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세한 『난쏘공』의 조세희 "우린 모두 난쟁이들⋯ 그럼에도, 절망에 빠지지 마십시오. 절대로!" [김용출의 문학삼매경]

김용출 2022. 12. 26. 1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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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중이면 통금 직전까지 일을 해야 했다. 「근로기준법」만 지키면 모든 것이 잘 될 걸로 생각하고, 「근로기준법」을 공부하면서 일을 했다. 노동자 모임도 할 수 없었다. 1970년대 그땐 다른 생각을 할 여지가 전혀 없었다. 자신이 부딪힌 문제부터 해결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 내가 할 수 있는 건, 글을 쓰는 거야.

당시 문단을 주름 잡던 이문구와 박태순, 황석영의 작품들을 읽었다. 이것들만 가지고는 안 되는 뭔가가 있는데. 뭔가가. 석정남의 『불타는 눈물』이나, 유동우의 『어느 돌멩이의 외침』 같은 노동자 소설을 읽었다. 그래, 뭔가가 있어! 그는 주말이면 경인지역이나 구로동을 취재했다. 도시 빈민의 눈물과, 노동자의 땀과, 그리고 세상을 ‘견디는’ 사람들의 사랑.... 이런 것들을 놔두고 어떻게 그냥 지나치나. 정말 가만히 있을 수 없어서 글을 썼다(심재학씨의 2009년 1월 블로그 글 참고).

산업화 시대 우리 사회의 슬픈 자화상을 담은 고전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은 이렇게 태어났다고, 소설가 조세희는 2008년 11월11일 기자 간담회와 11월14일 교보생명빌딩 낭독회에서 밝혔다. 그는 그러면서 소설이 군사독재 정권의 검열을 피해 독자에게 무사히 전해지기만 바랐다고 회고했다. 소설은 문예지 『문학과지성』 1976년 겨울호에 발표됐다.

“사람들은 아버지를 난장이라고 불렀다. 사람들은 옳게 보았다. 아버지는 난장이였다. 불행하게도 사람들은 아버지를 보는 것 하나만 옳았다. 그 밖의 것들은 하나도 옳지 않았다. 나는 아버지, 어머니, 영호, 영희, 그리고 나를 포함한 다섯 식구의 모든 것을 걸고 그들이 옳지 않다는 것을 언제나 말할 수 있다. 나의 모든 것이라는 표현에는 다섯 식구의 목숨이 포함되어 있다. 천국에 사는 사람들은 지옥을 생각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우리 다섯 식구는 지옥에 살면서 천국을 생각했다. 단 하루라도 천국을 생각해보지 않은 날이 없다. 하루하루의 생활이 지겨웠기 때문이다. 우리의 생활은 전쟁과 같았다. 우리는 그 전쟁에서 날마다 지기만 했다.”

소설은 서울시 낙원구 행복동 무허가 주택에 사는 난쟁이 가족과 주변 인물들을 통해 도시 빈민의 삶과 계급 갈등을 사실적으로 묘사한다. 급격한 산업화 과정에서 재개발로 인해 행복동 판자촌에서 쫓겨나게 된 난쟁이 가족의 절망적인 모습은 우리 사회 불평등과 계급 갈등과 같은 병리적 세태를 환기했다.

“...공장은 우리에게 일방적으로 원하기만 했다. 탁한 공기와 소음 속에서 밤중까지 일을 했다. 물론 우리가 금방 죽어가는 상태는 아니었다. 그러나 작업 환경의 악조건과 흘린 땀에 못 미치는 보수가 우리의 신경을 팽팽하게 잡아당겼다. 그래서 자랄 나이에 제대로 자라지 못하는 발육 부조 현상을 우리는 나타냈다. 회사 사람들과 우리의 이해는 늘 상반되었다. 사장은 종종 불황이라는 말을 사용했다. 그와 그의 참모들은 우리에게 쓰는 여러 형태의 억압을 감추기 위해 불황이라는 말을 이용하고는 했다.”

조 작가의 이 소설은 2년 뒤인 1978년 6월 문학과지성사에서 다른 연작 소설들과 함께 묶여져 연작소설집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으로 출간됐다. 소설은 1979년 제13회 동인문학상을 수상했다.

