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원의 경제 프리즘 <10>] 국가 운명을 지키는 기술과 기업: 호국신기, 호국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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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데믹(pandemic·감염병 대유행) 상황이 사실상 끝나가면서 회복세를 보일 것 같았던 세계 경제가 2022년 2월 시작된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으로 인플레이션이 심화하자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를 필두로 각국 중앙은행이 이를 잡겠다고 금리를 급격히 올리는 통에 불황의 늪으로 다시 빠져 들었다.
세계 경제의 미래를 이끌 산업들에서 관련 기술의 대부분을 한국 기업이 주도하거나 그 길목을 지키고 있어 일부 산업의 경우 이미 결실을 수확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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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08년 개봉된 영화 ‘신기전’은 조선 왕조 세종 시대를 배경으로 한다. 줄거리는 이렇다. 요즘 말로 하면 대형 로켓을 개발하는 조선을 견제하려고 명나라가 그 기술자와 제조법을 탈취하려 하지만, 주인공들은 이를 이겨내고 결국 신무기 개발에 성공한다. 더 나아가 이를 이용해 명나라와 오랑캐의 연합 군대를 전멸시키고 나라를 지켜낸다. 즉 ‘신기전’은 ‘호국신기(護國神技)’라는 것이다. 신기전은 실재한 것이나 영화의 내용은 픽션(fiction)이다. 사실 우리나라 역사에서 ‘호국신기’라고 불릴 만한 것은 상당수 있었다. 왜구를 쳐부순 최무선의 화포부터 시작해 임진왜란에서 대활약한 거북선도 그 대표적인 예일 것이다. 그 위력이 대단해 지금도 해외 전문 유튜버들 사이에서 최고로 꼽히는 우리의 활 국궁(國弓)도 있다. 남방산 물소 뿔과 민어풀을 쓰는 제조법은 당시에 활의 위력을 비약적으로 높이는 비법 중의 비법이었다. 특히 이 활에 대롱을 걸고 그 속을 통해 쏘는 작은 화살인 ‘편전(片箭)’은 적군의 갑옷을 가볍게 뚫을 수 있을 정도였다. 임진왜란 때 근접 전시 왜군을 압도하던 조선군의 월도(月刀)도 빼놓을 수 없겠다. 그러나 16~17세기 왜란과 호란을 반복적으로 겪고 나서 국력이 크게 약해지고 집권 세력의 무능과 부패로 이런 군사 기술 발전은 크게 정체됐다. 이후 쇄국 정책까지 가세하면서 외부로부터 신기술 유입이 거의 끊긴 결과가 결국 3류 제국주의 일본에 국권을 빼앗긴 경술국치다.
#2│일제가 부순 한양 성곽이 이제는 상당 부분 복원된 남산공원에는 백범광장, 안중근 기념관 등이 자리 잡고 있는데 원래는 식물원도 있었다. 그런데 이 자리는 일제 강점기에 ‘조선신궁’이라는 커다란 일본식 신사가 있었던 곳이다. 일제는 1919년에 ‘조선신사(朝鮮神社)’를 설립하기로 하고 1920년 공사를 시작해 1925년 완공하고 신궁(神宮)으로 격상했다. 이 신사 참배를 위해 상경하는 이들의 편의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원래 ‘경성역’으로 건설됐던 지금의 용산역을 놓아두고 이 신사 완공에 때 맞춰 지금의 서울역인 ‘경성역’을 새로 건설하게 됐다. 이 신사는 당연히 조선이 아니라 일본을 지켜달라는 ‘호국신사(護國神社)’의 성격이었다고 하는데 별 효험은 없었는지 일본은 원자탄을 얻어맞고 패망했다.
#3│1990년대 말 한국은 외환위기를 맞았다. 국제통화기금(IMF)의 구제금융을 받았지만 이들의 요구로 20%가 훨씬 넘는 고금리를 수용해야만 하는 상황에서 많은 기업이 도산하거나 도산 위기에 몰리게 됐다. 당시 필자는 모 대기업 산하 경제연구소에 재직 중이었는데 모기업도 큰 어려움에 직면해 필자의 연구소에서는 ‘IMF 태스크포스(TF) 팀’이라는 조직이 생겨 필자가 그 팀장을 맡게 됐다. 뒤늦게나마 한국이 외환위기에 몰린 원인 분석과 함께 정책 건의 및 기업의 활로 모색 등의 임무를 수행했다. 그런데 필자의 팀이 분석한 외환위기의 여러 원인 중에서 가장 근본적인 것으로 판단한 것은 취약한 기업 부문의 경쟁력이었다. 웬만한 기업은 자본금의 네 배가 넘는 부채를 가지고 있는 상태에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 이후 한국 정부가 값싼 외자 차입을 허용하자 기업들이 앞다퉈 외채를 끌어다 쓴 것이 화근이었다. 삼성전자의 메모리 반도체 등을 제외하고는 세계 일류 기술은 전무했던 한국 기업의 무기는 당시 어느 대기업 총수의 말대로 ‘미드테크(중급 기술)’와 싼 가격뿐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높은 수준의 현금 흐름 창출은 불가능했고 부채를 제때 상환하는 것만도 힘겨웠던 시절이었다. 근본적인 ‘부채 상환 능력’이 취약한 상태였던 것이다. 고금리와 함께 부채 상환 요구가 같이 닥치자 거의 모든 기업이 부채 위기에 빠지면서 나라 전체를 위기의 늪으로 끌고 들어간 것이다. 그런데 2022년 9월 미국의 블룸버그가 제2의 외환위기 가능성을 거론하면서 여러 통화와 함께 원화, 즉 한국을 그 대상으로 지목해 한바탕 소동이 났다. 정부 당국은 곧바로 그럴 가능성은 작다고 부인하고 나섰다.
