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 허브로 급부상 중인 싱가포르] 홍콩·상하이 뒷걸음치자 준비된 강자 싱가포르, 아시아 중심으로 우뚝
편집자 주 검은 토끼의 해, 계묘년(癸卯年) 새해가 밝았다. 하지만 R(Recession·경기 침체)의 공포는 여전하고, 대내외 불확실성은 깊어지고 있다. 한국 경제는 어디로 갈 것인가. ‘이코노미조선’은 위기 속에서 도약의 발판을 마련하는 해외 경제 혁신 현장을 연중 기획으로 소개한다. 아시아의 허브(hub)로 부상한 싱가포르를 시작으로 인도, 인도네시아, 대만, 중동 등을 리포트한다.
12월 1일 오전 9시 무렵 싱가포르 중심업무지구(CBD)는 출근길을 서두르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싱가포르 내 자산 2위 규모로 꼽히는 화교계 은행 OCBC, 싱가포르 투자은행 UOB, 중국은행(Bank of China)과 HSBC, 메릴린치증권 등 글로벌 금융기관들이 한데 모여 있는 이곳에선 현지인들만큼이나 사원증을 목에 건 유럽, 동남아시아계 외국인도 많이 눈에 띄었다. 거리를 걸어다니면 영어에 베이징어, 광동어, 베트남어가 한데 어우러져서 들렸다. 글로벌화한 도시 국가 싱가포르의 현주소를 한눈에 보여주는 장면 같았다.
싱가포르가 내실이 탄탄한 나라라는 것은 새로운 사실이 아니다. 면적이 부산광역시보다 조금 작고, 인구수(587만 명)가 서울 인구의 절반 정도에 불과한 작은 도시 국가지만, 싱가포르의 2021년 기준 1인당 국민소득은 6만4010달러(약 8300만원)로, 한국(4만7490달러)보다 높다. 1970~80년대 당시 경제 성장 가도를 달리던 한국·홍콩·대만 등과 함께 ‘아시아의 네 마리 용’으로 불리기도 했다. 그런데 최근 싱가포르가 또다시 돈과 인재가 몰리는 아시아 중심지로 급부상(浮上)하려는 조짐을 보이고 있다. 여세를 몰아 글로벌 인재와 기업 친화적인 환경 만들기에 속도를 내고 있다. 2023년 9월부터 월수입 3만싱가포르달러(약 2800만원) 이상인 기술 인재에게 제공하는 2~3년짜리 비자를 5년으로 확대하기로 한 게 대표적이다.
기업과 부호 몰리며 금융 허브 입지 굳혀
싱가포르의 아시아 허브 부상은 글로벌 기업들의 투자 러시(rush)로 나타난다. 중국 최대 바이오의약품 수탁개발생산(CDMO) 업체인 우시앱텍의 자회사 우시바이오로직스는 2022년 7월 싱가포르에 연구개발(R&D)과 대규모 원료의약품 제조 역량을 강화하고자 향후 10년간 14억달러(약 1조8300억원)를 투자해 위탁연구생산개발 시설을 설립하겠다고 발표했다. 1500명 규모의 R&D 관련 직원이 신규 채용될 것으로 전망된다. 같은 해 4월엔 프랑스 제약사 사노피가 싱가포르 투아스파크에 4억3400만달러(약 5661억원)를 투자해 백신 생산 건설을 발표했고, 2021년엔 일본 다케다제약, 독일 백신 제조업체 바이오앤텍, 미국 생명공학 기업 10X지노믹스 등이 일찌감치 싱가포르 투자 계획을 밝히고 제조 공장을 짓고 있는 중이다. 이렇듯 활발한 외국인직접투자(FDI)에 힘입어 코로나19가 지속되는 상황 속에서도 2021년 싱가포르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은 7.6%로, 2010년(14.5%) 이래 11년 만에 최대치를 기록했다.
전통적으로 강세를 보였던 금융 분야에서는 입지가 한층 강화됐다. 2022년 9월 발표한 국제금융센터지수(GFCI) 평가에서 싱가포르는 홍콩을 제치고 아시아 1위, 세계적으로는 미국 뉴욕과 영국 런던 뒤를 이은 3위를 기록했다. 매년 3월과 9월 두 차례 결과를 발표하는데, 싱가포르는 2022년 3월보다 9월 순위가 세 계단 뛰어올랐다. 블룸버그통신은 “싱가포르가 홍콩을 제치고 아시아의 금융 허브로 올라섰다”고 보도했다. 스타트업 투자도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다. 스타트업 전문 매체 크런치베이스뉴스에 따르면, 2021년 10월 기준 싱가포르는 인구 1인당 스타트업 투자액이 1398억달러(약 183만원)로, 전 세계에서 가장 많았다.
경제 호황에 힘입어 싱가포르 부동산 시장 역시 활황을 띠고 있다. 중국 부호와 기업들의 이전 영향이 크다. 중국은 물론 대만 부호들까지 싱가포르로 이주하는 등 자산 이전을 서두르고 있다고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가 최근 보도했다. 영국의 헨리앤드파트너스에 따르면 2022년 싱가포르에 순유입된 해외 백만장자는 2800명으로 2019년 대비 87% 늘어난 것으로 추정됐다. 반면 홍콩과 중국에서는 3000명과 1만 명의 백만장자가 순유출된 것으로 나타났다.
