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베르 마운틴 어워드 수상 남난희] "백두대간 열어 산악인 주권 찾아야"

신준범 2022. 12. 26. 0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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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구적으로 백두대간 알린 공로 ‘알베르 마운틴 어워드’ 한국인 첫 수상
산악인 남난희의 집은 경치가 좋다. 지리산 삼신봉 능선이며 쌍계사까지 계절의 흐름이 드러나는 조망명소다.

"처음 일시종주 나섰을 때가 20대였어요. 그 이후 38년이 흘렀어요. 그런데 누구도 백두대간을 개방하려는 노력을 안 해요. 남한 백두대간 막힌 구간만 100km 정도 되는 걸로 알고 있어요. 백두대간을 완주할 수 있게 열어서, 우리나라에 이렇게 멋진 산이 있다는 걸 외국에 홍보해서 알리고 싶어요."

산악인 남난희(66)가 한국인 최초로 '알베르 마운틴 어워드'를 수상했다. 지난 9월 24일 스위스 베른의 알프스박물관에서 열린 시상식에서 남난희는 공동수상자인 독일 산악인 베른트 아르놀트, 벨기에 산악인 소피 레나에르츠, 뮌헨의 생태학 연구회와 함께 상을 받았다.

1980년대 스타 산악인 남난희가 어떻게 스위스에까지 파급력을 미친 걸까? 그녀는 1984년 76일 동안 태백산맥을 단독으로 일시종주하고, 1986년 네팔 히말라야의 강가푸르나(7,455m)를 등정했으며, 1990년에는 권경업 국립공원 전 이사장과 백두대간을 구간 종주로 완주했다. 그녀가 쓴 태백산맥 종주기인 <하얀 능선에 서면>은 등산인들로부터 큰 반향을 일으켰다. 1994년 지리산 자락에 정착해 산행과 저술 활동에 매진해 8권의 책을 썼다.

벨기에 국왕이자 산악인이었던 알베르 1세(1875~1934)를 기리기 위해 만든 '알베르 마운틴 상'은 등반과 자연보호, 저술 활동 등 산악문화 발전에 두루 기여한 사람이나 단체가 받는다. 킹 알베르 재단에서 시상한다.

수상은 작은 인연에서 시작되었다. 스위스 알프스박물관에서 '북한산에 대한 영화적 접근'이라는 주제로 사진전을 열면서, 한국의 백두대간을 글로 소개해 달라고, 남난희에게 청탁했다. 남난희는 기고문에서 백두대간의 의미를 지리적 측면과 등산적인 면을 넘어서서, 남북을 연결하는 평화의 상징으로 소개했다. 이 기고문을 높게 평가한 킹 알베르 재단은 2년간 남난희씨가 국내에서 해온 활동을 면밀히 살폈고, 수상자로 선정했다. 그녀의 기고문 일부를 보자.

'저는 1984년 1월부터 3월까지 76일간 그 길을 걸었습니다. 당시 군사 지도와 나침반만으로 길도 없는 산을 울며, 넘어지며, 눈 속에 빠지며, 숲을 헤치며, 혼자 걷고, 혼자 끼니를 해결하고, 혼자 자고 일어났습니다. 산이 잠드는 것을 느끼고, 산이 깨어나는 것을 보았습니다. 나무와 이야기하고 바위와 친구가 되었습니다. 원 없이 힘들었고, 원 없이 외로웠고, 원 없이 행복했습니다.

온 몸이 만신창이 되며 도착한 그 곳. 걷고 넘어지며 도착한 그 곳. 남쪽의 마지막 지점에 도착하고 보니 철조망이 가로막혀 더는 갈 수 없었습니다. 산은 이어져 있으나 발길을 돌려야만 했습니다. 지구상 유일한 분단국가라는 사실이 온몸으로 와 닿았고 지구상 가장 가까우나 실제로는 가장 먼 나라인 북쪽을 바라보며 절망했습니다. 울었습니다.

그때는 아직 젊었고 희망을 믿는 저는 자신도 모르게 약속을 하나 하고 말았습니다.

"지금은 돌아가지만 다시 온다. 언젠가는 꼭 다시 와서 산줄기를 이어 완전한 백두대간을 걷겠다."

그리고는 38년이라는 세월이 흐르고 말았습니다. 그 세월 동안 누구도 그 길을 뚫어주지 않았고 지금도 도무지 열릴 기미가 보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저는 이렇게 늙어가고 있습니다. 저는 지금도 간절히 바랍니다. 백두대간을 이어 백두산까지 걸어갈 수 있기를.'

남난희씨는 처음 '알베르 마운틴 어워드' 수상 소식을 듣고 "약간 부담스럽고 의아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제는 수상을 계기로 백두대간을 위한 일을 시작했다. 오랜 산꾼들의 숙원이던 백두대간 개방 말이다.

