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론직설] “상대 진영 惡으로 규정하는 ‘전쟁’ 끝내야 정치의 위기도 극복”
거대 야당, 압도적 과반 의석 업고 입법 독주 치달아
팬덤만 바라보는 강성정치로는 중도층 마음 못 얻어
국민 눈높이 ‘상식의 정치’ 복원하는 당이 총선 승리
尹, 각계각층 목소리 듣는 ‘경청 리더십’으로 통합을
2022년 세밑, 총체적 복합 위기의 거센 파고 속에서 나라가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고 국민들에게 힘과 위로가 돼야 할 정치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대화와 타협의 정치는 실종되고 대결 정치가 만연하면서 여의도 국회는 저주와 증오로 넘쳐난다. 여야가 24일 새벽 국회 본회의에서 가까스로 내년도 예산안을 통과시켰지만 2014년 국회선진화법 시행 이후 ‘최장 지각 처리’라는 오명을 피할 수 없게 됐다. 한국 정치가 민주주의의 위기를 넘어 실존적 위기에 처했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지난 30여 년 동안 냉철한 분석과 대안 제시를 통해 시사평론가로 이름을 알린 유창선 사회학 박사는 26일 서울경제와 만나 “정치가 갈등을 조정하기는커녕 모든 갈등의 근원지가 됐다”고 비판했다. 이어 “상대 진영을 싸워서 이겨 박멸해야 할 악의 세력으로 규정하면서 정치가 아닌 전쟁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유 박사는 “민주와 독재가 대결하던 독재 정권 시절에도 고비마다 정치력을 발휘해 갈등을 해결하려는 노력이 포기된 적이 없었다”면서 “여야 모두 상식의 정치를 복원해야 2024년 총선에서 국민의 선택을 받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2022년 한국 정치를 총평한다면.
△정치가 완전히 실종된 최악의 해였다. 과거 독재 정권 시절을 돌아봐도 ‘이렇게까지 정치가 역할을 하지 못한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참담하다. 정치가 사라진 자리에 증오와 저주의 싸움판이 들어섰으니 죽기 살기식 대결 정치만 가득했다.
-정치 실종의 가장 큰 이유를 무엇이라고 보는가.
△문재인 정부 시절 심화된 진영 대결 정치에서 비롯됐다. 문제는 정권이 교체됐음에도 진영 정치가 사라지지 않고 외려 더 격화하고 있다는 점이다. 2019년 ‘조국 사태’를 기점으로 나라가 두 동강 난 것 같은 참담한 광경을 온 국민이 목격했다. 문재인 전 대통령의 책임이 무겁다. 국민 전체를 끌어안는 국정 운영이 아니라 철저하게 진영의 정치를 해온 것이 치명적 과오다. 대선이 끝난 뒤에는 승복하지 않고 오히려 새 정부에 대한 증오의 정치, 복수의 정치를 하다 보니 진영 간 대결만 격화됐다. 윤석열 정부도 ‘눈에는 눈, 이에는 이’식의 강경한 태도를 고수하면서 접점 찾기가 어려워지고 있다.
-거대 야당의 입법 독주에 대한 우려가 적지 않은데.
△더불어민주당은 21대 총선 이후 입법 독주에 대한 역풍으로 선거에서 내리 패배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지난해 4월 서울·부산시장 보궐선거와 올해 3월 대선, 6월 지방선거에서의 민주당의 패배는 모두 입법 독주에 대한 국민들의 호된 심판이었다. 그런데도 169석의 압도적 의석을 무기로 입법 권력을 휘두르는 것은 민심을 거스르는 몰염치한 행태다. 22대 총선에서 대선 패배를 설욕하려면 중도층이 납득할 수 있도록 합리적인 노선을 재정립해야 한다.
-합리적인 노선이란 뭔가.
