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픽처] 두 편의 '영웅'과 한 명의 안중근
[SBS 연예뉴스 | 김지혜 기자] 영화 '영웅'(감독 윤제균)은 칼바람을 헤치며 설원을 걷는 한 남자의 모습으로 시작된다. 지친 몸을 이끌고 황량한 벌판을 걷던 사내는 눈밭에 무릎을 꿇는다. 이때 화면은 물 흐르듯 전환돼 11명의 사내들이 그의 뒤에 정렬해 앉는다. 그리고 한 남자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흐른다.
"내 조국의 하늘 아래서 살아갈 그날을 위해
수많은 동지들이 타국의 태양 아래 싸우다
자작나무 숲으로 사라졌습니다.
그들의 간절했던 염원이 하늘을 감동시킬 수 있도록
뜨거운 조국애와 간절함을 담아
저 안중근, 이 한 손가락, 조국을 위해 바치겠습니다."
오프닝을 연 사내의 이름은 안중근(1879~1910). 조선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해 사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조선 독립군의 대장이다.
스크린을 뜨겁게 채운 목소리와 노랫말에는 안중근 의사가 1909년 항일투사 11명과 동의단지회를 결성하고 왼손 넷째 손가락의 첫 관절을 잘라 혈서로 대한독립이라 쓰며 독립운동에의 헌신을 다짐한 '단지동맹'(정천동맹)의 이야기가 담겼다.
영화는 4개의 괘 자리에 '대한독립'이라 쓴 태극기를 클로즈업하면서 문을 연다. '충무로 대표 흥행 감독' 윤제균의 첫 뮤지컬 영화이자, 뮤지컬 배우 정성화의 필생의 역작 '영웅'의 장엄한 시작이다.
'영웅'은 1909년 10월,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뒤 일본 법정의 사형 판결을 받고 순국한 안중근 의사가 거사를 준비하던 때부터 죽음을 맞이하던 순간까지, 잊을 수 없는 마지막 1년을 그린 영화. 정성화, 김고은, 나문희, 박진주, 조재윤, 배정남, 이현우가 주연을 맡았다.
누구나 아는 인물이지만, 자세히는 알지 못하는 안중근과 그의 독립운동 이야기가 영화라는 매체와 노래라는 강력한 도구와 만나 재탄생했다.
◆ '뮤지컬 영화'로서의 성취…현장 라이브는 옳았다
뮤지컬 영화는 장르물이 발전한 한국 영화계에서 불모지로 여겨온 분야다. '레미제라블', '보헤미안 랩소디', '라라랜드', '알라딘' 등 할리우드의 뮤지컬 영화들은 국내에서 기록적인 흥행 성적을 거뒀지만, 우리 관객들은 뮤지컬이 (한국) 영화와 결합하는 것을 유독 낯설게 여겨왔다. 그러다 보니 시도도 적었고, 성취도 미약했다.
'영웅'은 이제껏 만들어진 한국의 뮤지컬 영화 중 만듦새가 가장 좋다. 종전 한국 뮤지컬 영화들은 극연기와 노래 연결이 유기적이지 못했다. '자, 이제 우리 노래 합니다'라고 알리듯 거창한 분위기를 만든 뒤, 어색하게 노래가 시작돼 감정을 흐트러뜨리기 일쑤였다. 무대 구성 역시 군무에 의존해 인도식 뮤지컬 영화를 연상케 했다. 여기에 어색하게 따라붙는 부감샷도 영화적 연출과는 맞지 않았다.
윤제균 감독은 연기와 노래가 겉도는 종전 한국 뮤지컬 영화의 시행착오를 극복하기 위해 현장 라이브 녹음을 선택했다. 배우들은 후시녹음을 염두에 두고 싱크만 맞추는 수준의 읊조림이 아닌 실제 공연처럼 모든 장면에서 노래를 불렀다. 연기의 연장선상에서 노래를 부르기에 표정과 감정이 풍성하게 살아났다.
또한 공연 무대에서는 가깝게 볼 수 없던 배우의 얼굴이 카메라의 클로즈업 기능에 의해 밀도 높게 잡혔다. 군중신에서 이어지는 카메라 워킹 역시 종전 작품들과는 다른 수준의 업그레이드를 보여줬다.
