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아이는 변명도 못 하는데…” [2022 올해의 인물]
〈시사IN〉이 선정한 2022년 ‘올해의 인물’은 ‘이태원 참사를 기억하는 사람들’이다. 2022년 10월29일, 158명이 희생된 이태원 참사는 희생자와 유가족, 생존자와 그 주변 사람들, 일반 시민들의 삶까지 뒤흔들었다. 대형 참사 앞에서 정치와 관료제는 무능했고, 우리 사회는 어떻게 참사를 기억하고 추모해야 할 것인지 근원적인 질문 앞에서 여전히 방황하고 있다. 참사를 추모하는 이들의 아픔은 물론이고 해결해야 할 질문과 과제가 여전히 산적한 상태로 2023년을 맞이한다. 굳건한 연대와 온전한 추모가 이어져야 한다는 뜻을 담아 ‘이태원 참사를 기억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한다.
고 이주영씨(28) 가족은 종종 식탁에 둘러앉아 함께 술을 마시며 이야기를 나눴다. 특별한 일이 없어도 함께 모여 속엣말을 하는 가족끼리의 작은 약속이었다. 10월29일에도 가족들은 술자리를 가졌다. 이주영씨는 그 자리에 함께하지 못했다. 결혼을 앞두고 ‘남자친구와 함께 웨딩플래너 상담을 받겠다’며 점심부터 집을 나선 터였다. 딸에게 전화해 언제 오는지 물으려는 아버지 이정민씨(60)를 어머니 최진희씨(60)가 만류했다. 남자친구가 2주간 해외 출장을 다녀와 한동안 데이트를 못했으니 딸을 방해하지 말라고 딱 잘라 말했다.
가족들이 술자리를 즐기던 시각, 이주영씨는 남자친구 서병우씨(31)와 함께 서울 용산구 한남동으로 향했다. 웨딩플래너 상담을 마치고 저녁을 먹으러 가는 길이었다. 두 사람은 2023년 9월 결혼식을 올릴 계획이었다. 저녁 9시30분 식당에서 나온 두 사람은 이태원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핼러윈 축제가 한창일 이태원을 구경하고 싶었다. 경기도 남양주시에 사는 이주영씨의 지하철 막차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 일대를 한 바퀴 둘러보고 나오면 되겠다고 생각했다.
이주영씨 커플은 이태원역 2번 출구 옆 골목을 통해 이태원 세계음식거리에 접어들었다. 이윽고 해밀톤호텔 옆 골목쯤에 다다르자 서병우씨는 위험을 감지했다. 모든 방향에서 사람이 몰려들어 제대로 움직일 수 없었다. ‘얼른 이곳에서 나가야겠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가장 빠르게 대로변으로 나갈 수 있는 골목이 참사가 발생한 해밀톤호텔 옆 골목이었다. 두 사람은 골목길로 접어들었다. 골목 한가운데서 서병우씨는 ‘벽’을 느꼈다. 인파로 인해 앞의 상황이 보이진 않았지만 무언가 꽉 막힌 느낌이 들었다. 앞, 뒤, 옆 어느 쪽으로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얼마 후 서병우씨는 잠시 기억을 잃었다. “골목이 너무 비좁아서 주영이를 앞에 세우고 어깨 위에 손을 올린 상태로 가고 있었어요. 그러다 잠시 기억을 잃고 정신 차려보니 제가 주영이를 놓쳤더라고요. 기절을 했던 건지, 아니면 제 머릿속에서 기억을 삭제한 건지 잘 모르겠어요. 저도 기억하고 싶은데 아무리 노력해도 기억나지 않더라고요.”
