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의 변심, 하노이의 저주
정상회담에 앞서 김 위원장이 “나의 직감으로 보면 좋은 결과가 생길 거라고 믿는다”고 기대를 숨기지 않은 반면, 트럼프 대통령은 “속도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올바른 합의를 하는 것”이라고 짐짓 냉정한 태도를 강조했다. 그러곤 회담을 깼다. 시엔엔은 ‘하노이 회담 결렬’을 생중계 화면에 올리고 코언 청문회 소식은 자막으로 내렸다. 트럼프가 바란 반응이다.
첫 북·미 정상회담의 여운이 가시지 않은 2018년 7월6일 마이크 폼페이오 미국 국무장관이 평양을 찾았다.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이 합의한 ‘6·12 북미 공동성명’ 이행을 협의하려는 방북이다. 그 결과가 뜻밖이다. 폼페이오는 평양에 머문 이틀 동안 김정은을 만나지 못했다. 대신 미국이 “일방적이고 강도적인 비핵화 요구만 들고 나왔다”고 맹비난한 북 외무성 대변인 담화가 7월7일 폼페이오의 전용기가 평양 순안공항을 벗어나자마자 발표됐다.
북은 “공동성명의 모든 조항들의 균형적인 리행을 위한 건설적인 방도들”, 곧 △“조미관계 개선을 위한 다방면적인 교류 실현 문제”(공동성명 1항 ‘새로운 조미관계 수립’) △“조선정전협정 65돌을 계기로 종전선언 발표 문제”(성명 2항 ‘항구적이고 공고한 평화체제 구축 노력’) △“아이시비엠(ICBM) 생산 중단, 물리적 확증 위한 대출력발동기(엔진) 시험장 폐기 문제”(성명 3항 ‘완전한 비핵화 노력’) △“미군 유골 발굴 실무협상 조속 시작 문제”(성명 4항 ‘유골 발굴 진행과 송환’)를 제안했다고 담화는 밝혔다. 그런데 폼페이오는 “시브이아이디(CVID,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불가역적인 비핵화)요, 신고요, 검증이요 하며 일방적이고 강도적인 비핵화 요구만을 들고나왔다”는 것이다.
폼페이오의 ‘빈손 방북’은, 1차 북·미 정상회담 직후 워싱턴 외교가를 휩쓴 부정적 여론과 무관하지 않았다. 24시간 워싱턴만 들여다보는 북이 이런 사정을 모를 리 없다. 북은 특유의 ‘강 대 강’ 맞서기가 아닌 ‘먼저 약속 지키기’로 길을 열려 했다. 북은 한국전쟁 정전 기념일인 7월27일 전쟁 때 숨진 미군 유해 55구를 미국에 인도해줬다. 미군 글로브마스터 수송기(C-17)가 원산까지 와서 오산으로 옮겼다. 북미 공동성명 4조를 먼저 실천해 트럼프의 합의 이행을 에둘러 요구한 셈이다.
그런데도 트럼프가 움직이지 않자, 더 센 카드를 꺼내 들었다. 2018년 9월19일 평양에서 열린 남북정상회담에서 “미국이 6·12 북미공동성명의 정신에 따라 상응조치를 취하면 영변 핵시설의 영구적 폐기와 같은 추가적인 조치를 계속 취해나갈 용의가 있다”(평양공동선언 5조2항)고 밝혔다. 2018년 봄에 그런 것처럼 문재인 대통령의 도움을 받아 ‘남북정상회담→2차 북미 정상회담’의 경로를 뚫으려 한 것이다.
기대대로 워싱턴의 반응이 나왔다. 9·19평양공동선언 발표 닷새 뒤인 9월24일 트럼프 대통령은 워싱턴에서 문 대통령을 만나 “2차 미북 정상회담을 멀지 않은 장래에 하게 될 것”이라고 밝혔다. 문 대통령은 이틀 뒤 유엔총회 연설에서 “김정은 위원장의 비핵화 결단이 올바른 판단임을 확인해줘야 한다”며 미국의 ‘상응조처’를 촉구했다.
2018년 12월30일 김정은 위원장은 문 대통령한테 보낸 친서에서 “서울을 방문하겠다는 강한 의지”를 나타내며 “내년(2019년)에도 남북 두 정상이 한반도 평화번영을 위해 함께 나가자”고 밝혔다고 당시 청와대 대변인이 전했다. 세차례 남북 및 북중 정상회담과 사상 첫 북미 정상회담을 치르며 평화번영으로 가는 길을 닦은 2018년처럼 2019년도 희망에 찬 나날이길 바란다는 기대이자 다짐이다.
2차 북미 정상회담은 2019년 2월27~28일 베트남 ‘소피텔 레전드 메트로폴 하노이 호텔’(메트로폴호텔)에서 열렸다. 메트로폴호텔은 1972년 크리스마스이브에 존 바에즈가 미군의 폭격을 피해 숨어든 지하 방공호에서 미국의 베트남침략에 반대하는 이들의 성가인 ‘우리 승리하리라’(We shall overcome)를 부르고 또 부른 곳이다. 1961~68년 미 국방장관으로 베트남 침략을 설계·집행한 로버트 맥나마라와 ‘반미 전사’이던 응우옌꼬탁 전 베트남 외무장관이 1997년 6월20~23일 처음 만나 왜 전쟁에 빠졌고, 빨리 끝내지 못했는지를 되짚어 또다른 과오를 막고자 ‘적과의 대화’를 한 장소다. 맥나마라는 뒷날 “적을 이해하라” “상대가 적이라도 최고지도자끼리 대화를 계속해야 한다”를 이 대화의 교훈으로 꼽았다.