물론 노래를 부를 때 인물들의 동작이 '멈춤'하고, 대사가 노래로 전이될 때 생기는 '지연의 순간'은 보는 사람에 따라 어색할 수는 있다. 신의 구성을 꽉 채워 가창 장면에서 전혀 '공백'을 느낄 수 없게 한 할리우드의 수준에는 아직 미치지 못한다는 것은 감안해야 할 부분이다.
◆ '시네마'로서의 아쉬움…뮤지컬에 발목 잡힌 개연성
'영웅'을 연출한 윤제균 감독은 뮤지컬을 영화로 옮기는 과정에서 '절반의 익숙함과 절반의 새로움'을 추구했다고 밝혔다. 즉, 뮤지컬의 얼개를 유지하되 캐릭터를 보다 입체화하고, 장면에 살을 붙여 영화적인 볼거리와 극적인 감동을 배가하고자 했다.
결과적으로 '뮤지컬 영화'로서 유의미한 성취를 거뒀지만, '시네마'로서의 매력은 아쉬움이 남는다. 뮤지컬 구성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것이 발목을 잡은 것으로 보인다.
뮤지컬에서 음악(노래)은 곧 스토리다. 음악이 곧 신의 구성이고, 노랫말이 곧 대사가 된다. 그래서 뮤지컬을 영화화할 때 극영화의 각색만큼 허용범위가 넓지 못하다. 물론 주요 넘버를 유지하면서 창작곡의 투입을 통해 서사를 변형하거나 확장하는 방법도 있다. 그러나 유명 뮤지컬일수록 변형의 폭은 좁을 수밖에 없다.
영화 '영웅'은 뮤지컬 넘버 전체 31곡 중 16곡을 사용했다. 여기에 황상준 음악감독이 영화를 위해 새롭게 작곡하고, 윤제균 감독이 직접 가사를 쓴 '그대 향한 나의 꿈'이 추가 됐다. 설희(김고은)가 이토 히로부미가 부르는 '이토의 야망'에 이어 답가처럼 강단 있게 부르는 노래다.
윤제균 감독은 2막 31장의 뮤지컬 구성을 영화로 압축하고 변형하면서도 '단지동맹'-'이토의 야망'-'당신을 기억합니다, 황후마마여'-'배고픈 청춘이여'-'그날을 기억하며'-'오늘의 이 함성이'-'사랑이라 믿어도 될까요'-'내 마음 왜 이럴까'-'십자가 앞에서'-'누가 죄인인가'-'사랑하는 내 아들, 도마'-'장부가' 등의 노래들을 스토리의 기본 토대로 삼고 신과 시퀀스를 완성했다.
영화의 큰 구성을 뮤지컬과 유사하게 갔기에 뮤지컬의 약점으로 지적되어온 개연성 부족도 함께 따라왔다. 1년이라는 한정된 시간, 안중근의 주요 동선을 따라 인물이 등장하고 빠지는 식으로 구성이 돼있다 보니 행동의 동기나 인물 간의 관계가 디테일하게 설명되지 못한다. 설희의 경우 첩보원이 되는 서사에 '명성황후 시해 사건'을 구체적으로 묘사하며 개연성을 부여했다고는 하지만, 이 장면은 보는 이에 따라 호불호가 크게 갈릴 수 있다.
뮤지컬에서의 관객 허용도와 영화에서의 관객 허용도는 다르다. 뮤지컬의 경우 라이브 공연이 주는 감동이 압도적으로 크기에 이야기의 약점이 희석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영화의 경우 스토리의 개연성이 관람 내내 관객의 몰입도와 공감, 만족감에 결정적인 작용을 한다.
'영웅'을 본 여러 관객들이 영화에서 맥락 없이 등장하는 코미디 장면을 감독의 개그 욕심으로 생각하겠지만, 이는 뮤지컬에서도 주요하게 사용하는 장치다. 묵직한 주제의식과 비장한 이야기 전개에 있어 쉬어가는 구간으로 활용한다. 그러나 영화로만 이 작품을 접한 관객에게 이른바 '만두 신'으로 대표되는 '배고픈 청춘이여' 파트와 감독이 새롭게 추가한 몇몇 개그 장면들은 감동을 축적하고 있는 와중에 끼얹는 찬물처럼 여겨질 수도 있다.