문학평론가 김명인은 지난 25일 자신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올린 글에서 “조세희의 「난쏘공」은 ‘생각하게 만드는’ 작품이었다”면서 “1970년대의 한 노동가족의 이야기이지만 동시에 그 이야기를 고통스럽게 전하고 있는 한 작가의 분노와 부끄러움의 이야기”라고 술회했다.

“그 작품들(당시의 다른 노동소설들)이 ‘보여주는’ 작품들이었다면, 조세희의 「난쏘공」은 ‘생각하게 만드는’ 작품이었다... 「난쏘공」엔 노동자의 삶과 생각만 들어있는 것이 아니라, 그 삶과 생각을 곁에서 바라보고 같이 생각하는 작가의 아픔과 생각도 같이 들어있고, 그 두 삶과 생각이 충돌하는 지점에서 작렬하는 어떤 것이 들어있다. 분노와 부끄러움이 그것이다....「난쏘공」은 70년대의 한 노동가족의 이야기이지만, 동시에 그 이야기를 고통스럽게 전하고 있는 한 작가의 분노와 부끄러움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 소설의 더듬는 듯한 짧은 호흡은 곧 조세희 자신의 자의식의 떨림이 만든 것이었다.”

연작 소설집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의 작가 조세희가 지병으로 12월 25일 서울 강동경희대병원에서 타계했다. 향년 80세. 조 작가 아들인 조중협 도서출판 ‘이성과힘’ 대표는 이날 보도자료를 내고 “조 작가가 오늘 오후 7시쯤 지병으로 강동경희대병원에서 타계했다”고 밝혔다.

조 작가는 서라벌예대 문예창작과와 경희대 국문학과에 재학 중이던 ‘문학청년’ 시절, 가슴만 뜨거운 게 아니라 사람과 사안을 깊이 들여다볼 줄 아는 탐구자였다. 원로 소설가 이건청은 26일 자신의 SNS에 올린 글에서 “한국 문학사에 큰 업적을 남긴 그의 작품들이 오래 발견될 것을 믿으며, 세희의 후생이 밝고 따뜻하기를 빈다”고 애도한 뒤, “1961년 문학 강의실에서 그를 처음 만났다. 문청시절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는 진심을 바탕에 딛고 깊게 보는 탐구자였다”고 조 작가의 문청 시절을 회고했다.

1942년 8월 가평에서 태어난 조세희는 1965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돛대 없는 장선(葬船)」으로 등단했다. 그때 그의 나이 만 스물 셋.

경희대 대학원 국문과를 다녔던 그는 학위 과정을 수료했지만, 석사학위를 끝내 받지 못하고 교직에 나가지 못했다. 이와 관련, 해양문명사가인 주강현 제주대 석좌교수는 자신의 SNS에 조 작가를 “20세기에 손꼽힐 뛰어난 작가” “선명하고도 순수한 사람”이라고 호평한 뒤, 당시 석사학위 논문심사를 둘러싼 뒷얘기를 들려줬다.

“논문심사를 음식점에서 했습니다. 황00 서00 등이 작가를 길들이려고 못된 강요를 했지요. 그때 음식점 앞 골목에서 내게 말씀했지요. ‘주 후배. 난 못하겠다. 저런 길들임은….’ (조 작가는) 끝내 석사 과정을 이수하고도 학위 도장을 못받았지요.”

조 작가는 당시 석사 학위만 받으면 교수로 나갈 상황이었지만 교수가 되지 못했다며 “당시 이미 유명 인사였지만, ‘니가 일단 학위에 들어온 이상 충성을 보여달라’ 뭐 이런 시답잖은 길들임이었고, 선배는 이를 거부한 것”이라고, 주 석좌교수는 분석했다.

십 년 동안 작품 활동을 하지 않던 그는 1975년 「칼날」을 발표하며 다시 작가 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이어 「뫼비우스의 띠」부터 「내 그물로 오는 가시고기」,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에 이르기까지 고통 받는 소외계층 일가를 주인공으로 한 ‘난장이 연작’을 1978년 열두 편으로 마무리 짓고, 1978년 6월 연작 소설집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을 펴냈다. 조 작가는 소설집 에필로그에서 이렇게 적었다.

