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경포럼] "팩트로는 상대를 절대 설득 못한다"
선의라고 했다
그 선의를 인정해야
상대는 그 길을 멈춘다
사실, 즉 팩트(fact)로는 상대방을 절대 설득할 수 없다고 한다. 철학자 피터 버고지언은 "상대방에게 팩트를 제시하면 의견을 바꾸리라 생각하기 쉽지만, 그런 일은 거의 절대 일어나지 않는다"고 했다. 내년 예산안 협상의 최대 쟁점이었던 법인세 논쟁을 보면 틀린 말도 아니다. 정부·여당은 법인세 최고세율을 25%에서 22%로 낮추자면서 '팩트 폭격'을 했다. 경제협력개발기구 38개국 중 한국의 법인세율이 7번째로 높고, 선진국은 세율을 계속 인하했는데 한국만 민주당 정권에서 3%포인트를 올렸다고 했다. 법인세를 낮추면 기업 투자와 고용이 늘어난다는 해외 석학의 연구 결과까지 제시했다. 그러나 더불어민주당은 재벌 특혜라고 반대했다. 여야는 법인세를 구간별로 1%포인트씩 낮추는 선에서 타협했으나 시한에 쫓겨 합의했을 뿐이라고 했다. 상대 논리에 좁쌀 한 톨만큼도 설득당하지 않았다.
버고지언은 팩트를 제시하면 설득은커녕 역효과만 난다고 했다. 상대는 자기 믿음을 지켜야 한다는 '방어 의식'을 느낄 뿐이고 자신에게 유리한 근거만 취사선택하게 된다. 이는 스스로를 '좋은 사람'으로 인식하고자 하는 인간의 본능 탓이다. 예를 들어 1950년대 영국 의사 앨리스 스튜어트는 임신부가 X선 촬영을 하면 배 속 아이가 출생 후 소아암에 걸릴 확률이 높아진다는 팩트를 발견했다. 관련 데이터와 근거도 모두 공개했다. 그러나 이 팩트가 의학계에서 수용되는 데 25년이나 걸렸다. 의사들이 스스로를 '괜찮은 의사'로 인식하고 싶어했기 때문이다. 자신들의 X선 촬영 탓에 암이 발생했다면 그런 인식은 불가능해진다.
법인세 논란도 다르지 않다. 정부 주장이 맞는다면 민주당 정권은 법인세를 올려 투자와 고용을 줄인 '나쁜 정권'이 된다. 당연히 민주당은 이게 싫다. 반대 근거를 찾게 되는데 전혀 어렵지가 않다. 명확한 진실이라고 해도 100% 의견 일치란 세상에 없기 때문이다. 과학적 외피를 쓴 반대 근거는 꼭 있다. 민주당은 이런 주장을 접할 때마다 자신들이 옳다고 안도했을 것이다.
'블랙 스완'의 저자 나심 탈레브 역시 "말로는 누군가를 온전히 설득할 수 없다"고 했다. 오로지 현실만이 그렇게 할 수 있다고 했다. 현실에서 깨져봐야 자신이 틀렸다는 것을 인정하고 설득당한다는 뜻이다. 민주당이 다주택자에 대한 종합부동산세를 낮추자는 정부 주장에 동의한 게 딱 그런 경우다. 과도한 종부세 때문에 민주당이 '대통령 선거라는 현실'에서 무참히 깨진 결과다. 민주당이 차기 총선에서 진다면 법인세를 비롯한 다른 이슈에서도 설득당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민주당을 보면 그 전까지는 어떤 설득도 불가능해 보인다.
이래서는 나라에 불행이다. 선거로 승부를 보기 전까지 여야가 극한 대치를 계속할 것이기 때문이다. 나라가 제대로 굴러가려면 여당은 설득의 지혜를 발휘하고, 야당은 설득당하는 용기를 내야 한다. 이를 위해 버고지언은 상대의 선의를 인정하자고 제안한다. 비록 상대의 주장이 공동체에 손해가 된다고 해도 선의에서 비롯됐음을 인정하자는 것이다. 물론 쉽지는 않다. 종부세로 집값을 폭등시킨 민주당 정권의 선의를 인정하자니 속이 불편하다. '투기 수요 억제'라는 선의를 인정한다고 해도 '지옥으로 가는 길을 내는 건 선의'라는 격언이 옳다는 증거로 보인다. 하지만 공동체를 생각한다면 지옥행 길을 막는 게 최우선이다. "네가 하려는 일은 선의에서 비롯됐음을 알아. 그러니 너는 괜찮은 사람이야. 그리고 나는 네 논리도 이해해"라고 말할 수 있어야 설득이 가능하다. 그저 "너는 나라에 해를 끼치고 있어"라며 상대를 악마화한다면 그는 계속해서 지옥행 길을 팔 것이다. 자신이 악마임을 인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신이 이해받고 있다고 느낄 때 비로소 설득이 된다.
[김인수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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