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인의 직격 야구] 프로야구 취재 40년을 회고하며
지난 8일 은퇴 야구인들의 모임인 일구회(一球會·회장 김광수) 시상식에서 필자를 포함한 원로언론인 5명이 감사패를 받았다. 일구회는 프로야구 출범 40주년을 기념해 초창기 야구담당 기자들의 공로를 기려 시상을 했다.
감사패를 받고 보니 지난 40년 세월이 주마등처럼 흘러갔다. 야구 취재와 보도에 청춘을 바친 느낌이다. 그 사이 중앙 언론에서 야구를 담당했던 선후배와 동료, 10여명이 세상을 떠났다. 특히 스포츠서울 창간멤버로 필자와 1953년생 동갑인 이종남, 신명철, 김기선 씨의 이른 별세가 가슴을 아프게 한다.
필자가 가장 가슴 뿌듯해 하는 일은 '야신(野神) 김성근 감독'의 탄생에 도움을 준 거다. 1988년 여름 어느 날, 김 감독이 필자를 만나 팀 이적에 관해 도움을 청했다. 당시 OB 베어스 감독 임기 만료를 앞둔 김감독은 모종의 사건으로 재계약이 어려운 실정이라 타팀 이동이 불가피했던 것.
청보 핀토스에 이어 태평양 돌핀스 담당이었던 필자는 창단 감독을 구하던 돌핀스 신동관 사장(작고)과 김 감독을 연결시켜 계약이 순조롭게 진행되는 듯했다. 그러던 어느 날 신 사장이 필자를 만나 어두운 얼굴로 조언을 구했다. 신사장이 들고 있는 메모에는 일본어로 '감독 계약시 구단에서 꼭 이행해줘야 할 21가지 조건'이 빼꼭하게 적혀 있었다(재일동포인 김 감독은 출생후 20년간 일본에서 자라 우리말보다 일본어가 익숙).
신 사장은 기가 차다는 표정이었다. 태평양은 여자 실업농구팀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농구 선수들에게는 유니폼과 공만 지급하면 되므로 아무리 프로야구팀이라도 큰돈이 드는 21가지 조건은 무리라는 생각이었던 것 같다. 만약 당시 필자가 신 사장 편을 들어 "창단팀이라 의욕을 가져야 하지만 요구가 지나친것 같습니다. 다른 감독 찾아보겠습니다"라고 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만년 꼴찌 인천 연고팀인 돌핀스가 1989년 정규 시즌 3위에 이어 플레이오프 진출이라는 눈부신 성적을 거둘 수 없었을 것이다. '야신'도 없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필자는 신 사장에게 "약팀을 강팀으로 만들겠다는 야심찬 계획으로 봐주십시오. 꼭 감독 계약하시고, 요구 조건은 모두 들어주십시오. 성적으로 보답할겁니다"라고 설득을 해 힘겹게 계약이 성사됐다. 김 감독은 이듬해 '돌풍 돌핀스'에 이어 삼성-쌍방울-LG-SK-한화를 거치며 한국시리즈 우승 3차례(SK 시절) 등 명감독으로 이름을 날렸다.
두 번째는 건국후 스포츠 기자로서는 최초로 대통령 동정(動靜)으로 특종을 한거다(스포츠조선 재직시 1급 특종상 수상). 야구명문 경남고 출신으로 야구팬이었던 김영삼 전 대통령은 1994년 10월 18일 LG-태평양의 한국시리즈 1차전(잠실)때 시구를 했다. 이는 필자의 건의에 의해서였다.
필자는 그해 9월초 어느 날, 청와대 민정수석실 행정관으로 있던 고교 동기에게 전화를 해"대통령께서 야구를 좋아하시잖아. 한국시리즈에서 시구 한번 하시면 어때?"라고 지나가듯이 말했다. 이 행정관은 민정수석실 회의때 시구 건의를 했고, 민정수석은 대통령에게 직접 권유를 해 시구가 결정됐다. 하지만 필자의 10월 15일자 사전 특종 보도로 시구가 무산될뻔 했다.