정신을 차린 서병우씨는 서둘러 여자친구를 찾았다. 주영씨는 서병우씨의 대각선 앞쪽 손 닿을 거리에 있었다. 그러나 이미 의식을 잃고 앞 사람에게 고개를 기대고 있는 상태였다. “놀라서 주영이 상체를 당겼는데 그대로 뒤로 누운 것처럼 고개가 제 쪽으로 꺾이더라고요.” 정신을 잃은 이주영씨를 깨우기 위해 서병우씨는 갖은 노력을 다했다. 마스크를 벗기고, 뺨을 때리고, 소리를 질렀다. 선 채로 인공호흡도 했지만 이주영씨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오도 가도 못하는 상황에서 서병우씨는 “숨을 쉬지 않는 사람이 있다”라고 소리쳤다. 하지만 두 사람은 무너지는 인파 한가운데 위치했고, 바깥쪽부터 구조하던 이들의 손은 아직 주영씨가 있는 곳까지 닿지 않았다. 인근 구조자들로부터 물을 나눠 받은 서씨는 여자친구에게, 그리고 주변 사람들에게 ‘정신 차리라’고 소리 지르며 물을 뿌렸다. 반응이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주변에 정말 사람이 많았는데 저처럼 의식이 있던 사람은 한 명밖에 안 보였어요. 나머지는 다 주영이처럼 서서 정신을 잃은 상태였어요. 대부분 압사라고 하면 넘어져서 깔린 것이라 생각하는데, 제 생각엔 그렇게 서서 당한 사람이 전체 희생자의 3분의 2 정도 되지 않을까 싶어요.” 서병우씨는 어느 샌가 꺾여 있던 왼쪽 발을 제대로 세우려고 했지만 그마저도 불가능할 수준으로 인파가 압착돼 있었다.
40분 이상 지났을 시점, 인근 상가 직원들이 “뒤에서 소방관들이 구조 활동을 하고 있으니 조금만 더 버티라”고 외쳤다. 그러나 인파가 빠지는 속도는 더뎠다. 서로 얽혀 있는 데다 의식이 없어 스스로 움직이지 못하는 사람들을 일일이 끌어내는 일은 시간이 오래 걸렸다. 드디어 구조의 손길이 두 사람에게까지 닿았을 때, 서병우씨는 사람들에게 주영씨를 먼저 빼내달라 외쳤다. 그 이야기를 들은 누군가가 주영씨를 빼내 인근 상가로 업고 들어갔다. 이내 인파에서 빠져나온 서씨도 주영씨를 따라 이동하려 했다. 그러나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오랜 시간 꺾인 채로 깔려 있던 다리가 말을 듣지 않았다. 팔로 다리를 들고 옮기듯 하고서야 겨우 주영씨 곁으로 갈 수 있었다.
인근 상가 안에는 이미 스무 명 넘는 사람들이 바닥에 눕혀져 있었다. 이주영씨도 그중 하나였다. 한 소방관이 주영씨에게 심폐소생술(CPR)을 하고, 다른 시민 한 명이 암부백(Ambu Bag, 수동식 인공호흡기)을 누르고 있었다. “저는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애원만 하고 있었어요. 그러다 정신을 차리고 제가 도와드릴 일 없냐 물어보니 소방관 분이 CPR을 할 줄 알면 해달라고 하시더라고요. 자기는 다른 환자를 보러 가겠다고요. 그때부터 제가 주영이에게 CPR을 하기 시작했어요.”
CPR을 하던 중 한 번 세게 인공호흡을 하자 이주영씨의 입에서 토사물이 흘러나왔다. 희망이 보인다고 생각한 그는 손으로 이물질을 빼내고, 다시 CPR을 반복하며 주변 소방관들에게 도와달라고 외쳤다. 한 소방관이 그 소리를 듣고 와 자동제세동기(AED)를 주영씨 몸에 부착했다. 그러나 상태를 체크하던 소방관은 ‘아마 힘들 것 같다’고 말했다. 이 이야기를 받아들일 수 없어 서병우씨는 그저 CPR을 반복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중 한 소방관이 소리쳤다. “안 되면 지연처리(사망자 처리) 해!” 서씨에겐 충격적인 이야기였다. “살 가능성이 높은 사람부터 봐야 하는 것은 저도 알죠. 그런데 저는 포기할 수가 없잖아요. 0.1%의 가능성이라도 있으면 계속해야 하는 거 아닌가 생각이 들었어요. 그 ‘지연’이라는 단어가 절 너무 힘들게 했어요.” 다른 한 소방관은 “끝까지 포기하지 마. 살릴 수 있어. 계속해”라고 소리쳤다. 그 소리에 힘입어 계속 CPR을 했다고 서씨는 말했다.
