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가 ‘사표’…“소선거구제는 썩은 그릇에 국물 조금 붓는 것”

이재훈 2022. 12. 26.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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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권 안팎 선거제도 개혁 목소리
제20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2020년 4월11일 국회에서 제20대 국회의원들에게 지급할 배지가 공개되고 있다. 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2020년 치러진 21대 총선에 참여한 유권자(2874만1408표) 가운데 10명 중 4명(43.7%, 1256만7432표)이 던진 표는 ‘사표’가 됐다. 단 한표라도 더 많이 얻은 1명만을 국회의원으로 선출하는 현행 선거제도(소선거구제+준연동형 비례대표제) 탓에 2, 3위 득표자를 지지한 유권자들의 표심이 국회를 통해 반영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승자 독식’의 선거 구도 속에서, 국민의힘은 영남지역(대구·경북+부산·울산·경남)에서 55.9%를 득표하고도 86.2% 의석(영남 65석 가운데 56석)을 차지했고, 더불어민주당은 호남에서 68.5% 득표로 96.4% 의석(호남 28석 가운데 27석)을 쓸어갔다. 유권자들의 뜻을 오롯이 반영하지 못한 채, 지역주의 심화만 부르는 이런 선거제도는 ‘정치 불신’으로 이어지고 있다. 지난해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 서베이리서치센터의 한국종합사회조사를 보면, 국회에 대한 신뢰도를 ‘전혀 신뢰하지 않는다’(0점)부터 ‘완전히 신뢰한다’(10점)까지 10점 척도로 설문한 결과, 0~5점이 80%나 됐다.

점점 커지는 초당적 정치개혁 모임

대표성을 잃은 선거제도를 바꿔야 한다는 문제의식은 정치권 안팎에서 공감대가 커지고 있다. 여야 의원들이 모인 ‘초당적 정치개혁 모임’은 지난 9월2일 국회에서 첫 토론회를 연 이후 광주와 대구에서 순회 토론회를 여는 등 공론화 작업을 이어왔다. 첫 토론회는 강민국·최형두 의원(국민의힘)과 김영배·이탄희 의원(민주당) 공동 주최로 시작했지만, 지난 23일 9번째 토론회는 공동 주최자가 49명으로 늘었다. 이탄희 의원은 “정치 무관심과 냉소, 포퓰리즘이 커지면서 오히려 유권자의 대표성이 다시 약화하고 있다”며 “유권자의 선택권을 제대로 행사할 수 있도록 하는 게 논의 중인 선거제도 개혁의 큰 방향”이라고 말했다.

이들은 이달 초 정치개혁특별위원회에 선거법이 정한 개정시한인 내년 4월10일까지 복수의 선거제도 개혁안을 제시해달라고 촉구하는 한편, 내년 1월 중순께 자신들이 생각하는 선거제도 개혁 원칙을 담은 합의문도 작성해 공개할 계획이다. 구체적인 대안으로는 소선거구제를 폐지하고 한 선거구에서 3~5명의 의원을 뽑는 중·대선거구제, 소선거구제를 통해 지역구 의원 200명 정도를 뽑고, 나머지 100명의 의원은 전국을 8개 권역으로 나눠 정당이 이 권역에 공천한 비례대표 후보들에게 투표하는 권역별 비례대표제 등이 거론된다.

초당적 청년 정치인들의 모임인 ‘정치개혁 2050’ 모임 구성원들이 지난 22일 남인순 국회 정치개혁특별위원회 위원장과 면담하고 조속한 정치개혁을 촉구하고 있다. 이탄희 더불어민주당 의원 제공

청년 정치인들의 모임인 ‘정치개혁 2050’은 낡은 소선거구제를 폐지하고 중·대선거구제를 도입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천하람 국민의힘 혁신위원은 소선거구제를 “썩은 국그릇에다가 조금씩 새 국물만 붓는 것”에 비유하며 “이쯤 됐으면 국그릇을 새로 만들 시기”라고 말했다. 이들은 지난달 29일 광주, 지난 18일 서울 국회에서 전국 순회 청년발언대를 연 데 이어, 다음달 대구·경북에서 세번째 청년발언대를 열고 선거제도 개편 논의에 박차를 가할 예정이다. 지난 22일엔 남인순 정개특위 위원장과 면담하고 정치개혁에 적극적으로 나서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남 위원장은 이 자리에서 “법정 시한(내년 4월10일) 안에 복수의 선거제도 개혁안을 내고, 국민 공론화위원회를 만들어 개혁안을 두고 의견을 수렴하는 과정을 거치겠다”고 말했다. 정개특위는 이를 위해 15억원가량의 공론화위원회 예산도 확보했다.

