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는' 한국외교

CBS노컷뉴스 김규완 기자 2022. 12. 26. 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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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해자는 기억못해도 피해자는 상처를 영원히 기억해
윤 정부의 선의를 까방권쯤으로 여기는 일본정부
강제동원 할머니 서훈식까지 일본 눈치를 보다니
피해자 호소인을 자처하며 자존심까지 버려야 하나
"천년의 역사가 흘러도 변할 수 없어" 박근혜 대통령 기념사 기억하길
자위대 사열하는 기시다 일본 총리. 연합뉴스


자존심 없는 국민이 세계 어디에 있겠냐마는 한국인들의 국가적 자존심은 어느 나라 못지 않다. 오죽하면 '한일전에는 가위바위보도 져서는 안된다'는 말이 나오겠는가.

영화 베테랑에 나온 "우리가 돈이 없지 가오가 없냐?"라는 황정민(형사 서도철)의 말이 명대사로 기억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철지난 국수주의나 국뽕을 얘기하려는 것이 아니다.

가해자는 기억하지 못해도 피해자는 상처를 영원히 기억하는게 인지상정이다.

한일관계에서 한국은 분명 피해자이다. 그래서 아픈 것이고 그래서 자존심이 중요할 수 밖에 없다.

한국을 식민지배하며 수많은 한국인을 강제동원하고 위안부로 끌고간 일본은 역사적 사실조차 부인하고 있다.

지난 19일 오전 광주시의회에서 일제강제동원시민모임이 양금덕 할머니 인권상·서훈 무산 관련 정부 규탄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런 상황에서 윤석열 정부는 출범 직후 경색된 한일관계를 풀기 위해 작정한 듯 달려들고 있다.

그런데, 일본정부는 윤석열 정부의 '선한 의지'를 악용하며 까방권(까임방지 권한)쯤으로 여기는 것 같다.

일본정부는 16일 안보문서를 개정해 '반격능력 보유'를 천명했다. 유사시에 한반도에 진군이 가능하다는 얘기이다. 안보문서인 '국가안보전략'에는 독도영유권을 명기했다. 

군함도(하시마) 탄광에서 조선인 강제징용 노동자 차별이 없었다는 내용을 담은 후속조치 이행경과 보고서를 제출했고 조선인 강제노역에 동원된 사도광산의 세계유산등재도 추진하고 있다.

이에 대한 우리 정부의 대처가 어리둥절하다.

외교부는 "일본이 전수(專守·오로지 수비)방위 원칙을 견지한다는 방침을 전제로 한 걸로 안다"는 입장을 밝혔다. 일본이 한반도에서 전쟁이 가능한 국가임을 선포한 것임에도 태평한 소리를 한 것이다.

나아가 외교부는 "사전에 우리와 긴밀한 협의 및 동의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입장을 밝혔지만 일본정부는 "반격능력은 자위권이니 일본이 자체적으로 판단할 것"이라고 딴소리를 했다.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달 28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 집무실에서 로이터 통신과 인터뷰를 하는 모습. 오른쪽은 박근혜 전 대통령. 박종민 기자·대통령실 제공


윤석열 대통령은 최근 로이터통신과의 인터뷰에서 일본의 방위비 증액과 관련해 "열도 위로 미사일이 날아가는데 그냥 방치할 수는 없지 않았을까"라고 말했다. 일본의 방위비 증액을 우리 대통령이 용인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는 발언이다.

일본이 그동안 연간 방위백서에 밝혀온 독도 영유권을 최상위 안보문서인 '국가안보전략'에 명기하는 것으로 수위를 올렸지만 우리정부는 그동안 해온 수준인 주한 일본공사와 대령급인 방위주재관을 불러 항의하는데 그쳤다.

그런가하면, 강제동원 피해자 양금덕 할머니에게 국민훈장을 주는 서훈식을 취소시키고 강제징용 배상문제 해법을 논의하기 위한 민관토론회를 연기시켰다.

7월엔 일본 전범기업 미쓰비시중공업의 국내 자산 강제매각 최종 판단을 미뤄 달라고 대법원에 요청하기도 했다. 

이 모든 배경에 대한민국 외교부가 있다.

한일관계 개선은 꼭 가야할 길이지만 이렇게 자존심까지 버려가면서 일본 눈치보기를 해야하는지 우려스럽다는 지적이 많다.

가해자는 생각이 없고 심지어 무시까지 하는데 왜 피해자가 가해자를 먼저 배려하려고 하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우리가 저자세를 취하며 일본과 관계 개선을 하려는 명분과 국민적 동의가 우선돼야 한다.

정부가 공론화 절차도 없이 밀실외교를 펼치다 파국을 빚은 2015년 위안부 합의나, 이후 대책도 없이 이를 파기한 2017년 사태의 오류를 범하지 않으려면 국민적 공감대가 우선이다.

일본정부는 과거사에 진정한 반성이 없는데 저자세로 나서는 것은 국민적 자존심에 상처를 남기는 것이고 차후에 또 다른 부작용을 부를 것이 분명하다.

연합뉴스


가해자의 기억상실증로 치부하고 피해자의 과도한 피해의식으로 치부하기에는 한일간 역사인식에 차이가 너무 크다.

역사적 사실을 사실로 주장하지 못하는 한국이나 이를 인정하지 않는 일본 사이에 진정한 화해가 성립될 수 있을지 의문이다.

박원순 서울시장의 성추행 의혹 사건이 터졌을 때 미래통합당 김은혜 대변인(대통령실 홍보수석)은 "피해자를 피해자로 부르지 못하는 홍길동 당, 왜인가?"라는 성명을 내놓았다.

한국외교부의 작금의 조치는 한국이 역사적 피해자가 아니라 피해자 호소인임을 강조하는 것처럼 보여진다.

박근혜 대통령은 2013년 3.1절 기념사에서 "가해자와 피해자라는 역사적 입장은 천년의 역사가 흘러도 변할 수 없는 것"이라고 말했다.

5년을 걸러 재집권한 윤석열 보수정부가 이 대목을 다시 한번 상기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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