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긴 내 나라다" 첩보전 뺨친 헤르손 `레지스탕스`…러군 암살까지
8개월간 끊임 없이 저항운동 펼쳐
"여기는 내 나라다. 내가 원하는 모든 것을 이 나라가 주진 않았지만, 적군에게 절대 물러서진 않았을 것이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직후 러시아군에 점령됐다가 지난달에야 해방된 우크라이나 남부 요충지 헤르손 주민 발렌틴 드미트로비치 예르몰렌코(64)는 8개월간의 목숨을 건 투쟁의 배경을 묻는 말에 이같이 답했다.
25일(현지시간) 미국 일간 뉴욕타임스(NYT)에 따르면 올해 2월 24일 인구 30만명의 도시인 헤르손에 러시아군 병사들이 쳐들어왔을 때 그는 18살 난 손자와 함께 예비군의 일원으로 요격에 나섰다.
우크라이나군이 전략적 후퇴를 선택한 상황에서 홀로 적에 맞선 예비군은 처참한 피해를 입고 무너졌다. 생존자들은 지하로 피신했다.
헤르손을 점령한 러시아는 법정화폐를 러시아 루블화로 바꾸고, 러시아식 교육을 실시하는 등 이 지역을 '러시아화'하는 데 골몰했다.
피란민들이 버리고 간 주택 일부에는 러시아인 가족들이 이주해왔다. 헤르손 시내 공원과 슈퍼마켓에는 러시아 정보요원들의 자녀로 알려진 어린이들의 모습을 쉽게 볼 수 있었다.
헤르손은 아마도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가장 공을 들인 우크라이나 점령지 중 하나일 것이라고 NYT는 평가했다.
하지만, 헤르손 주민들은 '당근과 채찍'을 휘두르는 러시아에 순순히 따르는 대신 풀뿌리 지하조직을 결성, 저항을 이어갔다.
구성원은 예르몰렌코와 같은 은퇴자부터 학생, 기술자, 할머니, 요트 수리차 헤르손에 들렀다가 발이 묶인 부호 등으로 다양했다.
헤르손 주의회 의장인 올렉산드르 사모일렌코는 "이들이 철저한 점조직으로 활동했다"면서 "누군가 잡혀도 전체 작전에 영향이 없도록 누구도 다음에 연결되는 인물을 몰랐다"고 말했다.
이곳에서 수십년째 살아온 예르몰렌코와 부인 올레나(65)는 넓은 인맥을 활용해 구성원들이 모은 정보를 취합해 우크라이나군에 전달하는 역할을 맡았다.
이들 부부는 매일같이 러시아군의 동향을 담은 수십건의 영상과 녹음, 문자 자료를 전달받았다. 올레나는 "극히 위험한 일인데도 고층빌딩에 사는 할머니부터 요트에서 러시아 순찰선을 살피는 부부까지 수없이 많은 이들이 흔쾌히 동참했다"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많은 이들이 끌려가 고문당하는 등 러시아군의 억압은 갈수록 심해졌다. 하지만, 저항도 그만큼 더욱 거세졌다.
4월 중순에는 헤르손 전역에 저항의 의미를 담은 노란 리본이 그려졌다. 격분한 러시아군이 노란색 페인트의 출처를 찾겠다며 시내 곳곳 철물점의 CCTV를 뒤지는 행태를 보였다.
러시아가 세운 헤르손 점령지 친러 행정부가 우크라이나와의 교역을 차단하고 빼앗은 곡물을 러시아로 옮길 것을 지시했을 때는 일부 물류업체가 운송을 거부했다가 관계자 납치 등 보복을 당했다.
시민 저항군은 단순한 정보제공에 그치지 않고 외부에서 무기를 반입하고 야간에 러시아군 병사를 습격해 살해하는 등으로 저항 수위를 높여갔다.
이 과정에서 분해한 총기를 배에 숨겨 옮기던 예르몰렌코가 드니프로강을 순찰하던 러시아군의 검문을 받아 자칫 즉결처분될 뻔했다.
사모일렌코 의장은 우크라이나군이 9월 중순 헤르손에 모인 고위급 러시아 부역자들의 회의 현장을 공격한 데 이어 몇주 뒤에는 러시아 정보요원들이 머무는 호텔을 정밀폭격한 것도 시민 저항군이 제공한 정보가 결정적 역할을 했다고 말했다.
헤르손을 자국 영토로 편입한다고 선언했던 러시아군은 결국 지난달 초 드니프로강 건너로 병력을 물렸다. 자유를 되찾은 시민저항군은 최근에야 한 자리에 모여 그간 겪은 어려움을 털어놓으며 기쁨을 나눴다.
이 자리에서 예르몰렌코는 시민 저항군에 속한 20대 초반에서 70대 중반 남녀 20여명의 이름을 일일이 호명하며 감사를 표했다. 그는 "우리를 배신하지 않은 마을의 모든 이들에게도 감사를 전하고 싶다"고 말했다고 NYT는 전했다.박양수기자 yspark@d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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