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0억원만” 투정하던 재벌집 고명딸…‘지옥’의 그 배우?
“‘고명딸’이 뭐, 칭찬이야? (…) 아버지한테 ‘메인 디쉬(요리)’는 오빠들이다, 너는 딸이니까 그냥 구색 맞추기 장식용으로 만족해라! 지금 경고하신 거잖아!”
드라마 <재벌집 막내아들>(JTBC)이 큰 인기를 끈 요인 가운데 하나는 조연 배우들의 맛깔난 연기다. 배우 김신록은 진양철(이성민) 회장의 사남매 가운데 외딸 진화영 역할을 맡아 남다른 존재감을 드러냈다.
진화영은 오빠·조카들을 제치고 ‘순양그룹 총수’가 되고 싶은 욕망대로 행동하는 재벌가 자제. 조카 진도준(송중기)을 견제하려고 도준의 어머니 이해인(정혜영)에게 대놓고 모욕감을 주는 등 자신의 욕망을 날 것 그대로 투명하게 표출하고야 만다. 속내를 숨기지 못하는 탓에 도준의 첫 먹잇감이 되어 큰 실패를 겪지만, 호시탐탐 재기를 꿈꾼다. 김신록은 자칫 전형적인 캐릭터에 머물기 쉬운 진화영을 생동감 넘치는 인물로 빚어냈다.
지난 20일 서울 강남구의 한 카페에서 만난 김신록은 “(진화영은) 오빠들과의 관계 속에서 자기 밥그릇을 챙기려고 굉장히 고군분투하는 인물인데, 정작 자신이 쓸 수 있는 패가 많지 않아서 한계가 명확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는 않는다”며 “이런 감각은 사실 누구나 갖고 있다. (시청자도) 그 마음에 공감해서 ‘(화영이) 못 됐지만 밉지는 않다’ 이렇게 봐주신 게 아닐까 싶다”고 말했다.
“책 읽기와 공부를 좋아한다”는 김신록은 인터뷰 중간에 “사전을 찾아봤다”는 말을 수차례 언급했다. 진화영의 열쇳말은 ‘욕망’. “화영은 욕망이 굉장히 큰 캐릭터죠. 욕망을 사전에서 찾아보니 ‘부족하다고 느껴서 무엇을 더 바라는 마음’이라고 나오더라고요. 그래서 (화영을) 부족하다고 느끼는 사람, 결핍이 많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또 어마어마한 걸 바라는 인물이니까, 그 사이에서 느껴지는 괴리가 있었고요. 움직임, 말하는 방식, 소리, 감정의 폭이 역동성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그런 역동성을 만들어내려고 노력했어요.”
시대 고증을 위해 드라마 헤어·메이크업팀과 상의해 진한 아이섀도와 갈매기 눈썹 등을 활용했다. 김신록은 “화장과 스타일링에 탄력을 받기도 했다”며 “기존에 언론에 노출된 재벌가 여성들의 이미지, 에피소드 등을 영감 삼아 연기한 부분도 있다”고 말했다.
그의 노력대로 진화영의 역동성은 어조, 표정, 눈빛은 물론 몸짓 연기로도 두드러지게 드러났다. 9화에서는 아버지 진양철에게 1400억원을 부탁하며 바짓가랑이를 붙드는 장면으로 화제를 모았다. 철없는 막내딸이 아버지에게 투정 부리는 모습이 사실적이어서다. 김신록은 “바짓가랑이 신을 좋아한다”며 “이성민(진양철) 선배의 연기가 지닌 밀도, 에너지, 진실감 같은 데 빚을 진 바가 큰 장면”이라고 말했다. 대본에는 진화영이 무릎을 꿇는 내용의 지문만 있었는데, 현장에서 촬영하며 ‘몸짓 애드리브’를 더했다.
김신록은 “대본에는 ‘민망한 듯’이란 괄호 속 지문과 함께 “1400억원만 빌려주세요”라는 대사를 하는 것으로 나와 있었다. 촬영하면서 이성민 선배가 저한테서 멀어지길래 너무 다급해서 바짓가랑이라도 잡으려고 움직인 게 슬라이딩까지 하게 된 것”이라며, “민망이고 나발이고 1400억원만 빌려주세요, 하다 보니까 그 순간이 살아있는 게 된 것 같다”고 말했다.
남편 최창제(김도현)와의 알콩달콩하는 ‘잉꼬부부 케미’도 시청자들의 눈길을 끌었다. 김신록은 “최창제와의 모든 장면이 좋았다”며 웃었다. 최창제는 과외선생으로 순양가와 인연을 맺은 가난한 고시생 출신의 검사다. ‘진양철의 사위’로 순양가의 그늘에만 머물지 않으려고 정치에 입문하면서 진화영과의 관계도 변화를 맞는다. “초반 회차 대본에 ‘최창제가 진화영의 핸드백을 들고 따라온다’고 명시돼 있었는데, 그 지문이 최창제와의 관계를 표현하는 데 있어서 영감을 줬어요. 두 사람의 관계가 역전되고 나서는 제가 직접 가방을 들죠.” 1화에서 부부가 “얼씨구”와 “절씨구”를 주고받는 장면은 엘리베이터 문이 늦게 열리는 바람에 하게 된 즉흥연기다.
2004년 연극 <서바이벌 캘린더>로 데뷔한 김신록은 2020년 <방법>(tvN)부터 티브이(TV) 드라마 연기도 병행하고 있다. 지난해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지옥>에서 지옥행 ‘고지’를 받고 사자들로부터 ‘시연’ 당하는 박정자 역할로 얼굴을 널리 알렸다. 박정자는 지독한 가난에 시달리며 자식을 위해 자신의 죽음을 생중계하는 대가로 돈을 받아야 하는 캐릭터. 김신록은 “(진화영 연기를 보며) ‘<지옥>의 박정자인 줄 몰랐다’는 댓글들이 좋았다”며 “<지옥>이 제 인생의 2막을 열어주는 작품 같다는 이야기를 했었는데, 이번 작품은 배우로서 제가 계속해서 변신해갈 수 있다는 기대와 믿음을 심어준 것 같다”고 말했다.
다음 해에도 김신록의 연기를 다양한 매체에서 볼 수 있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스위트홈> 시즌2, 디즈니플러스 오리지널 시리즈 <형사록> 시즌2, <무빙> 등이 공개 예정돼 있다. 그는 “새로운 도전에 열려 있을 수 있도록 계속해서 공부하고 시도해 볼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으로는 지금까지 제가 연기한 인물들이 특수한 상황에 놓여서 주목받기 쉬웠던 게 아닐까 싶어서요. 평범하다고 얘기되는 사람들을 특별하게 보이도록 하는 연기도 해보고 싶어요.”
김효실 기자 tran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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