포석으로 백두대간 관련 법인을 만들려 했으나, 산림청, 환경부, 외교부로부터 다 거절당했다. 이미 산림청에서 허가한 백두대간 관련 법인이 4군데나 있다는 이유에서다. 하지만 남난희씨를 비롯한 대간 종주자들은 "백두대간 개방을 위해 실질적인 노력을 하는 단체는 없다"고 말한다.

"우리나라 국민 중 백두대간을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은 5%도 안 돼요. 산악인도 <산경표>의 기본 원리인 '산자분수령山自分水嶺' 개념을 몰라요. 그래서 교과서부터 바꾸고 싶어요. 주춧돌을 만들어 놔야, 그 다음 사람이 이어받아 진행되지 않겠어요. 영향력 있는 산악인들이 모여서 백두대간 개방을 여론화하는 데 힘써야 해요. 8,000m만 산이 아니잖아요. 우리나라 산은 산도 아니라고 생각하는지. 가만히 있는 산악인들을 납득하기가 어려워요."

백두대간에 관한한 그녀는 이런 말을 할 자격이 있다. '백두대간'이란 단어가 고지도 연구가인 고故이우형 선생에 의해 100여 년 만에 다시 세상 밖으로 나오기 전, 일본 지리학자 고토 분지로의 산맥론이 전부이던 1984년 태백산맥을 겨울에 홀로 종주했다.

뒷마당에서 직접 키운 녹차로 차를 우려내는 남난희. 매일 아침 3시간 산행을 하고, 암자를 찾아 108배를 올린다.

백두대간이 등산인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했던 1990년 전 구간 종주에 성공했다. 히말라야 고봉을 올랐다는 사람은 많이 봤어도, 낙동정맥과 백두대간을 연결한 산줄기(태백산맥)를 1980년대에 동계 단독 일시종주하고, 대간까지 여러 번 종주한 산악인은 없었다. 특히 일시종주기를 적은 <하얀 능선에 서면>은 당일산행 위주였던 당시 등산인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잠깐 1984년 겨울의 남난희가 되어보자.

'어디에고 눈이 많아 허리까지 빠졌다. 눈은 약간 크러스트되어 있어 한 발 옮기고 체중을 실으면 내 몸과 배낭 무게를 못 이겨 빠지고 말았다. 그 빠진 다리를 빼는 데 1분 이상 시간과 그보다 많은 체력이 소비되었다. 다리만 빠지는 언 눈은 다리의 근육을 할퀴었다. 겨울바지에 오버트라우저까지 입고 있어도 눈의 날카로움이 전해졌다. 다리 근육은 칼로 찢는 듯 아파왔다.

산은 무엇인가? 산은 내게 무엇인가? 등산이 건강에 좋다고 했는가. 마음이 넓어진다고, 순수한 스포츠라고, 누가 그렇게 호화로운 수식어를 썼는가? 정신, 육체, 고통, 비교? 어림없는 소리, 너무 편해서 하는 소리, 이것은 그 자체가 고통이다. 고문이다. 지옥이다. 죽음이다. 나는 차라리 전쟁터에 나가겠다. 지옥에 가겠다.

"아아, 하나님, 부처님, 산신령님, 나 좀 도와주십시오. 내게 힘을… 차라리 울 수 있는 용기를 주십시오."

나는 왜 헤어나지 못하는가? 왜 이런 고통을 혼자서 고스란히 감당해야 하는가? 나는 힘이 없다. 꼼짝할 수 없었다. 산은 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꼼짝 없이 산의 노예가 되었다.

"'나를 용서해 주세요. 겸손할게요."

날이 저물었다. 또 집을 지었다. 쓰러지듯 텐트 안으로 넘어졌다. 비로소 운다. 뜨겁게 뜨겁게 또 눈이 온다. 걱정할 기력도 없다.'

*1984년 3월 9일 종일 주행한 총 거리 3km.

인터넷과 SNS가 없던 시절, 20대 여성이 이토록 과감한 산행과 감정 표현을 한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원정보고서처럼 딱딱하거나, 지식이나 필력을 과시하는 글쓰기가 흔했던 시절임을 감안하면, 살아서 펄떡 펄떡 뛰는 남난희 글은 인기를 얻기에 충분했다. 그녀의 종주 일기는 <주간한국>에 연재로 실렸고, 이것을 모아 책으로 발간한 것이 <하얀 능선에 서면>이다.

'알베르 마운틴 어워드' 상장과 메달. 어워드를 주관하는 스위스 킹 알베르 재단은 '어떤 등반을 했는가'보다 '어떤 산악 활동으로 영향을 미쳤는가'를 더 중요시 여긴다.

아들 하늘나라 보내고 1년 매일 통곡

유명 산악인으로 활약할 수 있었으나 그는 1994년 지리산 청학동으로 귀촌했다. 2년간 정선에서 살다 왔으나 30여 년을 지리산 기슭에서 조용히 살고 있다. TV '인간극장' 프로그램에 출연한 적도 있는, 그녀의 전부였던 아들 기범 군과 함께 살았다. 고등학생이던 아들과 백두대간을 종주했을 정도로 산을 선물하고 싶었던 엄마였으나, 2012년 사고로 아들을 하늘나라에 보냈다.