“서쪽 하늘이 환해지며 불꽃이 하늘로 치솟으면, 내가 우주인과 함께 혹성으로 떠난 것으로 믿어 달라. 긴 설명은 있을 수 없다. 내가 아직 알 수 없는 것은 떠나는 순간에 무엇을 대하게 될까, 하는 것뿐이다. 무엇일까? 공동묘지와 같은 침묵일까? 아닐까? 외치는 것은 언제나 죽은 사람들뿐인가? 시간이 다 되었다. 지구에 살든, 혹성에 살든 우리의 정신은 언제나 자유이다.”

소설집 『난쏘공』은 대학가 필수 도서로 꼽히는 것은 물론, 2000년대 대학수학능력시험에도 출제돼 청소년들에게도 널리 읽혔다. 1978년 출간 이후 1996년 100쇄, 2007년 100만 부, 2022년 7월 현재 320쇄 148만 부를 발행했다.

문재인 전 대통령은 SNS에 올린 글에서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을 우리 세대는 ‘난쏘공’이란 애칭으로 불렀다”며 “저를 비롯한 우리 세대는 『난쏘공』을 읽으며, 우리 사회의 불평등하고 비인간적인 모순을 직시하고, 약자들의 아픔에 공감하는 사회의식과 실천의지를 키울 수 있었다”고 회고했다. “‘난쏘공’은 산업화와 개발 시대 저임금 노동자, 도시 빈민, 철거민들의 비참한 현실과 불평등을 치열한 문제의식으로 다루면서도, 환상적이라고 할 만큼 간결하고 아름다운 문장으로 읽는 사람들에게 가슴을 찌르는 공감과 감동을 준 우리 시대 최고의 소설입니다.”

조 작가는 『난쏘공』 이후 소설집 『시간여행』(1983)과 사진 산문집인 『침묵의 뿌리』(1985)를 펴냈다. 1990년 무렵 잡지에 연재한 장편소설 『하얀 저고리』는 원고를 매만지기만 하다가 끝내 책으로 내지 않은 채 작고했다. 1997년 인문사회 비평잡지 『당대비평』을 창간했다.

2008년 『난쏘공』 30주년을 맞아 그의 문학세계를 되짚어보는 기념문집 『침묵과 사랑』이 문학평론가 권성우 등의 주도로 헌정 출간됐다. 조 작가는 이때 「작가의 말―파괴와 거짓 희망, 모멸의 시대」에서 “우리는 자라지 못하고 있다”며 “아직도 마음이 무겁기만 하다”고 토로했다.

“나의 이 ‘난장이 연작’은 발간 뒤 몇 번의 위기를 맞았었지만, 내가 처음 다짐했던 대로 ‘죽지 않고’ 살아 독자들에게 전해졌다. 이 작품은 그동안 이어져온 독자들에 의해 완성에 다가가고 있다는 것을, 나는 느낀다. 이 점만 생각하면, 나는 행복한 ‘작가’일 수도 있다. 그러나 지난 일을 이야기하며, 나는 아직도 마음이 무겁기만 하다. 혁명이 필요할 때, 우리는 혁명을 겪지 못했다. 그래서 우리는 자라지 못하고 있다. 제3세계의 많은 나라들이 경험한 그대로, 우리 땅에서도 혁명은 구체제의 작은 후퇴, 그리고 조그마한 개선들에 의해 저지되었다. 우리는 그것의 목격자이다.”

“아! 잠깐만 시간을 주세요. 마지막으로 짧게 몇 마디만 하겠습니다.” 2008년 11월 14일 교보생명빌딩에서 열렸던 기념문집 『침묵과 사랑』 헌정식 및 낭독회가 끝나갈 무렵,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사람들을 향해 외쳤다.

“절대 절망에 빠지지 마십시오. 절대 냉소주의에 빠지지 마십시오. 후배 여러분들이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을 피하지 마십시오. 현대 사회에서 모든 자본들은 사람들에게 바보가 되라고 강요합니다. 냉소주의는 사람의 기운을 빼앗아 갑니다. 절대 절망에 빠지지 마십시오. 희망을 가지고 사십시오. 전 여러분 세대에 많은 희망을 걸고 있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싸우지 않는다면 죽어서 지하에 있다가도 제가 싸우러 나올 것이다. 그런 일이 없길 바랍니다. 저는 여러분, 또 이후의 세대가 잘 되는 것을 진심으로 바랍니다.”

