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사냥 피해 줄이려면 허울뿐인 사외이사 책임 강화해야" [수상한 왕국:쌍방울·KH그룹의 비밀]

이정원 2022. 12. 26. 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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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한 왕국:쌍방울·KH그룹의 비밀]
<4> 전환사채와 주가조작
"자금 필요한 기업엔 CB 절실" 순기능 확실하지만
주가조작에 CB 빙자 사기까지... 각종 부작용 속출
대주주 적격성심사·전과 기록 공시 등 예방책 거론
편집자주
한국일보는 M&A를 통해 사세를 확장한 쌍방울·KH그룹의 수상한 역사를 두 달간 추적했다. 이들은 전환사채(CB)를 발행해 덩치를 키웠고, 수상한 자금이 모이는 곳에 모습을 드러냈으며, 검찰·정치권 인사들과 네트워크를 형성했다. 별종 왕국을 건설한 두 그룹을 해부했다.
배상윤 KH그룹 회장(왼쪽)과 김성태 전 쌍방울그룹 회장(오른쪽)

"글로벌 기업이라는 지금 국내 대기업들은 뭐가 다릅니까. 다른 대기업들의 계열사 간 전환사채(CB) 거래 구조도 한번 보세요. 쌍방울이랑 KH보다 훨씬 복잡합니다. 출신이 어떠했든 두 사람은 이제 어엿한 기업가가 됐어요."

주가조작과 대북송금, 알펜시아 인수 입찰방해 의혹에 유력 정치인 변호사비 대납 의혹까지. 올해 각종 수사와 논란의 중심엔 김성태 전 쌍방울그룹 회장과 배상윤 KH그룹 회장이 있었다. 두 사람은 제도권 자본시장에 입성한 직후부터 공격적인 인수합병으로 사세를 키웠다. 인수 과정 곳곳에서 포착된 두 그룹의 복잡한 거래 탓에, 일각에선 두 사람을 '경제 공동체'로 부르기도 한다.

불법 대부업과 주가조작 등으로 형사처벌을 받았다는 '꼬리표'도 색안경을 쓰고 두 사람을 보게 만드는 요인이다. 하지만 두 사람과 절친하다는 한 사채업자는 "과거는 과거일 뿐이고 두 사람은 이미 양지로 나온 사업가"라고 여러 차례 강조했다.

오랫동안 음지에 있던 두 사람이 세상 속으로 뛰쳐나온 이유는 분명치 않다. 하지만 이들이 기업가로 성장한 경로는 비교적 명확하다. 금융 전문가들은 CB 발행 등을 통한 무자본 인수합병(M&A)을 두 그룹의 공통된 성장 공식으로 지목한다.

무자본 M&A는 대체로 주주 이익이 아닌 '전주(錢主)' 이익에, 기업가치 상승보단 시세차익과 최적의 엑시트(투자금 회수)에 방점을 찍고 있다. 그러다 보니 기업 경영을 악화시키고, 시장 질서를 왜곡한다는 비판을 받는다. 하지만 부작용이 나타나기 전에 이를 차단하거나 예방할 방법은 마땅치 않다.


'패자부활전' CB, 기업사냥꾼들 악용 통로 전락했나

쌍방울과 KH그룹이 몸집을 불릴 때 지렛대로 활용한 것은 CB다. 두 그룹은 계열사를 동원해 'CB 공장'으로 불릴 만큼 막대한 규모의 CB를 지속적으로 발행했다. CB로 조달한 자금은 다른 회사를 인수하는 데 썼고, 계열사 간 CB 거래로 시세차익을 거두기도 했다.

그러나 흑자를 기록했던 기업들은 쌍방울과 KH에 인수된 뒤 적자로 전환됐다. 손실은 고스란히 일반 주주들 몫이었다. 전문가들은 이런 과정을 "전형적인 기업사냥 수순"으로 평가한다. 기업분석기관 리더스인덱스의 박주근 대표는 "CB를 발행하는 것은 자유지만, 조달한 자본금을 상환하거나 회사를 성장시킬 생각이 없다는 게 문제"라고 지적했다.

