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산 늑장처리·민생입법 지연… 극한 대치 속 일 안하는 국회 [뉴스+]
국회가 여야간 극심한 대치 속에 예산안 처리와 입법이라는 본연의 임무를 방기했다는 비판이 일고 있다.
여야는 헌법이 규정한 예산안 처리 시점(12월2일)을 넘기는 ‘늑장 처리’에 이어 28일 올해 마지막 본회의를 앞둔 시점에서도 주요 민생법안 및 국가 재정 관리 규칙 처리를 하지 못하고 있다. 조그만한 쟁점을 둘러싼 대치 격화로 정작 중요한 법안·예산안 심의는 늦어지거나 졸속으로 이뤄지는 일들이 해마다 반복되면서 정치 불신이 커지고 있다.
26일 국회와 기획재정부 등에 따르면, 국가재정의 총량을 통제·관리하는 재정준칙의 연내 도입이 사실상 무산됐다. 국회 기획재정위원장인 국민의힘 박대출 의원이 지난 9월 대표 발의한 국가재정법 개정안은 법안 통과의 첫 단계인 기재위 경제재정소위도 통과하지 못했다. 2020년 12월 문재인정부 당시 발의한 국가재정법 개정안 역시 같은 단계에 머물러 있다. 기재위 관계자는 통화에서 “두 법안 모두 이달 5일 열린 소위에서 심사 안건으로 올라오긴 했지만, 상대적으로 후순위로 밀려 시간 관계상 논의되지 못했다”고 전했다.
정부의 재정준칙은 국내총생산(GDP) 대비 관리재정수지 적자 비율을 3% 이내로 관리하되 GDP 대비 국가채무비율이 60%를 초과할 경우 관리재정수지 적자 비율을 2% 이내로 더욱 엄격히 통제하는 것을 골자로 한다. 지난 5년 사이 국가채무가 400조원 이상 증가하고, 국제 신용평가사 등에서 한국의 재정전망에 대해 경계감을 표시한 데다 저출산·고령화로 중장기 재정전망도 불투명해지고 있는 만큼 정부는 재정준칙 도입 논의를 촉구했지만 국회는 응답하지 않았다. 정부가 최근 내년 경제성장률을 1.6%로 하향 조정하면서 내년 국가채무는 1134조4000억원에 달할 것으로 전망돼 GDP 대비 국가채무비율(50.4%)도 절반을 넘길 것으로 전망된다.
김우철 서울시립대 세무학과 교수는 “올해 하반기 내내 금융위기 확대 가능성이 논의됐는데 내년에는 금융위기에 이어 코로나19로 생긴 각 국가의 부채 탓에 재정위기가 더 큰 화두가 될 수 있다”면서 “올해 정부가 재정준칙 도입을 선언한 점이 고려돼 국제 신용평가기관의 신용등급 평가에서 선방한 측면이 있는데, 내년에 재정준칙 법안 논의가 안 되고 국회 입법 여부도 불투명해질 경우 오히려 부정적인 평가를 받을 수 있다”고 우려했다.
국회에선 여야가 각각 최우선 처리 대상으로 꼽은 민생 법안도 연내 처리가 어려워지고 있다. 더불어민주당은 일명 ‘노란봉투법’ 등 7대 민생 법안을 발표하며 정기국회 내 처리를 공언했으나 대다수 법안이 상임위에 계류 중이다. 국민의힘이 내세운 ‘반도체특별법’ 등 10대 민생 법안도 마찬가지다.
여야가 양당 정책위의장과 원내수석부대표, 행정안전위원회 간사로 구성된 ‘3+3 정책협의체’를 구성해 올해 안에 본회의를 통과시키겠다고 공언한 이른바 ‘공공기관 알박기 방지법’도 논의가 진전되지 못하고 있다.
