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화 상징 인프라서 상습정체 애물단지로 … 반세기만에 ‘쇠락의 길’[지식카페]
■ 지식카페 - 기술이 지나간 자리 - (20) 고가도로
1968년 서울 도로 ‘동맥경화’ 해소 목적 ‘아현고가’ 첫 건설… 육교·지하보도와 함께 車중심 교통정책 상징
2000년대 교통량 늘며 정체구간 전락, 매연 등 부작용까지 … 중앙버스전용차로 도입되며 철거 가속화
2014년 2월 8일, 서울 충정로에 1000여 명의 서울시민이 모여들었다. 박원순 서울시장이 철거를 앞둔 아현 고가도로를 시민들에게 개방하기로 결정했기 때문이었다. 1968년에 건설된 아현고가는 서울 시내에 가장 먼저 설치된 고가도로였다. 시민들은 자동차 없는 고가도로 위를 걸으며 오랫동안 자리를 지킨 구조물에 대한 추억을 되새겼다. 1987년 6월항쟁 당시 이한열 열사 장례식에 참여한 수백만 명의 인파가 연세대를 출발해 아현 고가도로를 지나 서울시청까지 이어졌던 기억이 빠질 수 없었다. 한편, 3층 건물 높이의 고가도로에 차가 막혀 항상 시끄러웠을 뿐만 아니라 메케한 매연 때문에 힘들었고 주변 지역에는 시커먼 먼지까지 쌓였는데, 철거되니 시원하다는 의견이 많았다. 관리 책임을 진 서울시는 고가도로의 노후화가 진행되면서 유지보수 비용은 점점 늘어나는 데 비해 편익이 크지 않다는 판단으로 철거를 결정했다.
서울의 여러 도시 인프라 중에 고가도로만큼 빠른 성쇠(盛衰)를 보인 것도 없을 것이다. 서울의 고가도로는 1960년대 후반에 나타나기 시작해 1970년까지 서소문, 신설, 아현 등 13개가 빠른 속도로 건설됐다. 이어 1970년대에는 서울역, 혜화, 삼각지 등 무려 35개나 되는 고가도로가 서울 시내 곳곳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후 2001년 이수 고가도로가 개통될 때까지 서울 시내에는 100개가 넘는 고가도로가 건설됐다. 하지만 고가도로의 전성시대는 오래가지 않았다. 2000년대에 들어서자 고가도로는 도시 경관을 해치는 “흉물”이자 “애물단지”로 전락했다. 급기야 서울시는 2002년 전농동 떡전 고가도로를 철거한 이후, 2009년에는 ‘서울 시내 고가도로 연차별 철거 계획’을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환경개선 효과가 크면서 주변 도로 교통에 영향이 적은 고가도로 12개를 선정해 우선 철거하겠다는 것이었다. 2014년 철거된 아현고가는 16번째 철거 대상이었다. 고가도로의 운명은 지난 50여 년 동안 급변해온 서울의 모습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고가도로가 나타나기 시작한 시기 서울은 확장을 거듭하고 있었다. 이른바 사대문 밖 성저십리(城底十里)에 영등포 지역 정도까지였던 서울의 경계는 1963년에 한강 이남 지역으로 대거 넓어졌다. 새로운 경제적 기회를 찾아 농촌에서 서울로 유입되는 인구만 매년 100만 명에 달하던 시기였다. 인구가 급증하는 도시가 제대로 기능하기 위해서는 이들을 아침에는 사는 곳에서 일하는 곳으로, 저녁에는 반대 방향으로 효과적으로 실어나를 수 있어야 한다. 기존의 도로 인프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일이었다. 1966년 서울시장에 취임한 김현옥은 문제의 심각성을 절실하게 느끼고 있었다. 그는 취임 직후 ‘서울시 도시기본계획’을 발표하면서 서울의 도로망을 인체의 혈관에 비유했다. “혈관이 튼튼하고 활달해야 도시는 건강하다”는 것이었다. 그의 비유법을 빌리면 당시 서울은 심각한 동맥경화에 시달리고 있었다.
막혀 있는 혈관을 뚫기 위해서는 혈관을 넓힐 필요가 있었다. 문제는 시민들이 정착해 살고 있는 지역의 도로를 막무가내로 확장할 방법이 없다는 데 있었다. 고가도로는 이 문제에 대한 해결책으로 등장했다. 땅 위의 도로를 확장할 수 없다면 공중에 구조물을 설치해 그 위에 자동차 전용 도로를 지을 수 있을 것이었다. 즉, 고가도로는 도로 인프라를 입체적으로 확장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이렇게 보면 1960년대 후반 이후 서울에 건설된 고가도로가 대부분 한강 이북 지역에 있었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다. 1970년 이후 허허벌판에 계획적으로 조성된 한강 이남 지역은 고가도로의 필요성이 상대적으로 적었기 때문이다. 서울 외곽 지역 주민들은 공중에 설치된 도로를 타고 서울 중심부로 빠르게 진입할 수 있게 됐다. 고가도로는 “중심부로부터 팔방으로 뻗어 나갈 방사선 간선도로”를 건설한다는 김 시장의 구상에서 핵심적인 요소가 됐다.