CB를 주식으로 전환하는 시기가 다가오면 무자본 M&A꾼들은 공식처럼 주가를 부양시킨다. 발행된 CB가 주식으로 전환되기 전 각종 호재를 띄우고, 필요하다면 허위 공시와 주가조작도 불사한다. 과거 KH그룹에서 일했던 한 관계자는 "주가조작을 하지 않으면 어떻게 투자금을 모을 수 있겠느냐. CB판에는 개미(일반투자자)들도 피해를 감수하고 뛰어드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금융투자 소송 전문 김광중 변호사(법무법인 한결)는 "기업사냥꾼들에게 주가 조작은 CB 발행과 뗄 수 없는 단계이자, 전주의 이익에 부합하는 가장 구체적 통로"라고 설명했다.

이처럼 부작용 우려가 크지만, CB 악용을 사후적으로 제재할 수단은 많지 않다. 허위 공시와 주가조작 정도가 그나마 형사처벌 대상이지만, 적발이 쉽지 않을뿐더러 범행으로 거두는 이익이 막대해 실효성에도 의문이 제기된다. CB 제도 자체를 손봐야 한다는 주장도 나오지만 큰 공감을 얻진 못하고 있다. 김 변호사는 "CB를 폐지하라는 건 교통사고가 많이 난다고 차를 없애라는 논리와 같다"며 "회사채와 유상증자로도 자금 조달이 어려운 기업들에 CB 제도는 '패자부활전' 성격으로 반드시 필요하다"고 밝혔다.


대주주 적격성 심사로 기업 진입 원천 차단?

그래픽=김대훈 기자

CB의 순기능은 살리면서 부작용을 줄일 방법은 없을까. 전문가들은 대주주 전환 요건을 까다롭게 해야 한다고 제언한다. 금융사와 방산기업 등에만 적용 중인 '대주주 적격성 심사'를 일반 코스닥 기업에도 확대 적용하자는 취지다.

박주근 대표는 "무자본 M&A꾼들이 기업을 장악하는 첫 번째 단계가 대주주 전환"이라며 "이 과정을 까다롭게 심사해 문제 있는 사람들을 걸러낼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실제로 미국은 경영진 전과기록 제출이 상장 절차에 포함돼있고, 영국과 홍콩 등은 증권인수인, 금융감독기관, 자율규제기구 등에서 엄격한 임원 적격성 심사를 진행한다.

김성태 전 회장과 배상윤 회장 측근들은 그간 한국일보 취재에 "조폭은 평생 조폭이어야 하고, 사채업자는 죽을 때까지 사채업만 하라는 것이냐. 기업가는 날 때부터 기업가여야 하느냐"고 반문했다. 김 전 회장의 한 지인은 "두 사람이 과거 주가조작 등으로 형사처벌을 받았지만, 이미 합당한 대가를 치른 만큼 이후 활동까지 매도당해선 안 된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대주주 적격성 심사를 확대해야 한다는 의견에 대해서도 "부당한 낙인찍기"라고 반박했다.

대주주 요건 강화가 적절한 기업사냥 예방책인지를 두고는 학계에서도 이견이 있다. 최종학 서울대 경영학부 교수는 "금융당국 인력과 예산으로 상장사 임원들의 적격성 여부를 모두 심사할 수 있을지 의문"이라며 "규모가 작은 회사일수록 지배구조 개선이 현실적으로 쉽지 않은 측면도 있다"고 설명했다. 김갑래 자본시장연구원 연구위원은 "적격성 심사 확대에 대해선 기업활동 위축 우려가 있다"며 "다만 임원진 전과 기록 공시제도를 의무화하면 투자자들에게 충분한 정보를 제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없는 CB 내걸어 사기 행각도... 익명 투자조합 맹점

특경법상 사기 등의 혐의로 기소된 전직 기업가 A(56)씨와 관련해, 나노스 CB 매매예약권자로 설정된 투자조합에서 2020년 피해자 B씨에게 보낸 회신서. A씨와 투자조합의 권리관계를 묻는 B씨 질문에 조합은 "A씨는 애초부터 조합원 명의가 없었다"고 답했다. B씨 제공

CB 발행을 이용한 기업사냥 피해는 주식시장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CB를 매입하는 투자조합의 익명성을 악용해 투자금을 편취하는 사례도 만연하다. 한국일보 취재에 따르면, A(56)씨는 쌍방울 계열사인 나노스의 CB 양도권을 갖고 있는 것처럼 피해자 B씨에게 접근해 9억여 원의 투자금을 편취한 혐의(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상 사기)로 지난해 구속기소됐다. 그러나 A씨는 나노스 CB 매매예약권자로 설정된 투자조합과는 아무 관계가 없었다.