반복된 CPR로 힘이 빠지고 있던 서병우씨는 주변 시민들에게 도움을 청했다. 몇몇 시민이 이어서 CPR을 해줬지만 이주영씨의 호흡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사이 주영씨의 상태를 체크해준 소방관들은 모두 ‘(소생이) 힘들 것 같다’고 말했다. 패닉에 빠진 서씨는 주영씨의 부모에게 전화를 걸었다. 제대로 상황을 설명하지도 못한 채, 그저 “이태원으로 빨리 오셔야 한다”라고 말했다. 10월30일 0시3분경이었다.
서씨의 전화를 받은 건 주영씨의 어머니 최진희씨였다. 울면서 횡설수설하는 서씨의 이야기가 도통 이해되지 않았다. 아버지 이정민씨가 전화를 이어받았다. “병우아, 진정해. 우리가 어디로 가야 하는지만 말해줘”라고 하자 “이태원”이라는 대답이 나왔다. 아버지 이정민씨는 당시를 회상하며 이렇게 말했다.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어딜 다쳤으면 병원으로 오라고 해야 할 텐데… 왜 이태원일까 싶었죠.”
이주영씨의 오빠 이진우씨(32)는 뉴스를 통해 이태원에서 사고가 벌어졌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동생에게 전화를 해봤지만 연결이 되지 않았다. 어리둥절해하는 부모에게 이진우씨는 “일단 빨리 나가자”라고 말하고 이태원으로 출발했다. “이태원에서 무슨 사고가 났다는데, 그것 때문인가 봐.” 차를 타고 가는 도중 이진우씨가 부모님에게 말했다.
10월30일 오전 1시께 이주영씨 가족은 이태원에 도착했다. 용산구청 인근에 내려서 걸어갔다. 그 길은 여전히 시끌벅적했다. 클럽에서는 음악이 나오고, 사람들은 태연한 모습이었다. 이태원역 근처에 다다르자 완전히 다른 풍경이 펼쳐졌다. 수많은 구급차가 도열해 있었다. 경찰이 도로를 통제하고 있었다. 이주영씨 가족은 앞을 가로막는 경찰들에게 “내 가족이 저기 안에 있다”라고 사정하며 골목 근처까지 들어갈 수 있었다.
골목 초입에 있는 빈 상가는 벽이 통유리로 되어 있어 내부가 훤히 보였다. 그 안에는 사람 약 40명이 누워 있었다. 가족들은 그 속에서 이주영씨에게 CPR을 하고 있는 서병우씨의 모습을 발견했다. 가족들에게 전화를 걸고 나서도, 서씨는 한 시간 넘게 내내 그렇게 있었다. CPR을 하고, 끌어안고 울기를 반복했다. 경찰은 구조 활동에 지장을 준다며 상가 안으로 진입을 허락하지 않았다. 주영씨의 가족은 빈 상가의 통유리 밖에서 서씨가 딸에게 CPR을 하는 모습을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30분가량 지난 후, 서씨도 쫓겨나듯 상가에서 나오게 됐다.
통제선 밖으로 나간 가족들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곤 통유리 안으로 보이는 주영씨가 실려 나오기만을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그러던 중 가족들은 한 소방관이 “이제부터 집결 장소는 원효로 체육관(원효로 다목적 실내 체육관)이다”라고 말하는 것을 우연히 듣게 됐다. 이내 주영씨로 추정되는 시신이 실려 나오는 것을 본 가족들은 바로 원효로 체육관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두 시간가량을 기다렸지만 아무런 답이 없었다. “우리는 유족이다. 일이 어떻게 되고 있느냐”라는 물음에 경찰은 “답변해줄 수 없다. 잘 모르겠다”라는 말만 반복했다. 그러던 중 오전 4시30분께 한 경찰이 “한남동주민센터에 가서 실종자 신고를 해봐라”고 답했다.