△여당과 야당의 역할부터 명확히 구분해야 한다. 국정 운영의 기본 권한은 집권당에 있다. 예산안 편성 등 국정 운영을 위한 정권의 책임과 권한은 철저하게 존중돼야 한다. 하지만 그동안 민주당이 보인 모습은 정권이 바뀐 게 맞나 하는 의구심이 들 정도로 도가 지나쳤다. 아직도 자신들이 집권당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것 같다. 야당은 정권을 비판하고 견제하면서 대안을 제시하는 역할에 충실해야 한다.
-정당정치가 퇴행했다는 지적이 나온다.
△보수와 진보를 비롯한 다양한 정치 세력이 공존하면서 선의의 경쟁을 벌이고, 국민의 지지를 받는 쪽이 집권하고 다른 쪽은 견제하는 게 정당정치 본연의 모습이다. 그런데 우리의 정치 현실을 보면 공존의 의사가 전혀 없는 것 같다. 상대 진영을 전쟁을 치러 박멸해야 할 악의 세력으로 규정하고 있으니 공존의 정치가 들어설 자리가 없는 것이다.
-대화와 타협의 정치가 실종됐다는 의미인가.
△독재 정권 시절 민주화 세력과 독재 정권이 싸우는 와중에도 정치는 작동했다. 대화하고 타협하면서 고비를 숱하게 넘겼다. ‘3김 정치’를 낡은 정치라고 치부하지만 당시에는 싸우다가도 통 큰 리더십으로 타협하는 ‘큰 정치’가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정치력을 발휘해 갈등을 조정하고 타협점을 찾는 정치가 자취를 감췄다. 민주당에 1차적 책임이 있다. 김대중·노무현 전 대통령 시절의 민주당은 이러지 않았다. 민심을 무섭게 알고 균형의 길을 가던 민주당이었다. 그런데 문재인 정부 때부터 철저하게 진영 정치를 추구하면서 변질됐다.
-팬덤 정치의 폐해를 지적하는 것인가.
△팬덤 정치가 횡행하면서 지도부가 강경파 일색으로 구성되고 민심의 눈높이에 맞지 않는 정치인들의 언행이 반복되고 있다. 장경태 의원의 ‘빈곤 포르노’ 언급이나 김의겸 의원의 ‘청담동 술자리 의혹’ 발언 등은 모두 사실무근으로 판명됐지만 여태껏 사과 한마디 없다. 합리적인 중진 의원 일부가 쓴소리를 하지만 귓등으로도 듣지 않고 있다. 공천을 의식하기 때문이다. 강성 지지층인 권리당원들에게 찍혀 공천을 받지 못할까봐 눈치를 보면서 비겁한 정치인으로 연명하고 있는 것이다. 과거에는 주로 보수정당 인사들이 막말을 하고 진보정당이 이를 비판하면서 국민들의 마음을 얻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보수당이 말조심하는 반면 민주당은 팬덤만 바라보는 ‘강성 정치’를 하는 경우가 많다.
-민주당에 대한 실망감이 매우 큰 것 같다.
△요즘 민주당은 증오와 저주의 정치를 하고 있다. 민주당 사람들 얼굴을 보면 항상 화가 나 있다. 적개심이 정치를 끌고 가서는 안 된다. 내가 사랑했던 민주당이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몰염치한 당으로 변질됐다는 점에서 더 쓴소리를 하게 된다.
-이재명 대표의 ‘사법 리스크’로 민주당 내분도 심화하는 양상인데.
△민주당은 이 대표의 덫에 걸려 있다. ‘방탄’할수록 덫은 더욱 조여오게 돼 있다. 이쯤 되면 이 대표가 ‘선당후사(先黨後私)’의 자세로 물러나 자연인으로서 법적 대응을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2024년 총선이 다가오는데 이러다 정상적으로 선거를 못 치를 수도 있다.
-이 대표가 외려 국민의힘을 돕고 있다는 얘기까지 나오는데.
