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T현장] 항우연 내홍 키운 `가스라이팅`

2022. 12. 26. 1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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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기 ICT과학부 차장

'가스라이팅'. 언제부턴가 우리에게 익숙해진 단어다. 수영을 하지 못하는 피해자를 물 속에 뛰어들게 해 살해한 '계곡살인사건', 많은 히트곡을 냈음에도 18년 간 음원 수익이 없다고 가수 이승기에게 단 한 푼도 지급하지 않은 소속사 대표의 행동들이 모두 가스라이팅에 의한 것으로 밝혀지면서 세간의 관심을 더욱 받고 있다.

이처럼 가스라이팅은 타인의 심리나 상황을 교묘하게 조작해 그 사람이 스스로 의심하게 만들어 타인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하는 행위를 뜻한다. 주로 친밀한 관계에서 이뤄지는 경우가 많고, 비대칭적 권력으로 누군가를 통제하고 억압하려 할 때 표출된다. 올 한 해 우리나라는 물론 전 세계적으로 가스라이팅이 얼마나 회자됐으면 미국 유명 사전 출판사인 메리엄 웹스터가 2022년의 단어로 '가스라이팅'을 선정했을 정도다.

최근 한국항공우주연구원(항우연)에서 벌어지고 있는 집안싸움을 보면서 가스라이팅이라는 단어가 뇌리를 관통했다. 항우연 내부 갈등의 발단이 된 조직개편뿐 아니라 그 이전에 불거졌던 전 원장 간 투서와 내홍 등도 특정인에 의한 가스라이팅으로 촉발된 게 아니냐는 의구심이 들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항우연의 집안싸움이 쉽사리 가라앉지 않고 있다. 지난 12일 단행된 조직개편을 둘러싼 내부 갈등이 외부로 표출되면서 과학계의 걱정과 우려 목소리도 점점 커지고 있다.

항우연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러지 않았다. 지난 6월 한국형 발사체 '누리호'를 온갖 역경을 극복하고 발사에 성공해 전 국민으로부터 뜨거운 찬사와 성원을 한 몸에 받았다. 윤석열 대통령도 발사 결과를 보고 받자 엄지손가락을 치켜 세우며 '엄지척'으로 누리호 성공과 10년 간 발사체 기술 자립에 애쓴 연구진들을 한껏 치켜 세웠다.

발사 성공 한 달 뒤인 지난 7월에는 누리호 발사에 노고한 연구진을 위해 커피차를 보내 격려했고, 항우연에서 열린 우주경제 선포식에도 직접 참석해 "대한민국의 우주경제 시대를 열겠다"고 우주에 힘을 실어줬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지난 9월에는 항우연 연구자들의 낮은 처우가 알려지자 사기 진작과 누리호, 우리나라 첫 달 궤도선 '다누리' 연구진들을 포상하기 위해 42억원의 특별성과급을 파격적으로 마련하는 등 각별한 애정을 쏟기도 했다.

좋은 일이 있으면 나쁜 일도 있다고 했던가. 올 한 해 겹경사 속에서 최고로 활약했던 항우연이 조직개편이라는 돌발 악재에 부딪혀 대립과 갈등이 점점 깊어지며 해결 기미를 찾지 못하고 있다. 누리호 설계부터 발사까지 장장 10년 간 사업을 이끌어 온 주역인 고정환 한국형발사체개발사업본부장과 발사체 개발 주역들이 잇따라 조직개편에 반발해 보직에서 자진 사퇴한 것을 두고 책임공방이 내외부까지 확산돼 갑론을박이 이어지고 있다.

더욱이 고 본부장이 이례적으로 언론에 자신이 직접 쓴 사퇴서를 공개하며 조직개편의 부당성을 외부에 알린 것에 대해 "평소답지 않은 행동이다", "얼마나 조직개편이 잘못 됐으면 그랬겠냐" 등 내부에서도 설왕설래하는 분위기다.

그렇다면, 국민뿐 아니라 대통령의 열혈 응원과 지지를 받았던 항우연이 왜 이렇게까지 갈등하고 반목하는 지경까지 됐을까. 돌이켜 보면 항우연의 집안싸움이 외부로 불거진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라는 점이다. 이런 점에 비춰볼 때 분명한 것은 조직개편, 인사 등에 있어 항우연 내부에서 갈등을 생산하는 소위 '갈등 유발자'가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그 갈등 유발자는 갈등을 일으키는 데 그치지 않고, 동료나 후배들을 교묘히 심리적으로 조작해 자신의 지배력을 외부로 표출시키는 가스라이팅도 서슴치 않은 것 같다. 이런 가스라이팅이 오래 전부터, 버젓이 항우연에서 자행돼 왔다는 것이 놀랍다.

결국 가스라이팅은 사람의 욕심에서 시작된다. 자신의 욕심을 절제하지 않으면 자신이 가스라이팅을 하는지 조차 알 수 없다. 지금 항우연에 필요한 건 서로를 신뢰하고 존중하며 꺾이지 않는 마음으로 대한민국 우주경제 강국을 위해 '원팀'이 되고자 하는 마음일 것이다. 원팀이 되지 않고선 누리호 3차 발사, 차세대 발사체, 달 착륙, 한국형위성항법시스템(KPS), 초소형위성 등 항우연 앞에 놓인 국가적 임무는 성공할 수 없기 때문이다. bongchu@d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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