팬데믹(pandemic·감염병 대유행) 상황이 사실상 끝나가면서 회복세를 보일 것 같았던 세계 경제가 2022년 2월 시작된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으로 인플레이션이 심화하자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를 필두로 각국 중앙은행이 이를 잡겠다고 금리를 급격히 올리는 통에 불황의 늪으로 다시 빠져 들었다. 한국도 예외는 아니다. 국내적으로는 오른 금리로 지난 정부에서 키워놓을 대로 키워놓은 집값 버블(거품)이 급격히 빠지면서, 역대 정부를 거치면서 부풀려진 사상 최대의 가계부채 문제가 자칫 파국으로 치닫지 않을지 걱정스러운 모습이다. 일부 대기업과 금융그룹은 물론 공기업도 유동성 확보에 애를 먹고 있다는 이야기도 들린다. 국제 수지도 빨간 불이 켜졌다. 정점에 비해 떨어지기는 했지만 높은 에너지 가격 등으로 수입은 크게 늘었다. 반면 한국 경제의 주력 제품인 반도체가 세계적인 불황과 미⋅중 무역전쟁의 여파로 해외 수요 부진이 이어지며 수출이 몇 달 연속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하는 등 수출 전선에 문제가 생긴 모습이다. 결국 2022년 무역수지가 14년 만에 적자로 끝날 것으로 추정된다. 정부의 부인에도 일부 이코노미스트는 이런 양상이 1990년대 말 상황과 비슷하다는 점을 들어 블룸버그의 지적대로 제2의 외환위기로 빠질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고 있다.
90년대 외환위기 재현 가능성 작지만
그러나 필자도 조심스럽지만 한국 경제의 위기 가능성은 매우 작다는 정부의 주장에 동의한다. 1990년대 말 한국 외환위기의 주범이 됐던 기업 부문 경쟁력이 이후 20여 년간 크게 제고됐기 때문이다. 웬만한 대기업의 부채 비율은 100% 안팎으로 떨어져 있는 것은 차치하고도 근본적인 부채 상환 능력이 현저히 높아진 상태다. 세계 경제의 미래를 이끌 산업들에서 관련 기술의 대부분을 한국 기업이 주도하거나 그 길목을 지키고 있어 일부 산업의 경우 이미 결실을 수확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이는 보수, 진보를 막론하고 역대 정권의 반기업 정책 기조를 이겨내면서 기업들이 기술 개발에 매진한 결과다. 메모리 및 파운드리(반도체 위탁 생산) 등 반도체, 조선, 배터리, 전기차, 차세대 원전 등이 그 예다.
여기에 엔터테인먼트와 식품 등이 가세하고 있고, 최근에 방위 산업 수출이 폭발적인 성장세를 이어 가고 있다. 세계 최고 수준의 기술이 있는 한 최악의 경제 상황이 닥쳐도 이를 이겨낼 수 있다. 경기가 조금만 호전되면 큰 폭의 이익 신장으로 이어지는 모습은 이미 20여 년 전 외환위기 때 삼성과 대우의 명운이 완전히 갈리는 것에서 보았다. 다행히 최근 미국의 금리 인상 기조가 거의 끝나가고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도 곧 결말이 날 조짐이 보이는 등 2023년 우리 기업에 다시 기회가 찾아올 가능성도 엿보인다. 이런 면에서 우리 기업들과 그들이 가지고 있는 기술은 우리나라의 안보와 경제를 지키는 역할을 하고 있다고 할 것이다. 고졸 신화를 썼던 삼성전자 임원 출신의 양향자 의원은 한 강연에서 기술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호국신기(護國神器), 호국신산(護國神山)”이라는 표현을 썼다. 이를 조금 차용한다면 ‘호국신기(護國神技), 호국신사(護國神社)’ 즉 나라를 지키는 ‘기술(技術)’과 ‘회사(會社)’라는 말이다. 그런데 새 정부가 들어와서도 야당이 국회의 다수를 점령한 탓인지 친기업 및 기술 정책의 도입과 적용은 아직도 지지부진한 모습이다. 양 의원은 이렇게 일갈했다. “자원 하나 없는 우리가 살아남기 위해서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과학 기술 패권국가가 되는 것뿐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우리는 과학 기술을 국가 운영의 중심축에 둔 적이 없다.”
참 맞는 말이다. 기술 개발의 주역은 기업인 만큼 이제는 정말로 ‘나라를 지키는 기술과 기업’을 우대하는 방향으로 국정 운영이 이뤄져야 한다는 말로도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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