중국 패스트 패션 기업 시인(希音)은 2022년 1분기 싱가포르 고급 오피스 빌딩 임대 계약을 체결해 창업자를 비롯한 직원 다수가 싱가포르로 이주할 계획이다. 대표적인 중국 IT 기업 알리바바도 2020년 싱가포르 중심부에 있는 52층 건물 AXA타워 지분을 50% 취득해 이 회사에 국제 본사를 둘 예정인 것으로 알려졌다. 글로벌 부동산 그룹 JLL에 따르면, 2022년 2분기 싱가포르 도심의 주요 오피스 임대료는 1분기보다 약 2.7%포인트 상승한 제곱피트(0.028평)당 10.74싱가포르달러(약 1만326원)를 기록했다. 이는 팬데믹(Pandemic⋅감염병 대유행) 이전 상황으로 회복한 수치다. JLL의 아시아 자본 시장 수석 전략 고문 레지나 림(Regina Lim)은 파이낸셜타임스(FT)에 “2022년 말까지 제곱피트 당 11달러를 돌파하고, 2026년까지 추가로 임대료가 25%는 더 올라가리라고 본다”고 말했다. CNBC는 “싱가포르는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부동산 가격이 상승하고 있으며, 향후 6개월간 계속 상승할 것으로 점쳐지는 전 세계 4대 도시 가운데 하나로 꼽히고 있다”고 보도했다.
불안정한 홍콩·상하이 대비되는 싱가포르
그 직접적인 요인은 중국과 홍콩의 불안한 정치 상황이다. 특히 금융 강국으로서 싱가포르의 라이벌이었던 홍콩과 상하이의 기세가 꺾인 점이 싱가포르에 직접적인 반사 이익으로 작용했다. 2019년 홍콩에서 벌어진 반중(反中) 시위를 중국이 무력으로 진압하며 유혈 사태가 벌어지자, 홍콩을 거점으로 아시아 사업에 주력했던 글로벌 기업들의 ‘헥시트(HKexit·탈홍콩)’가 이어졌다. 영국 가전 업체 다이슨, 유럽 명품 기업 LVMH 등이 작년 홍콩 사업 본부를 폐쇄하거나 인원을 대폭 줄였다. 경제 잡지 ‘포천’에 따르면, 홍콩에 아시아 본부를 둔 미국 기업이 2021년 254개로 전년 대비 10% 줄었다. 또 2022년 4~5월 2개월간의 상하이 코로나19 봉쇄로 외국인과 현지 부유층이 짐을 싸면서 현지 주택 월세가 약 20%까지 떨어진 것으로 전해졌다.
홍콩과 상하이를 떠난 이들이 대신 눈을 돌린 건 안전하고 사업하기 좋은 싱가포르였다. 골드만삭스는 “(반중 시위가 한창이던) 2019년 6~8월 홍콩에서 싱가포르로 흘러간 자금이 40억달러(약 5조2200억원)에 달한다”고 분석했다. 이로 인해 홍콩 내 반중 활동을 처벌하는 ‘홍콩 국가보안법’이 전면 시행되기 직전인 2020년 싱가포르 금융기관의 싱가포르 외 거주자의 예금 총액은 전년 대비 40% 이상 증가했다. 글로벌 리쿠르트 업체 웰즐리 파트너스(Wellesley Partners)의 크리스티안 브룬(Christian Brun) 최고경영자(CEO)는 홍콩 경제 전문지 ‘EJ인사이트’에 “(코로나19로 아시아를 떠났던) 글로벌 기업들이 다시 돌아오고 있다. 하지만 홍콩이 아니라 싱가포르다”라면서, “홍콩의 방역 규제는 이전보다 덜하지만, 경제·정치 환경이 여전히 불안정하며 미국과 중국의 갈등 역시 배제할 수 없다”고 말했다. 실제로 세계에서 가장 높은 부동산 가격을 기록했던 홍콩은 현재 2016년 이래 6년여 만에 최저치에 머물고 있다.
글로벌 기업들이 싱가포르에 주목하고 있는 또 다른 이유는 기업 친화적인 환경이다. 싱가포르의 법인세율은 17%로, 한국보다 8%포인트 낮은 데다 업종에 따라 다양한 면세 혜택이 주어진다. 또한 속지주의를 원칙으로 하고, 이중 과세를 금지해 오직 싱가포르 내에서 발생한 법인 소득에 대해서만 세금을 부과한다. 외국인 소유권 제한 및 외환 통제도 없어 외국인이 싱가포르에 투자하기도 쉽다.
한국은 싱가포르와 여러 가지 비슷한 점이 많다. 국토 면적이 좁고 자원이 부족하지만 교육 수준이 높은 인재가 풍부하다. 아시아의 허브로 급부상 중인 싱가포르의 발전상은 궁극적으로 한국이 추구해야 할 미래의 모습이다. ‘이코노미조선’이 싱가포르에서 경제 혁신 현장 리포트를 시작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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