지난 10월부터 매달 한차례씩 준비 모임을 해온 원로 정치인과 학계·시민사회 지식인 모임도 다음달 중순 본격적으로 협의체를 출범시키고 정치권 외곽에서 목소리를 내기로 했다. 강대인 대화문화아카데미 원장은 “승자 독식의 선거 문화에서 실제 민의가 대변되지 않고 정치권의 이해득실에 의해서만 선거제도가 결정되어왔다”며 “이 문제를 풀기 위해 정치인들이 주도하고 원로·지식인들은 자문하던 과거의 형식에서 탈피해 원로·지식인들이 앞장서 협의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틀을 만들기로 한 것”이라고 말했다.

정당·정치인 이해득실 극복이 관건

윤석열 대통령은 물론 여야 지도부 모두 민의를 반영하지 못하는 선거제도를 바꿔야 한다는 데 뜻을 함께하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은 대선 후보 시절이던 지난 2월 “중·대선거구제를 정치하기 전부터 선호해왔다”고 밝힌 바 있다. 이재명 민주당 대표 역시 지난 9월 국회 교섭단체 대표 연설에서 “국민의 다양한 의사가 정치로 수렴되려면, 특정 지역을 특정 정당이 독식하는 국회의원 선출 방식도 바꿔야 한다”며 “연동형 비례제 확대와 위성정당 방지를 통해 국민의 다양한 의지와 가치가 국정에 수렴될 수 있게 선거법을 바꿔야 한다”고 말했다. ‘초당적 정치개혁 모임’에도 이름을 올린 정진석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은 25일 <한겨레>와 한 통화에서 “소선거구제의 폐해가 깊은 만큼 중·대선거구제로의 개편이 필요하다는 입장”이라고 밝혔다.

문제는 국회의원 선거구 획정 시한이 석달여 앞으로 다가왔지만, 내년도 예산안 처리 지연 등에 떠밀려 아직까지 선거제도 개편을 위한 본격적인 논의가 진행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정개특위 내에선 중·대선거구제와 권역별 비례대표 도입을 골자로 하는 공직선거법 개정안 등에 대한 논의는 이제 법안 1독(법안 내용을 한차례 쭈욱 읽어보는 것)을 마쳤을 뿐이다. 남인순 정개특위 위원장은 “내년 1~2월 소위를 열어 우선 접점이 좁혀진 부분부터 처리해나갈 예정”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여야 양쪽 모두 시한 내 선거법 개정안이 처리될 수 있을지 장담하지 못하는 분위기다. 정개특위 한 의원은 “현행 소선거구제가 (거대 양당의) 지역 분할밖에 안 된다는 데는 여야의 뜻이 크게 다르지 않지만, 선거구 획정 문제 등 (각 당의 이해득실이 걸린) 각론에서는 서로 입장 차가 크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이와 관련해 ‘고장난 민주주의’를 고치려는 대의보다는 ‘안락의자 민주주의’에 안주해 이해득실만 따지려는 양당과 정치인 개개인을 어떻게 설득하느냐가 관건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박명림 연세대 교수(정치학)는 “단기적으로는 불리한 제도라도 그게 민주주의라면 수용할 자세가 되어 있느냐가 중요하다”며 “국민의힘은 영남에서, 민주당은 수도권에서 득표율보다 초과 의석을 가져갔는데, 정치개혁을 수용하면 장기적으로 국민의힘은 수도권에서, 민주당은 영남에서 그만큼 얻는 게 많아진다는 사실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시민들에게 정치개혁의 필요성을 얼마만큼 설득해낼 수 있느냐도 관건이다. 최형두 의원은 “만약에 비례대표를 확대하기 위해서는 의원 정수가 늘어나야 할 수도 있는데, 이럴 경우 국민적 반감이 매우 크다”며 “이럴 경우 국회의 전체 예산과 세비는 동결하는 범위 내에서 의원 정수를 늘려서 국민 부담은 줄이고 대표성은 높이는 제안같이 정밀한 설득 방식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재훈 기자 nang@hani.co.kr 조윤영 기자 jyy@hani.co.kr 오연서 기자 loveletter@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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