△이 대표가 버티고 있음으로 해서 여권을 돕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윤석열 정부가 출범한 뒤 국민의힘에서 이탈층이 많았는데 이들이 민주당으로 가지 않았다. 이 대표 때문이다. 중도층이 민주당으로 가지 못하게 막아주는 역할을 이 대표가 하고 있는 셈이다. 국민의힘 입장에서는 이 대표의 존재가 고마울 수밖에 없다. 지금의 민주당은 이 대표의 덫과 강성 팬덤층의 덫에 동시에 걸려 옴짝달싹 못하는 형국이다. 민주당은 김종인 비상대책위원장이 친문 인사들을 대거 공천에서 탈락시키고 대승을 거뒀던 2016년 총선의 기억을 떠올릴 필요가 있다.
-집권 1년 차에 윤석열 대통령이 보여준 모습도 실망스럽다는 지적이 있는데.
△야당이 강경으로 치닫는 배경에 이 대표가 있다면 여당이 강경으로 치닫는 배경에는 윤 대통령이 있다. 단적으로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의 거취 문제를 들 수 있다. 이태원 참사와 관련해 이 장관이 법적 책임이 없는 만큼 야당에 떠밀려 사퇴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이 윤 대통령의 생각인 듯싶다. 하지만 대통령은 법적 논리가 아닌 정치적 논리에 따라 판단하면서 세심하게 민심을 살펴야 하는 자리다. 국민들이 봤을 때 여태껏 이태원 참사에 책임지는 고위층 인사가 한 명도 없다. 국가의 존재 이유를 묻지 않을 수 없다. ‘야당이 재난을 정치화한다’고 비판만 할 게 아니라 ‘재난의 정치화’에 빌미를 주지 않도록 대통령이 선제적 리더십을 보여줬어야 했다.
-내년에 집권 2년 차를 맞는 윤석열 정부에 조언한다면.
△분명한 사실은 보수층에 갇힌 현재의 집권 행태로는 2024년 총선에서 절대로 승리할 수 없다는 점이다. 1차적 원인은 공감 능력이 부족한 대통령에게 있다. 상식을 지닌 다수 국민의 공감에 기초해 판단하지 않고 자기 중심적 정책 결정을 반복하고 있다. 각계각층의 목소리를 경청해야 하는데 대통령은 민주당만 바라보고 정치를 하는 듯한 인상을 준다. 전국 단위 선거가 없는 2023년이 매우 중요한 해다. 내년에 국정 동력을 회복해 성과를 제대로 보여줘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식물 정부’로 전락해 총선에서 지고 국정 성과도 없는 실패한 정부로 끝날 수 있다.
-최근 에세이집 ‘나를 찾는 시간’을 통해 제2의 인생을 살고 있다고 했는데.
△2019년 2월 뇌종양 진단을 받았다. 10시간 넘게 진행한 수술은 다행히 성공적이었지만 후유증은 엄청났다. 혀가 마비돼 말이 나오지 않았고 식도가 열리지 않아 8개월 동안 물 한 모금 목으로 삼킬 수 없었다. 재활 운동 끝에 많이 회복했고 지금은 선물처럼 주어진 제2의 인생을 살고 있다. 30여 년간 시사평론가로 일하며 정치에 매달렸는데 돌이켜보면 이기고 지는 것이 부질없다는 생각이 든다. 너무 뜨거운 삶이 좋은 게 아니라는 것도 깨달았다. 사람 체온인 36.5도만큼만 유지하려고 한다. 진정한 행복은 광장이 아니라 개인의 고즈넉한 삶 속에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He is···
1960년 서울에서 태어나 연세대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연세대 대학원에서 사회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91년 ‘꼬마민주당’에 입당해 정치와 연을 맺었지만 현실 정치와 거리를 둔 날카로운 진단을 통해 1세대 시사평론가로 이름을 알려왔다. 2019년 뇌종양 진단으로 인생의 위기를 맞았지만 건강을 회복한 뒤 인문학적 사유로 지평을 넓히며 활발한 집필 활동을 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 ‘나를 찾는 시간’ ‘나는 옳고 너는 틀렸다’ ‘나를 위해 살기로 했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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