“실종자가 아닌데 왜 실종신고를 하라고 하는지 이해가 안 갔죠. 그래도 일단 경황이 없으니까, 하란 대로 했어요.” 이정민씨가 말했다. 가족들은 서병우씨와 한남동주민센터로 가서 신고를 하고 다시 원효로 체육관으로 돌아왔다. 그때부터는 또다시 기다림의 연속이었다. 어느새 동이 트고 있었다.
가족들이 시신을 직접 보고 신원 확인을 할 수 없느냐고 물었지만 돌아오는 건 ‘안 된다’는 답변뿐이었다. 가족들은 원효로 체육관에서 기다리는 건 의미가 없다고 느꼈다. 결국 집에 돌아간 가족들은 쉽사리 잠에 들지 못했다. 희생자들이 병원으로 옮겨지고 있다는 기사를 본 이진우씨는 기사에 나온 병원들에 전화를 걸어 일일이 확인했다. 하지만 허사였다.
그러던 중 한 기사에서 신원을 확인할 수 있다는 경찰 연락처를 보고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받은 경찰은 이주영씨가 의정부 병원으로 옮겨졌다고 말했다. 그때까지도 주영씨 가족에게 온 연락은 없었다. 이진우씨는 “항상 저희가 물어봐서 답을 구하는 형태였지, 먼저 답을 준 경우가 없었어요. 한 달이 넘은 지금까지도 그건 마찬가지예요”라고 말했다. 그렇게 유족들은 의정부 병원으로 찾아가게 됐고, 그곳에서 주영씨의 신원을 최종적으로 확인해 장례를 치를 수 있었다.
3일간의 장례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이주영씨의 부모는 두려움을 느꼈다. 딸이 함께 살던 일상 공간으로 돌아가면 딸의 부재를 인정해야 할 것 같아 무서웠다. 어머니 최진희씨는 ‘미친 사람처럼’ 집 안에 있는 물건들을 버리기 시작했다. 모든 것이 허무했고, 미래를 위해 무언가를 보관한다는 일이 부질없게 느껴졌다. 그동안 딸이 모아왔던 추억들을, 부부의 옷들을 버렸다. 며칠이 지나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후회가 몰려왔다. “지금은 딸이 쓰던 샴푸도 손을 못 대고 있어요. 하나라도 더 남겨놓을걸. 이제는 찾아올 수도 없는 그것들을 왜 버렸을까 싶어요.”
가족들은 자신에게 가장 익숙한 방식으로 슬픔을 견뎠다. 이들은 매일 밤 모여서 술을 마셨다. 그때마다 딸 주영씨 이야기를 했다. “매일 모여서 그랬어요. 잠시 그 자리에 없는 사람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요. 그러면서 서로 웃고 그랬죠. 돌이켜보니까 우리가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잠을 제대로 이룰 수가 없어서 그랬구나 싶어요.” 아버지 이정민씨가 말했다.
그럼에도 이주영씨의 부재를 체감하는 시간은 매일 찾아온다. 아침에 잠에서 깨어날 때면 오빠 이진우씨는 옆방에 귀를 기울였다. 동생 방에서 소리가 날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다. 아버지는 환청을 경험했다. 그는 늘 딸이 귀가할 때까지 기다렸다. 밤늦은 시간이 되면 도어록을 누르는 소리가 들리곤 한다. “아직도 실감이 안 나서 그런가 봐요. 어떤 유족분이 그러더라고요. 아이가 죽은 게 아니라 사라졌다고. 정말 공감됐어요. 여전히 마음 한구석에는 그냥 딸이 잠시 나가 있을 뿐이고 곧 돌아올 것만 같은 기분이 들어요.”