경호실엔 "대통령이 참석한다는 사실이 사전에 누설될 경우 대통령 참석은 취소된다"는 규정이 있다. 이에 따라 청와대 홍보수석실은, 시구자가 대통령에서 이민섭 문체부장관으로 바뀌었다는 보도자료를 내보냈다. 필자는 특종을 놓친 상실감에 당일 한국시리즈 1차전 취재를 갔었는데, 대통령이 느닷없이(?) 나타나 시구를 하는게 아닌가? 시구를 지켜본 필자의 감격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후일담으로, 경호실에서는 보안상 시구자 변경을 강력 요청했었는데 야구 사랑이 대단한 김대통령이 강행했다고 한다. 대통령 동정을 사전 누출하는 것은 '보안업무 규정'에 저촉돼 처벌받을수 있었으나 필자는 김대통령의 고교 후배란 점이 감안돼 운좋게(?) 넘어갔다. 시구 다음날 대통령실 수석비서관회의 때는 오히려 특종보도한 필자를 칭찬하는 일도 벌어졌다고 한다.
물론 어이없는 낙종도 있다. 첫째는 LG 트윈스 창단 관련이다. 스포츠서울에 몸담고 있던 1989년 12월초 어느 날, LG그룹 회장실에 근무하던 고교 동기가 필자를 찾아와 뜬금없이 "프로야구단의 조직과 연간 예산을 뽑아 달라"고 했다. 당시는 MBC 청룡의 매각설이 돌때라 "이 친구가 왜 구단 운영상황을 알려고 하지?"라며 의문을 품고 집중 취재에 들어갔다면 대형 특종급인 'LG 트윈스 창단' 기사를 언론중 가장 먼저 보도했을 것이다.
하지만 당시 동료 기자들간의 협업 체제가 이뤄지지 않아 특종을 놓치고 말았다. 공식적으로는 낙종이 아니지만 대형 기사를 어이없이 빠뜨린 필자는 몇 달간 속앓이를 했다.
두번째는 사실상 낙종이지만 동료의 도움으로 낙종을 면한 경우다. 프로야구 출범 40년간 야구장에서 응원하던 팬이 사망한 경우가 1988년 5월 31일 사직구장에서 딱 한번 있었다. 당시 29세이던 이성균 씨는 평소 심장이 약했는지 응원하면서 고함을 지르다 쓰러져 병원으로 옮겨진 후 사망하고 말았다.
당시는 호출기나 스마트폰이 없었으므로 경기후 큰 사고가 나더라도 출장간 기자가 숙소에 없다면 구단이나 서울 본사에서 연락이 불가능했다. 롯데 경기를 취재했던 필자는 모 야구인과 저녁 식사후 밤늦게 숙소에 돌아가 평소와 같이 잠을 잤다. 그런데, 아침에 일어나 호텔 프런트에 비치돼 있던 스포츠서울 1면 톱기사를 보고 깜짝 놀랐다. 아니, 혼비백산이었다.
"야구팬, 관람중 사망!"이란 큰 제목이 달려 있지 않은가. 순간 "아니, 내가 사람이 죽은줄도 모르고 술마시고 잠을 잤단 말인가?"라는 엄청난 당혹감과 자괴감에 빠졌다. 그런데, 기사를 찬찬히 읽어보니 기사 끝에 '부산=김수인기자'라는 발신자가 표시돼 있었다.
"나는 이 기사를 보낸 적도 없고 사망 사실도 몰랐는데 어떻게 된 일이지?" 부리나케 본사로 전화하니 전날 야근하던 김기선 기자가 저녁 9시 KBS 뉴스를 보고 사망 사실을 확인한 뒤 필자에게 연락을 취했으나 통신 두절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김기자가 '대필 기사'를 써 보도하게 된 것이다.
이외에도 크고 작은 특종과 낙종(경쟁지 포함)에 울고 웃으며 기자생활을 한 기억이 난다. 또 1994년 3월 강남구로 이사온 후 서초구에 사는 지금까지 29년 가까이 KBO(강남구 도곡동 소재) 반경 4km 이내에 거주하며 KBO 임직원과 끊임없이 교류를 해오고 있는 것은 필자만의 자랑이다.
'기억하라 1982<프로야구 출범>' 등 야구 저서 3권을 펴내고 아직까지 야구 칼럼니스트로 활동하는 것은 축복받은 일이기도 하다. 새삼 '이종남-신명철-김기선' 등 옛 동료를 떠올리며 그들 몫까지 더해 오래토록 '영원한 야구기자'로 남길 기원해본다. 본지 객원기자
스포츠한국 권정식 jskwon@hankook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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