하여 메트로폴호텔은 북-미 정상이 두번째 담판을 짓기에 맞춤한 장소다. 처절한 전쟁을 치르고도 친구로 거듭난 미국-베트남처럼 북한과 미국도 친구가 될 수 있다는 희망의 거처이기에 더욱 그랬다.
김 위원장은 회담 나흘 전인 2019년 2월23일 오후 4시32분 평양역에서 전용열차에 올라 66시간, 3800㎞에 걸친 열차여행에 나섰다. 조선노동당 중앙위 기관지인 <노동신문>은 “당과 정부, 무력기관의 간부들은 경애하는 (김정은) 최고영도자 동지께서 제2차 조미 수뇌(정상) 상봉과 회담에서 훌륭한 성과를 거두고 안녕히 돌아오시기를 충심으로 축원하였다”는 보도(2월24일치 1면)를 시작으로 연일 ‘하노이 회담’ 띄우기에 열을 올렸다.
2월27일치엔 김 위원장의 베트남 도착 소식과 함께 “경제발전에 힘을 넣고 있는 윁남(베트남)”이라는 제목의 기사도 실었다. <노동신문> 역사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회담 사전 홍보다. 베트남처럼, 이제 북한도 국제사회의 일원으로 경제발전의 과실을 누릴 날이 눈앞에 다가왔다는 기대감이 역력하다. 이때만 해도 김 위원장을 포함해 북의 그 누구도 ‘트럼프의 변심’을 예상하지 못한 듯하다.
첫날 회담은 나쁘지 않았다. 김 위원장은 “미국이 유엔 제재의 일부, 즉 민수경제와 인민생활에 지장을 주는 항목의 제재를 해제하면 우리는 영변 핵의 플루토늄과 우라늄을 포함한 모든 핵물질 생산시설을 미국 전문가들의 입회하에 두나라 기술자들의 공동의 작업으로 영구적으로 완전히 폐기하겠다”고 제안했다.(2019년 3월1일 리용호·최선희 하노이 기자회견). 트럼프 대통령도 “합의문에 ‘제재를 해제했다가도 조선이 핵활동을 재개하는 경우 제재는 가역적이다’는 내용을 포함시킨다면 합의가 가능할 수도 있다는 신축성 있는 입장”을 보였다.(2019년 3월15일 최선희, 평양 주재 공관장 대상 설명회) 요컨대 하노이 회담 첫날 북-미 정상은 ‘영변 핵시설 영구 폐기’와 ‘제제 일부 해제’를 맞바꾸되 북이 비핵화 약속을 어기면 제재를 되살리는 ‘스냅백’을 안전장치로 두는 데 어느 정도 공감을 이뤘다는 뜻이다.
그런데 밤사이 트럼프가 ‘변심’했다. 그 시각 하노이에서 1만3400㎞ 떨어진 워싱턴에선 트럼프의 개인 변호사이자 ‘해결사’로 불린 마이클 코언이 의회 하원 감독개혁위원회의 공개 청문회에 나서 트럼프를 “사기꾼, 인종주의자, 범죄자”라 비난하며 폭로전에 나섰다. 시엔엔(CNN)은 코언 청문회를 생중계하며 하노이 회담은 자막으로만 처리했다. 당시 미국인의 주된 관심사를 짐작케 한다.
2019년 2월28일 단독 정상회담에 앞서 김 위원장이 “나의 직감으로 보면 좋은 결과가 생길 거라고 믿는다”고 기대를 숨기지 않은 반면, 트럼프 대통령은 “속도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올바른 합의를 하는 것”이라고 짐짓 냉정한 태도를 강조했다. 그러곤 회담을 깼다. 시엔엔은 ‘하노이 회담 결렬’을 생중계 화면에 올리고 코언 청문회 소식은 자막으로 내렸다. 트럼프가 바란 반응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많이 미안했는지 “평양까지 내 전용기로 함께 돌아가자”고 제안했지만, 김 위원장은 정중하게 사양했다고 당시 사정에 밝은 고위 외교소식통이 전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회담 뒤 혼자 한 기자회견에서 “영변 해체만으론 미국이 원하는 모든 비핵화가 아니라고 판단했다”며 “언론 비판과 달리 미국은 어떤 것도 북한에 양보하거나 포기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트럼프 특유의 허세·변명만은 아니다.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의 핵심 설계자인 임동원은 “트럼프 대통령이 한반도에서 변화보다는 현상 유지를 원하는 군산복합체 등 보수 강경파들의 제동에 걸려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주저앉았다”고 자서전 <다시, 평화>에서 짚었다.
김 위원장은 하노이 회담 결렬로 ‘무오류의 수령’도 실패할 수 있음을 북녘 인민들한테 들켜 지도력에 심대한 타격을 입었다. 그럼에도 바로 태도를 바꾸지는 않았다. 회담 결렬 42일 만인 2019년 4월11일 최고인민회의 시정연설을 통해 “어쨌든 올해 말까지는 인내심을 갖고 미국의 용단을 지켜볼 것”이라고 여지를 뒀다. 그러나 “미국의 용단”은 트럼프에서 조 바이든으로 대통령이 바뀐 뒤에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다. 탈냉전과 평화번영의 꿈에 부풀었던 남과 북의 8000만 시민·인민은 아직껏 ‘하노이의 저주’를 풀지 못해 다시 커지는 전쟁 위기의 공포에 안절부절이다.
이제훈 | 통일외교팀 선임기자
1993년 한겨레에 들어와 1998년부터 금강산관광·개성공단 사업의 시작과 중단, 다섯차례의 남북정상회담, 여섯차례의 북한 핵실험,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죽음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3세 승계’, 두차례 북·미 정상회담, 사상 첫 남·북·미 정상회동 등을 현장에서 취재·보도해왔다. 반전·반핵·평화의 한반도와 남북 8천만 시민·인민의 평화로운 일상을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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