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메라 꺼진 뒤에도 소리치며···" '재벌집' 3인방의 '순양가 살이'
"배우들끼리 재벌가 일화 공유" "여러 명 섞여 있지 않나요?"
올해 안방극장에서 가장 주목받은 드라마는 이성민과 송중기가 이끈 '재벌집 막내아들'이었다. 24일 방송 기준(닐슨코리아) 시청률은 25.0%로 지난 여름을 달군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17.5%)를 훌쩍 뛰어넘었다. 현대사를 따라가며 재벌가 이야기를 현실감 있게 다뤄 공감대를 넓힌 게 주효했다는 평이다. '현대판 왕가'를 배우들은 어떤 심정으로 연기했을까. 신스틸러로 활약했던 '순양가 사람들' 김신록, 조한철, 박지현을 25일 종방 직전 각각 따로 만나 촬영 뒷얘기를 들었다.
김신록 "기어가며 조심성 없는 화영 만들어"
순양가의 외딸 진화영은 백화점 VIP를 위한 '인간 마네킹'으로 남동생의 아내를 세워 모욕했다. 다른 사람 기분 같은 건 신경 쓰지 않는, 일생을 '갑'으로만 산 이들만 할 수 있는 패륜이다. 드라마 종방 직전 서울 논현동 소재 카페에서 만난 김신록은 "그간 언론에 공개된 재벌가의 모습을 참고했다. 드라마엔 여러 (재벌가) 이야기가 섞여 있고 (반영된) 인물들도 계속 바뀐다"며 " '난데?'란 마음가짐으로 엉망진창으로 화도 내고 감정의 평균값이 없는 인물로 화영을 연기했다"고 말했다. 그는 애교를 부리고 떼를 쓰는 '괴랄'한 모습을 배역에 더했다. "조심할 게 별로 없는 사람들의 특징"인 변덕을 부각하기 위해서였다.
김신록은 대본을 처음 받았을 때부터 "가부장의 세계에서 딸로 태어나 중요한 일에서 배제돼 온갖 방법을 동원해 고군분투하는 화영의 모습"에 끌렸다. 화영은 그에게 "연기하는 재미"를 줬고 상상력을 자극했다. 9화에서 도준(송중기)에게 백화점 지분을 다 뺏기고 공금횡령 혐의로 검찰 수사까지 받게 되자 화영은 두 발로 기어 그의 아버지 다리를 붙잡고 "돈 빌려주세요"라며 울먹인다. 지문엔 '민망하듯 주저하며'라고 적혀 있었지만 조심성 없는 화영의 모습을 극대화하기 위해 그가 살을 붙여 연기했다.
김신록은 2004년 서울대 졸업 후 극단 드림플레이에 입단해 본격적으로 연기를 시작했다. 그는 넷플릭스 '지옥'(2021)에서 지옥행 선고를 받고 까맣게 타죽은 뒤 알몸으로 부활했다. 파격 연기로 시청자를 사로잡고 있는 그는 석사(2011·한예종) 논문 서문 첫 줄에 '머리로 연기한다는 평가만큼 배우를 좌절하게 만드는 말도 없다'고 썼다. 김신록은 "20대 때 연기하며 많이 듣던 얘기"라고 했다. 30대 초반, 그는 월세 보증금을 빼 미국 시티컴퍼니 등을 찾아갔다. 탐구하며 길을 찾은 18년 차 배우는 요즘 연기론 관련 원서를 읽고 있다. 그는 "연극과 대중 매체를 오가며 작품을 하다 보니 당연하게 생각했던 것들이 궁금해지고 '연기가 뭐지?'란 의문이 들어 모임을 꾸려 공부를 하고 있다"고 말했다.
'순양금융그룹 회장 취임' 조한철의 '중꺾마'
'진동기 순양금융그룹 회장 취임.' 23일 서울 삼청동 소재 카페에서 만난 조한철은 인터뷰가 끝나자 이런 문구가 적힌 수건을 건넸다. 드라마는 끝났지만 진동기의 꿈은 꺾이지 않았다.
하지만, 조한철은 이 드라마를 찍으며 적잖이 가슴을 졸였다. 10화에서 조카 도준에게 당하고 친가로 찾아가 호기롭게 술주정하던 동기는 2층 아버지 서재로 당당하게 올라가다 갑자기 뒷걸음질 치며 휘청거린다. 그는 "이성민 선배가 '왜 소란이고' 라고 고함을 치며 나오는데 그 소리에 정말 깜짝 놀라 주춤한 것"이라며 "아버지가 워낙 버럭을 많이 해 소스라치게 놀라면서 촬영했다"며 웃었다.