쌍방울그룹 측은 A씨의 사기 사건이 그룹과는 무관하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B씨를 비롯한 피해자들의 생각은 달랐다. A씨는 과거 반도체 기술개발업체를 운영하면서 30억 원의 유상증자를 실시했는데, 이때 일부 물량을 김성태 전 회장의 배우자가 매입했다. A씨가 2018년부터 피해자들에게 접근하며 내세운 나노스의 사업 호재는 상당 부분 현실화됐다. A씨는 당시 "나노스 임원이 이화영 전 경기도 평화부지사를 통해 북한의 실력자에게 명품시계를 전달했다"며 현재 검찰 수사 내용까지 이미 피해자에게 언급했다고 한다.

A씨가 구체적인 사업 정보까지 언급하며 조합원 행세를 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투자조합의 익명성'이 있었다. 박주근 대표는 "돈의 출처가 투명해야 M&A 전주를 밝혀낼 수 있고 파생된 피해도 막을 수 있지만, 투자조합 형태로 들어오면 추적이 어려워진다"고 강조했다. 김광중 변호사는 "불법을 알면서도 작정하고 들어오는 세력을 사전에 막기란 쉽지 않다"며 "공시 요건을 강화하면 그 요건에 맞는 대리인을 내세우는 등 우회로가 많다"고 지적했다.


허울뿐인 사외이사 제도... 책임 현실화 가능할까

그래픽=김문중 기자

"사후 처벌은 미미하고, 사전 대책은 무력하다."

무자본 M&A의 피해를 줄이기 위한 대책을 두고 업계에서 오가는 자조적 평가다. 건전한 기업 경영을 위한 '최후의 보루'라는 사외이사 제도 역시 한국 기업 풍토에선 유명무실하다. 검찰이나 정치권 출신이 주로 포진된 쌍방울과 KH그룹 사외이사들도 "역할을 제대로 했느냐고 물으면 부끄럽다"거나 "이사회에 거의 나가지 못했다"고 스스로 밝혔다. 한국일보가 올해 두 그룹 주요 계열사의 이사회 출석률을 확인한 결과, 한 번도 출석하지 않은 사외이사들이 적지 않았다.

전문가들은 사외이사들의 책임을 좀더 강화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이를 위해선 '경영판단 원칙(임원진이 권한 내 관리자 주의를 다했다면 회사 손해에 개인적 책임을 지지 않는다는 원칙)'이라는 면책 논리부터 재검토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김광중 변호사는 "미국에선 일반 주주들이 피해를 입었다는 소송이 제기될 경우 이사진들에게 입증 책임이 더 강하게 부과된다"며 "우리도 관련법을 개선해 사외이사들의 책임을 현실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수상한 왕국: 쌍방울·KH그룹의 비밀

<1> 유별난 검찰·정치인 사랑

<2> 기이한 덩치 키우기

<3> 대장동과 그들의 관계는

<4> 전환사채와 주가조작

수상한 왕국:쌍방울·KH그룹의 비밀몰아보기(☞링크가 열리지 않으면, 주소창에 URL을 넣으시면 됩니다.) https://www.hankookilbo.com/Collect/8086

<1> 유별난 검찰·정치인 사랑
①[단독] 쌍방울·KH, 윤석열 대통령 친정을 방패 삼았다
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A2022120421180003514
②빚 내 기업 산 뒤 전환사채 찍어 또…'무자본 M&A'로 덩치 키워
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A2022121116380003475
③자신 구속한 검사 사외이사로… 대형 로펌 통해 로비 시도 정황
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A2022120520480003947

<2> 기이한 덩치 키우기
①[단독]"배상윤 회장 돈 세탁기였나" CB폭탄 돌리기 피해자의 절규
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A2022121604510002993
②바지사장 앉혀 조종 ‘판박이’…추적 힘든 현금으로 기업 인수도
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A2022120421370003492

<3> 대장동과 그들의 관계는
①[단독] 곽상도·대양금속·하얏트 주차장… 대장동과 쌍방울·KH의 연결고리
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A2022121615290005871
②도박장→대부업→주가조작… 기록으로 본 회장님 흑역사 들여다보니
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A2022120710530001829

<4> 전환사채와 주가조작

이정원 기자 hanako@hankookilbo.com
이성원 기자 support@hankookilbo.com
조소진 기자 sojin@hankookilbo.com
김영훈 기자 huni@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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