"1년은 매일 방에서 통곡하면서 살았어요. 그 다음해에 마음을 추스렸다기보다, 다른 데 몰두하려고 했어요. 7년 정도 지나니까 아들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되었어요."

2009년에는 지리산에 귀촌한 문화예술인들이 주축이 되어 지리산학교를 만들었다. 염색, 바느질, 목공, 사진, 산야초, 문학 등 저마다 재능을 살려 과목을 개설했고, 남난희씨는 숲길 걷기반과 빡센 산행반을 만들었다. '빡센 산행반'은 하루에 보통 지리산 25km를 걷는 과정인데 마음껏 걷고 싶어서 개설했다.

학생들이 "선생님 힘들어요"라고 외치면 "여기 무슨 반?"하고 그녀가 되묻는다. 학생들이 "빡반요(빡센 산행반의 줄임말)!"라고 하면 "여기선 뭐하지?"라고 물으면 "그냥 걸어요!"라고 답한다. 올해는 지리산학교가 휴강이고, '빡반'도 신청자가 없어 요즘은 못 하고 있다. 코로나로 수입이 없으나 "돈을 거의 안 쓰려 한다"고 말하며 웃는다. 세제 안 쓰고, 샴푸 안 쓰고, 자연에 폐 안 끼치면서, 할 수 있는 한 작게 살고 있다.

남난희는 다시 장거리 걷기를 하고 있다. 미국 PCTPacific Crest Trail(총 4,300km)를 종주했다. 최근 5년간 여름마다 40여 일씩 미국으로 건너가 트레일을 걸어 올해 7월 완주했다.

우연히 지리산에서 1993년 에베레스트 여성대원을 만난 것이 시작이었다. 당시 여성대원을 훈련시킨 대장이었던 남난희를 정건 대원이 알아본 것이다. 세월이 흘러 미국 시애틀로 이주한 그녀는 남 대장을 초대해 매년 30~40일씩 PCT를 함께 걸었다.

"질투가 날 정도로 자연을 망가트리지 않고 그대로 둔 상태에서 길은 편안하게 이어졌어요. 능선을 이어야 하는 규칙도 없으니, 편하고 좋았어요. 다만 항상 물을 정수해야 하고, 사막은 물을 다 지고 가야 하고, 모기떼가 어마어마하고, 곰을 두 번 만났어요. 그런데 사람에겐 관심도 없었어요. 진짜 즐겁고 행복하고 감사한 걷기를 했어요."

백두대간 관리부서로 통합해야

가장 부러웠던 건 자연이 아니라 걷는 사람들의 의식이다. 숱하게 많은 사람이 다니는데도 쓰레기가 전혀 없고, 배변 흔적도 보지 못했다. 배변은 철저히 땅을 파서 묻기 때문이다. 이런 문화가 백두대간에 정착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담아 그녀는 내년에 일시종주를 다시 하려고 한다. 미국 하이커들에게 보고 느낀 것을 적용해 BPL경량백패킹 Backpacking Light 방식으로 수십 일간 산줄기를 다시 걸으려 한다.

"6번 대간을 완주했는데, 늘 사명감에 눌려서 여유가 없었어요. 이제는 천천히 어루만지듯 가고 싶어요."

과거의 남난희는 육체적인 방식으로 백두대간을 선구적으로 걸었다. 이제는 누구나 백두대간을 떳떳하게 걸을 수 있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등산인구 1,500만 있다고 하는데 대간 개방을 위해 목소리 내는 사람이 누가 있나요? 국회에서 누가 노력하나요? 개인들이 모여서 덩치를 키워야 해요. 거부할 수 없고 부정할 수 없는 힘을 만들어야 해요. 백두대간 걸었던 사람들이 다시 머리를 맞대고 산악인의 주권을 찾아야 해요. 산이 막혔는데 가게 만들어야지.

개방은 하되 안전하게 개방했으면 해요. 몰래 가면서 다치는 일 없도록 PCT처럼 인원을 제한하고, 허가제를 해서 우리와 가장 어울리는 걸 만들어야 하지 않겠어요? 백두대간이 환경부, 산림청, 제각각이 아니라 백두대간부, 이렇게 하나의 라인을 만들어서 방법을 찾아야 해요."

눈이 허리까지 빠지는 비탈을 홀로 뚫고 오르던 28세 여성은 40여 년이 흘렀지만, 아직 백두대간에 남아 있다. 지금도 매일 아침 3시간 산행을 하고, 암자에서 108배를 하며 활시위처럼 당겨진 육체와 정신을 유지하고 있다. 백두대간을 속박하는 숱한 규제의 산을 넘어 '단독 일시종주'에 나설 준비를 하고 있다.

월간산 12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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