓에 <하얀 저고리>(미완성 장편)란 ‘끝내지 못한 숙제’가 선생님을 오래 괴롭혔습니다. 그때 처음으로 선생님으로부터 “죽는 게 무섭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일이 나를 부추겨서 살아남으라고 하는데 해야 할 이야기를 두고 갈까봐, ‘아침이’(주인공)의 말들을 다 풀어주지 못하고 갈까 봐 겁이 난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물으셨습니다.
“어떨 것 같아. 내가 다시 일을 할 수 있을까?” 그리곤 “말 선물이나 하나 하라”고 하셨습니다. “내가 결국 쓰지 못하더라도 ‘선생님은 쓰실 거예요’라고 해줘.”
선생님은 그곳에서도 쓰실 거예요. 그곳에 가시자마자 벌써 밤새워 밀린 글을 쓰고 계시진 않은지요? ‘난장이라고 부르는 악당들’을 노려보며 어떤 문장들을 고치고 계신지요? 선생님. 조금 쉬시다 쓰셔도 돼요. 조급해하지 않고 마음 부풀리며 기다리고 있을게요. 선생님의 글을 잊지 못하는 많은 분들이 그럴 거라 믿습니다. 기다리는 동안 저도 선생님께서 주신 숙제를 하고 있겠습니다.
“우리가 문장을 바꾸지 않으면 문제를 모두 짚어내지 못해. 그 문장을 찾으면 많은 사람들의 마음과 만나게 될 거야. 목소리 낮추고 성실한 사람이 되어야 해.”
이문영 기자 moon0@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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