◆ '안중근 그 자체' 였던 정성화, 그리고 나문희의 조마리아
'영웅'이라는 제목을 나눠 쓰는 한 편의 뮤지컬과 한 편의 영화는 현재 공연장과 극장에서 동시에 만나볼 수 있다. 각기 다른 두 매체를 연결하는 건 정성화라는 공통분모다.
정성화에게 안중근은 분신과 같은 캐릭터다. 코미디언으로 데뷔해 배우로 변신한 정성화에게 '영웅'의 안중근은 인생 캐릭터라 할 만하다. 2009년 뮤지컬 '영웅'의 초연부터 10여 년 간 총 8차례 '영웅'의 타이틀롤을 맡아 무대에서 영혼을 불태웠다. 이 작품으로 뮤지컬 배우로서 받을 수 있는 모든 상을 다 휩쓸고, 무대에 서는 모든 배우들이 꿈꾼다는 "유일무이 캐스트"라는 극찬을 '안중근'이라는 캐릭터로 이뤄냈다.
뮤지컬 캐스트를 영화의 주인공으로 기용한 건 해외 영화계에서도 보기 드문 시도다. 그건 두 매체의 차이가 극명하고, 배우가 각각의 매체에서 보여줄 수 있는 역량도 크게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화 '영웅'의 정성화는 왜 자신이 대체불가의 배우인지를 연기와 노래로 보여준다. 후반부에 등장하는 '누가 죄인인가'의 박진감 넘치는 가창과 엔딩을 장식하는 '장부가'에서 보여준 거룩한 연기는 그 시대를 겪어보지 않은 이들을 역사의 현장으로 단숨에 안내한다.
누군가는 이 영화의 최대 약점을 '캐스팅'이라고 꼽겠지만, 영화를 보고 나면 정성화의 안중근을 대체할 캐스팅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하게 된다.
정성화는 지난 10여 년간 수 백 번은 불렀을 노래와 연기를 영화에 맞춰 재디자인했고, 얼굴 깊숙이 들어오는 카메라를 위해 절제의 연기를 완성했다. 또한 이 영화를 위해 체중을 약 14kg 감량했고, 촬영을 모두 마친 후 두 차례나 진행된 재촬영을 위해 살을 찌웠다 빼기를 반복했다. 그렇게 뮤지컬을 넘어 영화에서도 정성화의 '영웅'을 아로새겼다.
또한 이 영화에는 한 명의 영웅이 더 등장한다. 안중근의 어머니인 조마리아다. 나문희가 연기한 조마리아 여사는 아들에게 "나라를 위해 떳떳하게 죽어라"라고 일제의 사형 선고에 대한 항소를 포기시킨다.
역사에도 기록된 담대한 편지글을 보며 관객이 끝내 울 수밖에 없는 건 어미의 진심을 담은 노랫말의 등장 때문이다.
"모자의 인연 짧고 가혹했으나 너는 영원한 내 아들. 한 번만 단 한 번만이라도 너를 안아봤으면. 너를 지금 이 두 팔로 안고 싶구나."
조마리아 여사를 연기한 나문희는 아들을 향한 그리움과 이별의 두려움을 매끈한 가창력이 아닌 흐느낌으로 표현한다. 감정을 꾹꾹 눌러가며 아들과의 이별을 준비하던 어미는 노래 말미에 자식을 먼저 보내야 하는 애통함을 목놓아 표현한다. 이 장면에서 눈물을 참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이는 윤제균 감독이 뮤지컬을 보며 영화화를 결심했다는 장면이기도 하다. 원작의 담백한 연출과 달리 윤제균 감독은 이 장면을 향해 달려온 것처럼 연출했다. 그 영화적 효과는 기술의 힘이 아닌 배우의 관록과 내공에 의해 완성됐다.
영화 '영웅'은 정성화로 시작해 나문희로 마무리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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