그가 연기한 동기도 늘 안절부절못했다. 순양가 4남매 중 셈이 가장 빠른 동기는 화재보험사 경영 관련 큰일을 결정할 때 역술에 의지한다. 이 모순을 조한철은 "그만큼 불안이 크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연기"했다. '배다른 동생'인 윤기를 제외하고 '순수 로열패밀리' 삼남매 중 둘째인 동기가 장남과 막내 사이에 껴 '어떻게 하면 존재감을 보여줄 수 있을까' 전전긍긍하며 산 탓이지 않겠느냐는 게 그의 말.
이 드라마 출연을 결정한 뒤 조한철은 금산분리, 닷컴버블 등 경제사를 틈틈이 찾아봤다. 그는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땐 너무 철이 덜 들어서"라고 웃으며 "영화 '국가부도의 날'(2018) 촬영했을 때 앞서 해둔 경제사 공부가 도움이 됐다"고 했다.
드라마를 통한 재벌가 간접 경험은 25년 동안 연기한 배우에게도 추억으로 남았다. 그는 "촬영장에서 배우들이 '이런 일이 있었대'라며 각자가 아는 재벌가 일화를 들려주고 공유했다"며 "카메라가 꺼졌을 때도 재벌의 느낌으로 화영(김신록)이한테 '네가 어떻게 그럴 수 있어'라고 소리치기도 하면서 소꿉놀이하듯 재벌가 놀이를 했다"며 웃었다.
도준처럼 다시 태어난다면 무엇을 바꾸고 싶을까. 조한철은 "2000년 결혼 직전으로 돌아가고 싶다"며 "연극을 할 때라 수입이 없었는데 돈을 좀 벌어 주위 사람들에게 폐를 안 끼치게 만들어 놓고 싶다"고 했다.
박지현 "꼿꼿한 현민 연기하며 통쾌"
박지현은 지난해 '재벌집 막내아들' 오디션을 봤다. 주어진 대본은 검사 서민영, 신문사 사주 장녀 모현민, 미라클의 애널리스트 레이첼 관련 에피소드. "진취적이고 야망 있는 연기 잘할 수 있겠어요?" 21일 서울 논현동 소재 연예기획사 나무엑터스에서 만난 박지현은 "감독께서 이렇게 물으며 재벌가 딸로 나온 전작 '브람스를 좋아하세요'(2020)를 주의 깊게 봤다고 하더라"면서 "오디션 때 현민이 연기만 하다 왔는데 바로 그 역이 주어졌다"며 웃었다.
순양가의 손주며느리는 원하는 걸 얻기 위해 시할머니도 협박한다. 무표정한 얼굴, 나지막한 목소리에 숨긴 지독한 야망. 그는 "욕망을 여과 없이 보여주는 데 집중"하며 캐릭터의 당돌함을 벼렸고 "현민을 연기하면서 굉장히 통쾌했다"고 한다.
박지현이 꼽은 현민의 명장면은 12화. 진양철과 도준을 청부 살인하려는 미끼로 쓰인 화조도에 대해 얘기하다 남편이 집을 나가고 홀로 남겨진 현민이 화장대 앞에서 머리를 빗는 에피소드다. 박지현은 "기댈 곳 없지만 그래도 꼿꼿하게 자신의 야망에 충실한 모습을 보여주는 장면"이라며 "촬영 시간이 빠듯해 남편이 방을 나가는 것으로 끝내려다 우여곡절 끝에 그 장면을 찍었고 감독께서 편집하며 '감정 잘 보여줘 고맙다'고 연락해 주신 뒤 방송에 내보냈다"며 촬영 뒷얘기를 들려줬다.
이 드라마로 얼굴을 알리기까지 박지현은 수없이 많은 오디션에서 떨어졌다. 2017년 드라마 '왕은 사랑한다'로 데뷔한 뒤에도 "'준비가 덜 됐나' 의심하며 오랫동안 자책"했다. 그는 "오디션은 배우의 장단점을 평가하는 곳이 아니라 감독이 생각하는 캐릭터와 이미지가 맞는 배우를 찾는 곳"이라고 마음을 바꿔 먹은 뒤 자존감을 되찾았다. 드라마와 달리 인터뷰 내내 배우는 웃음을 잃지 않았다. 박지현은 "연기는 너무 재미있었고 재벌가의 삶도 다양하겠지만 현민 같은 재벌가 며느리로는 도저히 못 살 것 같다"며 "이성민 선배가 섬망이 와 엘리베이터에서 실수하는 장면을 보고 정말 많이 울었다"고 했다.
양승준 기자 comeo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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