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무로에서] 1987년 이병철 회장, 2022년 K칩스법

최승진 기자(sjchoi@mk.co.kr) 2022. 12. 26. 17:12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드라마 '재벌집 막내아들'에는 실화를 모티브로 한 장면이 자주 등장한다. 화제를 모았던 몇몇 장면에서는 삼성 창업주 고(故) 이병철 회장의 모습이 오버랩되곤 했다. 기업 경영에 있어 시대를 앞선 결정을 내리는 장면은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회자됐다. 이처럼 한국 현대 경제사에는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 같은 장면들이 많다.

이 회장은 1987년 타계했다. 그해에 그는 한국 반도체 산업을 바꾼 두 가지 결정을 내린다. 첫 번째는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 3라인 착공이다. 당시는 세계적인 D램 가격 하락으로 공장 1·2라인조차 제대로 돌리기 힘겨웠던 때였다. 이 회장은 미국과 일본의 반도체 분쟁으로 기회가 올 것이라 예측했다. 3라인 준공을 기점으로 삼성전자는 글로벌 반도체 선두 기업으로 본격 도약한다.

두 번째는 삼성종합기술원 설립이다. 삼성종합기술원은 이 회장이 생전에 마지막으로 설립한 조직이기도 하다. 기술과 인재에 대한 그의 염원에 따른 것이다. 연구소 곳곳에는 '무한탐구(無限探求)'라는 그의 휘호가 걸려 있었다고 전해진다. 삼성종합기술원장을 지낸 임형규 전 삼성전자 사장은 최근 양향자 의원과 함께 펴낸 책 '히든 히어로스'에서 "처음에는 생소했으나, 그 네 글자가 반도체 사업의 성공 방정식이라는 사실을 그의 사후에 점점 더 명확하게 느끼게 됐다"고 적었다.

1987년 당시와 2022년 현재는 공통점이 많다. 미국과 중국 간 기술 패권 전쟁이 고조된 가운데 각국이 반도체 공급망 재편을 두고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다. 글로벌 시장에 몰아닥친 '반도체 한파'에 기업들은 움츠러들고 있다. 그렇기에 이 회장의 '성공 공식'인 과감한 투자와 기술 인재 양성은 유효한 해법이 될 수 있다. 양 의원이 대표발의한 'K칩스법' 역시 이 공식에 충실했다. 투자 기반을 조성하고 인재를 양성하는 방안들을 법안에 담았다.

그러나 국회 심사 과정에서 인재 육성의 '핵심'으로 꼽히는 수도권 대학 정원 확대 조항이 삭제됐다. 반도체 설비투자에 대한 대기업 세액공제는 20%에서 8%로 후퇴했다. 반도체 산업의 성공 방정식이 지역 논리와 반기업 정서라는 정치적 계산으로 왜곡된 셈이다.

반도체 전문가들은 해외 각국의 파격적인 인센티브가 반도체 산업 지형을 완전히 바꿔놓을 것이라 입을 모은다. "가장 두려운 경쟁 상대는 미국"이라는 말도 나온다. 우리가 1987년의 이 회장을 기억하듯, 역사는 K칩스법을 퇴행시킨 2022년의 국회를 기억하게 될 것이다.

[최승진 산업부 차장대우]

Copyright © 매일경제 & mk.co.kr.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