깃발처럼 펄럭이는 인생을 기다리며…
회화의 한계 고민하다가
소설 쓴 후 주인공들 그려
16세기 연극 같은 신작 등
내년 2월 5일까지 전시
갤러리 안으로 무대가 들어왔다. 어두운 조명 아래 음악이 흐르는 객석에는 의자 2개가 놓였다. 암막 앞에는 9명의 배우가 도열했다. 토끼(카피타노), 고양이(브리겔라), 여우(알레치노) 등 9마리 동물 가면을 쓴 초상화는 16~18세기 이탈리아에서 성행한 가면 즉흥극 코메디아델라르테의 배우들.
하층 계급이 지배 계급을 골탕 먹이고 풍자하는 이 극이 21세기 전시 속으로 들어왔다. '서커스와 광대의 화가' 박민준(51)의 '콤메디아 델라르테(Commedia dell'Arte)' 연작은 눈과 귀로 함께 즐겨야 하는 작품이다. 광대의 예술사적 기원을 추적하다 만난 이 르네상스 시대 연극은 그를 사로잡았다. 배우들의 복식과 성격을 재해석해 그림으로 그려 무대에 걸었다.
직접 쓴 대본에는 욕망과 거짓말, 사랑과 죽음까지 아우르는 배우의 목소리도 담겼다. 소설을 쓰고, 그 인물을 그리던 작가가 한발 더 나아가 직접 무대 연출가가 된 셈이다. 몰입도를 높이려 객석 뒤로는 공간 펜스까지 쳤다.
그의 세계관 속에선 이미지와 텍스트가 함께 어울려 난장을 벌인다. 작가는 "과거에는 그림을 그리고 소설을 썼는데, 이번에는 글과 그림을 동시에 작업했다. 9명의 캐릭터마다 제 성격의 일부가 들어가 있다"고 말했다.
갤러리현대에서 박민준의 'X'가 내년 2월 5일까지 열린다. 개막일인 21일 만난 작가는 "10번째 개인전이기도 하고, 모호한 의미를 담고 싶어 'X'라는 로마자를 주제로 정했다"면서 "지하 1층은 블랙코미디, 2층 안쪽방은 숭고미를 느끼게 했고, 2층 전시장은 모든 인물이 한자리에서 만나도록 했다"고 연출 의도를 설명했다.
그는 추상미술의 시대에 보기 드문, 고전적인 유채 화법으로 사실적이고 아름다운 도상을 그려내는 작가다. 2010년대 중반부터 서구 신화를 주제로 삼는 방식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픽션을 쓰기 시작했다.
천재 곡예사 형과 평범한 동생 라푸를 중심으로 서커스 단원들을 그려낸 소설 '라포르 서커스'(2018)를 쓰고 소설 속 이야기를 그려낸 동명의 전시를 4년 전 열었다.
미술사학자 알리자린이 600년 전 활동한 화가 사피에르 최후의 작품을 추적하는 소설 '두 개의 깃발'(2020)의 인물을 그린 연작도 함께 이번 전시에 선보이고, 'X'와 '콤메디아 델라르테' 연작도 걸었다.
1층 전시장에선 기이하고 낯선 느낌이 먼저 든다. 노란색 벽에는 상상의 회화가 걸렸다. 올해 작업한 'X' 연작은 실재의 풍경에 상상이 스며든 혼종의 회화다.
작가는 "회화의 한계에 대한 고민을 하다 'X'에 어울리는 모호한 그림을 그려봤다. 잘 그리지 않았던 풍경화, 정물화를 그렸는데, 실제로 방문했던 이탈리아 왕궁에 아테나 대신 다른 조각을 그리거나 센트럴파크에 줄타기 서커스를 하는 인물을 그려 나만의 공간으로 만들었다"고 설명했다. 채색된 목각 손, 사슴 뼈, 고양이, 러시아 인형 마트료시카 등은 퍼즐처럼 하나씩 그려지거나, 한 화면에 모여 연작의 세계관을 만들어낸다.
전시의 대단원은 나란히 천장에 걸린 '신념의 탑'과 '영원의 탑'이다. '두 개의 깃발' 속 사피에르가 완성한 최후의 작품은 소멸돼 사라지지만, 관람객들만 만날 수 있게 됐다. 사피에르의 최후의 걸작은 결국 아인이란 인물을 창조한다. 이 모습이 성당의 제단화처럼 표현됐다. 작가는 "소설 제목처럼 작품이 깃발처럼 걸렸으면 했다. 작업이 외롭고 고독하다 생각했는데 이번 전시에서 많은 분의 도움을 받으며 색다른 경험을 했다"고 했다.
[김슬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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