이주영씨는 사업가였다. 딸이 홀로 운영하던 사업을 정리하며 미처 몰랐던 딸의 모습을 많이 알게 됐다고 아버지는 말했다. 부모가 보기에, “고집이 세고,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은 해야만 하는 아이”였다. 그런 모습은 부모에게 때론 불안하고 서툴게 느껴졌다. 그러나 부모의 걱정과 달리 주영씨는 지난 4년간 사업의 내실을 다져놓은 상태였다. 사무실 책상에 놓인 달력에는 상품 발주와 출고, 팝업스토어 참가 일정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시간이 지나고, 매일 하던 ‘주영씨 이야기’가 어느 순간부터 끊겼다. 부재를 체감할수록 후회가 찾아왔다. 특히 사춘기 때 딸과 갈등을 겪었던 기억이 부모의 마음엔 아프게 남았다. 성인이 된 후 몇 번 물어봐도 딸은 매번 ‘서운한 게 없다’고 말했지만, 그 시절을 떠올리면 가슴이 아팠다. 아버지는 내년 가을로 예정되어 있던 딸의 결혼식 직전 딸에게 미안한 마음을 털어놓을 생각이었다. 참사 이후, ‘미뤄둔 사과’는 아버지 이정민씨에게 후회로 남았다.
무기력증에 빠져 있던 가족들을 일으켜 세운 것은 분노다. 이정민씨는 어느 날 인터넷에서 우연히 이태원 참사 관련 기사에 달린 댓글을 봤다. ‘술 먹고 놀다가 그런 건데 뭐가 그렇게 문제냐’는 식의 댓글이었다. “번쩍 정신이 드는 기분이었다”라고 이정민씨는 말했다. “‘이렇게 가만히 있다가는 우리 딸이 맨날 흥청망청 놀면서 인생을 낭비한 사람처럼 매도되겠구나. 죽은 아이는 변명을 할 수도 없는데 얼마나 억울할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다른 유가족들의 사연을 들어봐도 다 열심히 산 아이들이었어요. 저희 애도 허투루 인생을 산 아이가 아니거든요. 내가 이 억울함만은 꼭 풀어줘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이주영씨 가족들은 참사 이후 정부의 대처도 납득할 수 없었다. 정부는 유족에게 먼저 뜻을 묻고 설명하기 전에 일방적으로 언론에 대책을 발표하기 일쑤였다. 그러나 이후 대책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물으면 돌아오는 대답은 ‘아직 준비된 것은 없다. 죄송하다’는 말뿐이었다. 예컨대 행정안전부는 ‘이태원 참사 행안부 지원단’을 통해 유가족협의회의 구성을 적극 지원하겠다고 밝혔지만, 유가족협의회는 ‘협의회를 창립할 때까지 어떠한 도움도 받지 못했다’고 말했다.
어머니 최진희씨는 정부가 자신을 ‘투사로 만드는 것 같다’고 말했다. 반성하지 않는 듯한 정부의 태도에 그는 분노했다. “사실 정부에서 ‘죄송합니다, 저희가 잘못했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위로받고 사그라들 감정이었어요. 그런데 오히려 정부의 대응이 감정에 불을 질러요. 유족을 분개하게 만드는 거죠.”
아버지 이정민씨는 12월10일 출범한 ‘10·29 이태원 참사 유가족협의회’의 부대표를 맡게 됐다. 처음엔 혹시 ‘정치적으로 이용당할까’ 걱정돼 유가족 간담회에 참석하는 것도 망설였던 그는 이제 기자회견에 나서 정부를 향해 유족의 뜻을 전달하기 시작했다. 12월13일 국회에서 열린 기자회견 때도 이씨는 “우리도 유가족협의회를 만들고 싶지 않았다. 우리를 토끼몰이 하듯 몰아놓고 이제는 이 단체를 만들었다며 우리에게 정치색을 씌우려 한다. 이게 맞는 말이냐”라고 성토했다.
이정민씨는 〈시사IN〉과 만난 자리에서 다른 시민들에게 호소했다. “자기 가족이 인파 많은 곳에 가면 혹시나 싶어 다들 불안하지 않겠습니까. 조금이라도 불안함을 느낀다면 이건 절대 남의 일이 아닙니다. 책임질 사람이 책임지고 무거운 자리에 앉은 사람이 무거운 책임을 인지할 때에야 이 전 국민적 트라우마를 내려놓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태원 참사 2차 피해 우려가 있어 이 기사의 댓글 창을 닫습니다.
주하은 기자 kil@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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