기념문집 발간을 주도한 문학평론가 권성우는 자신의 SNS 글에서 이때를 회상한 뒤, 조 작가의 외침은 “한국 사회의 젊은 세대를 향한 깊은 애정이자 한국 사회의 미래를 향한 절절한 부탁의 말이 아니었나 싶다”며 “어지러운 시대, 짙은 냉소와 환멸, 정치적 퇴행이 판치는 이 시대에 깊은 울림을 지닌 예언적 발언”이라고 평했다.

조 작가는 그 즈음 한겨레신문과의 인터뷰에서도 자신의 소설이 미래 세대에도 읽힐 수 있다는 가능성에 우려를 표하기도 했다. “내가 ‘난장이’를 쓸 당시엔 30년 뒤에도 읽힐 거라곤 상상 못 했습니다. 앞으로 또 얼마나 오래 읽힐지, 나로선 알 수 없어요. 다만 확실한 건 세상이 지금 상태로 가면 깜깜하다는 거, 그래서 미래 아이들이 여전히 이 책을 읽으며 눈물지을지도 모른다는 거, 내 걱정은 그것입니다.”(이세영, 2008.11.14)

그는 이후 기력이 다한 자신의 세대를 안타까워하면서도 성장하는 젊은이들에게 새로운 희망을 걸었다. 전성원 황해문화 편집장은 자신의 SNS에 올린 글에서 “선생님은 2011년의 한 문학 강연 자리에서 오랫동안 불의한 체제에 맞서 싸웠으나, 이제는 분노할 힘마저 부족한 시대를 살고 있다”며 자신을 ‘송장세대’라고 표현했다고 기억했다.

“‘분노하라고 하는데 힘이 있어야 분노를 하는 것’이라며 ‘지금은 분노할 힘조차 없다.’ 그럼에도 ‘20대들은 절대 희망의 끈을 놓지 마라. 냉소주의에 빠지면 헤어나지 못한다. 공동의 일, 공동의 숙제를 해낼 수가 없다. 냉소주의는 우리의 적이 제일 좋아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죠.”

조 작가는 이날 강연 말미에 철학자 칼 야스퍼스의 다음 말을 인용했다고, 전 편집장은 기억했다. “인간과 인간 사이에는 연대감이 존재하기 때문에,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잘못된 일과 불의, 특히 그 앞에서 그가 알고 있는 가운데 저지른 범죄행위들을 책임지게 되는 것이다. 악을 저지하기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지 않으면, 그때 나는 그것들에 대한 책임을 나눠지게 되는 것이다.”

조 작가는 마지막까지 한국 문학을 애정하고 새 시대 정신을 고민해주길 기대했다. 강양구 기자는 자신의 SNS 글에서 조 작가가 아래 세대인 자신에게 “강형!”이라고 부르며 고민을 토로했던 기억을 회고했다. “만날 때마다 새로운 진보 담론을 펼치는 잡지 창간과 같은 고민을 놓지 않았습니다. 과학기술 운동이나 환경 운동처럼, 당시 제가 관심 있는 주제를 놓고서도 관심의 촉을 놓지 않으셨죠. 마치 가계를 꾸릴 연금처럼 계속해서 팔리는 『난쏘공』을 부끄러워하셨습니다. 팍팍한 서민의 삶과 떨어져 있는 한국 문학의 현실에 답답해 하셨습니다.”

유족으로는 최영애 여사와 아들 중협, 중헌이 있다. 빈소는 강동경희대병원 장례식장 12호실, 발인은 12월 28일, 장지는 서울추모공원.

「참고문헌」
 
심재학(2009.1.7). 「조세희 선생 인터뷰 출간 30주년 된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블로그 글.
 
https://m.blog.naver.com/PostView.naver?isHttpsRedirect=true&blogId=piahorse&logNo=30040646078
 
이세영(2008.11.14). 「‘난쏘공’ 안읽히는 사회 오길 그토록 바라건만…」. 『한겨레신문』. 2008-11-13 18:37. https://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321669.html

김용출 선임기자 kimgija@segye.com, 사진=세계일보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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