지난 24일 통과된 예산안에 대해서는 여야는 물론, 합의한 기재부도 졸속심의를 했다는 비판까지 나온다. 국회는 기재부와의 합의 끝에 반도체 시설 투자에 대한 대기업 세액 공제율을 현행 6%에서 8%로 높이는 조세특례제한법 개정안을 통과했는데 ‘20% 공제’였던 여당 원안에서 후퇴했다. 이에 국민의힘 반도체특위 민간위원들과 관련학회는 공동성명을 통해 “한국 반도체기업의 국제경쟁력을 심각하게 저하시킬 수밖에 없다. 한국 반도체산업의 미래를 단절시키는 것이고 후배들에게 희망고문을 주는 것”이라며 재논의를 요청했다.
지난해 10월 스토킹범죄의처벌등에관한법률(스토킹처벌법)이 제정됐지만, 피해자를 지원할 근거법은 1년 넘게 공백 상태다. 스토킹처벌법 시행 후 스토킹 범죄 신고 건수가 늘고 피해를 호소하는 이들도 많아졌으나 정작 이들에 대한 지원법이 없는 것이다.
지난 9월 ‘신당역 스토킹 살인사건’ 이후 스토킹 피해자에 대한 국가의 지원 의무를 강화하는 법안(스토킹피해자보호법)이 국회 여성가족위원회를 통과했으나 법무부가 일부 조항 삭제를 요구해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심사 안건으로 상정되지 못했다. 법무부는 수사기관이 사건 담당자 등 업무 관련자를 대상으로 스토킹 예방·방지 교육을 하도록 의무화한 규정을 문제 삼고 있다. 스토킹처벌법에도 스토킹 전담 검사 등에게 수사 절차 등을 교육하도록 하는 규정이 있어 중복된다는 이유다.
지원법이 없다 보니 피해자 보호는 미흡할 수밖에 없다는 지적이 나온다. 여성가족부는 현재 가정폭력·성폭력 피해자 지원기관을 통해 스토킹 피해자를 돕고 있다. 스토킹 피해자 지원에 대한 별도 통계조차도 없다.
의료인 면허 결격 사유를 확대하는 내용을 담은 의료법 개정안은 지난해 2월 국회 보건복지위원회를 통과했으나 2년 가까이 계류 중이다. 현행 의료법은 의사면서 결격 사유에 △정신질환자 △마약·대마·향정신성의약품 중독자 △의료 관련 법령을 위반해 금고 이상 형을 처벌받은 자 등만 규정하고 있어 성범죄로 처벌을 받아도 면허가 취소되지 않는다. 성범죄 의료인의 경우 자격정지만 가능하지만, 이마저도 강간·강제추행 등으로 제한돼 최근 늘어나는 불법촬영 등의 성범죄는 적용되지 않는다. 이 때문에 성범죄로 처벌되고도 의료행위를 계속하는 의료진이 많다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개정안은 범죄 구분 없이 금고 이상의 형을 선고받은 경우 의료인의 면허를 취소하도록 자격 요건을 강화했다. 의료계에서는 성범죄 등에 대한 처벌 강화 필요성에는 공감하면서도, 현재 계류 중인 의료법 개정안은 교통사고 등으로도 의사면허가 정지될 수 있다며 반발하는 상황이다.
요양기관의 건강보험증 확인을 의무화하는 국민건강보험법 개정안도 1년 넘게 계류 중이다. 지난해 10월 발의된 이 법은 의료기관이 건강보험증 등을 통해 본인 여부·자격을 확인할 의무를 명시하고, 이를 위반하면 과태료 등을 부과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건강보험 자격이 없는 사람이 타인 명의를 도용해 진료를 받는 사례가 많아 건강보험 재정 누수를 막는다는 취지다. 보건복지부는 미성년자와 응급환자, 재진 환자 등에 대해서는 본인확인을 하지 않아도 되도록 해 부담을 최소화하겠다는 입장이지만, 의료계는 의료기관의 업무부담이 커질 것이라며 반발하고 있다.
이도형·김주영·김유나 기자, 세종=이희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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