도로를 혈관에 비유할 수 있다면 혈액은 다름 아닌 자동차였다. 차량의 통행을 방해하는 요인을 원천적으로 제거할 필요가 있었다. 자동차 전용의 고가도로는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에 적합한 테크놀로지였으나 이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1970년대 서울의 도시 교통정책은 보행자가 자동차의 흐름을 방해하지 않도록 여러 조치를 강구했다. 김 시장은 도로를 건너야 하는 사람들을 위해 횡단보도와 신호등을 설치하는 대신 서울 시내 곳곳에 140여 개의 육교를 놓았다. 큰 교차로에는 보행자 전용 지하보도를 짓는 경우도 있었다. 고가도로와 육교, 지하보도는 모두 개발 시대 자동차 중심의 교통정책을 상징하는 구조물이었고, 2000년대 이후 서울 교통정책의 방향이 보행자 중심으로, 그리고 교통약자를 배려하는 방향으로 바뀌면서 서서히 사라지는 추세로 접어들었다.
고가도로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급변한 데에는 고가 주변 지역에서 나타난 여러 문제가 중요하게 작용했다. 도심지 한복판에 가설된 고가도로 아래는 어두컴컴한 분위기 때문에 상권이 제대로 발달하지 못했으며, 우범지대로 전락하거나 ‘슬럼화’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 때문에 관할 경찰서에서 범죄 예방과 불법 주정차 차량 단속을 위해 주기적으로 안전점검을 실시하고 있기도 하다. 그 외에도 앞서 언급한 매연 문제와 고가도로 주변 생활권 단절 문제 등이 지적됐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가장 큰 문제는 고가도로가 애초에 목표로 삼았던 기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게 됐다는 점이었다. 2000년대 이후 서울의 교통량은 1960∼1970년대 고가도로가 건설될 초창기 예상을 훌쩍 넘어서게 되었는데, 이는 고가도로가 자동차의 흐름을 원활하게 만들기는커녕 오히려 상습 정체 구간으로 만들기 일쑤였다. 어느덧 고가도로는 득보다 실이 많은 인프라로 전락해 버린 것이다.
도시 인프라로서 고가도로의 쇠락 과정에서 나타나는 흥미로운 점은 새로운 인프라와 충돌이 일어나면서 문제점이 더욱 부각됐다는 것이다. 서울시는 1996년 천호대로에 중앙버스전용차로를 지정한 이래, 2004년 이명박 서울시장의 ‘서울시 버스 개편’ 계획에 따라 대폭 확대하기 시작했다. 버스전용차로는 노선버스의 운행속도를 획기적으로 향상시켰다는 평가를 받으며 시민들의 높은 호응을 받았다. 문제는 고가도로가 가설된 구간에서 중앙버스전용차로를 운영하는 것이 사실상 어렵다는 점이었다. 새로운 인프라와 오래된 인프라의 충돌은 이후 몇몇 고가도로에 대한 철거 결정을 내리는 데 중요한 요인이 됐다. 예를 들어, 서울시는 2018년 한남2 고가차도를 철거하기로 결정하면서 그 자리에 버스전용차로를 개통하게 되면 “버스 통행 속도가 시속 18.6㎞에서 23.3㎞로 25.3% 향상”될 것이라고 전망하기도 했다. 이렇듯 서울 도시 인프라가 변화하면서 고가도로는 점점 설 자리를 잃어갔다.
이렇게 시작된 서울 고가도로 건설은 불과 30여 년 만에 내리막길을 걸어 2022년 현재 이미 상당수가 철거됐다. 이는 한편으로는 도시 인프라가 제반 여건과 사회적 인식의 변화에 따라 유연하게 바뀌어 가는 모습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서울 시내에 여전히 남아 있는 80여 개의 고가도로는 한 번 자리 잡은 인프라가 관성을 갖고 지속된다고도 볼 수 있다. 또 다른 경우에는 고가도로가 원래의 기능을 상실하고 새로운 의미로 재탄생될 수도 있다. 2017년 조성된 ‘서울로 7017’은 1970년에 만들어진 서울역 고가도로를 보수해 자동차가 아닌 보행자를 위한 통행로로 다시 개장한 사례이다. 서울로 7017은 미국 뉴욕의 하이라인 공원을 모델로 설계했다고 알려져 있는데, 개장한 지 1년 만에 방문객 1000만 명을 돌파하며 남대문시장과 서울역 서부 상권의 활성화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고가도로는 속도와 효율성을 중시하는 개발 시대의 산물이자 고도근대(high modernity)의 사고방식을 잘 보여주는 인프라였고, 그 시효는 이제 다한 것으로 보인다. 이제 우리에게 남은 문제는 고가도로를 단순히 철거하거나 도심 공원으로 개조하는 것을 넘어 기후위기 시대에 걸맞은 미래지향적이고 지속가능한 서울 교통 인프라의 모습을 구축하는 일이다.
최형섭 서울과학기술대 교수·과학잡지‘에피’편집위원
■ 용어설명 - 인프라(infrastructure)
기반시설 또는 사회간접자본(SOC)이라고도 불린다. 도로, 철도, 전기, 통신, 상하수도 등 경제 활동 및 일상생활을 원활하게 유지하는 데 필요한 시설을 말한다. 대개의 인프라는 제대로 작동하고 있을 때 사회적 관심에서 멀어져 배경으로 사라졌다가, 정전이나 단수, 포트홀 발생 등 문제가 생겼을 때 모습을 드러낸다는 특징을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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