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제징용 피해자들 “日 사과 없이 한국 기업이 배상?… 외교 참사”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정부가 ‘병존적 채무인수’를 추진 중이라며 강하게 반대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병존적 채무인수는 일본 가해 기업이 아닌 한국 기업의 기부로 배상금을 대신 변제하는 방안이다.

지난 2018년 대법원으로부터 배상 확정판결을 받은 강제징용 피해자 측 법률대리인단과 지원단체는 26일 오후 서울과 광주에서 동시 기자회견을 열고 “피해자 측은 일본 피고 기업의 참여와 사죄가 보장되지 않은 이런 방안에 대해 강하게 반대한다”고 밝혔다.

26일 광주 서구 광주광역시의회 시민 소통실에서 강제 동원 피해자인 양금덕 할머니와 일제 강제 동원시민모임, 소송대리인 등이 기자회견을 열고 강제 동원 문제에 대한 한국 정부의 유력안에 대해 반대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들은 “지난주 외교부 측으로부터 강제동원 문제에 대한 한국 정부의 유력한 안을 청취했다”며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이하 지원재단)이 한국 기업들의 기부로 재원을 마련해 확정판결을 받은 피해자들에게 변제한다는 내용이라고 전했다.

이어 이 방안에 “강하게 반대한다”며 “미쓰비시중공업이나 일본제철과 같은 일본 피고 기업의 사죄나 출연이 없을 뿐만 아니라 일본 다른 기업들의 출연조차 없는, 말 그대로 일본을 면책시켜주는 방안”이라고 비판했다. 이들은 “외교부 측은 지원재단이 한국 기업들의 재원으로 피해자에게 변제를 하기 시작하면, 그 이후에 (피고 기업을 제외한) 일본 기업의 자발적 참여나 일본 정부의 유감 표명을 기대할 수 있다는 입장이나, 배상 책임이 있는 피고 기업이 빠진 해법은 애초 논의할 가치조차 없다”고 강조했다. 이런 해결안은 일본 정부가 일관되게 주장해 온 ‘한국이 해결하라’는 요구가 그대로 관철된 “0대 100의 외교적 패배이자 참사”라고도 지적했다.

피해자 측은 일본 피고 기업의 직접 배상이 아닌 대안적 변제 방식을 택하더라도 재원 조성에는 상징적 액수로나마 피고 기업이 참여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대리인단에 참여하는 임재성 변호사는 “피고 기업의 유감 표명을 포함한 사과가있어야 한다. 또 제3자가 재원을 만든다 하더라도 단돈 100원이라도 피고 기업이 참여해야 한다는 것”이라며 이것이 피해자 측 요구의 ‘최대 공약수’라고 거듭 강조했다.

26일 광주 서구 광주광역시의회 시민 소통실에서 강제 동원 피해자인 양금덕 할머니와 일제 강제 동원시민모임, 소송대리인 등이 기자회견을 열고 강제 동원 문제에 대한 한국 정부의 유력안에 대해 반대하고 있다. 연합뉴스

그러나 강제동원 문제가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으로 해결됐다는 입장을 고수하는 일본 측은 결국 현재로선 피해자가 만족할 수준의 호응 조치를 받아들이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임 변호사는 “(우리 측이 계속) 피고 기업 참여나 사과를 (요구)한다면 더 전진할 수 있는 것은 없어 보이며 일단 한국 쪽에서 시작하는 게 유력 안이라고 (정부 측으로부터) 통보받았다”고 설명했다.

피해자 측은 이런 방안이 “강제동원 피해자들을 위해 설립하고 운용되고 있는 지원재단을 그 설립 취지와 목적과는 전혀 다르게 운용하려는 방안으로서 부당하다”고도 밝혔다.

이들은 한국 정부 유력안에 따른다면 “지원재단은 피해자들의 의사에 반해 피해자들의 채권을 소멸시키고 강제집행 절차를 중지시키기 위해 법원에 공탁서 등을 제출하는 역할을 할 것”이라며 피해자들은 자신들을 지원하고자 설립된 재단과 싸우게되는 상황을 맞게 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그러면서 “한국 정부가 위 유력안을 최종안으로 확정해 발표하는 어리석은 일은부디 없어야 할 것”이라고 거듭 강조했다.

지원재단은 피해자들에 대한 변제를 대신 수행할 수 있도록 정관에 근거 조항을 추가하는 방안을 추진 중인 것으로 알려졌지만, 회견에 참석한 김세은 변호사는 “피해자에게 폭력적인 방식으로 운영된다면 설립 취지에 반한다”고 주장했다.

26일 광주 서구 광주광역시의회 시민 소통실에서 강제 동원 피해자인 양금덕 할머니와 일제 강제 동원시민모임, 소송대리인 등이 기자회견을 열고 강제 동원 문제에 대한 한국 정부의 유력안에 대해 반대하고 있다. 연합뉴스

김영환 민족문제연구소 대외협력실장은 그간 정부의 목표가 “어떻게든 채권을 소멸시키는 데 집중돼 있었다고 판단한다”며 “피해자들의 동의 없이 어떻게 현금화를 막을 수 있느냐에 협의 과정이 집중돼 있었다”고 비판했다.

광주 회견에 참석한 강제동원 피해자 양금덕 할머니는 “지지 말고 일본한테 사죄받기를 노력하자. 일본한테 절대 지지 말고 기어이 끝까지 해보자”고 목소리를 높였다.

외교부는 일본제철, 미쓰비시중공업 등 가해 기업을 대신해 제 3자가 강제징용 피해자들에게 금전을 지급하는 ‘병존적 채무인수’ 방식에 대해 아직 최종 결정된 것은 아니라는 입장이다.

이날 도쿄에서는 해당 현안을 논의하는 국장급 협의가 개최됐다. 서민정 외교부 아시아태평양국장과 후나코시 다케히로 일본 외무성 아시아대양주국장이 협의에 참석했다.

외교부는 “이번 국장 협의는 양 정상간 합의에 따라 조속한 현안 해결 및 관계 개선을 위해 외교당국간 긴밀한 협의를 가속화해 나가는 차원”이라며 “이번 협의에서 양 국장은 강제징용 문제 등 한일간 현안 및 상호 관심사에 대해 의견을 교환했다”고 전했다.

김희원 기자 azahoit@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