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도의 숨은 명산 산청 웅석봉] 곰을 닮은 산, 한국 자생 히어리가 지천

김재준 '한국유산기' 작가 2022. 12. 26. 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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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을 연상케 하는 웅석봉.

산마다 푸른 정기가 서렸고 계절이 지나는 호수에 물안개 피어오르는 새벽, 물은 맑아서 명징하다.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은 고요는 적막, 엄숙한 자연의 질서다. 잎을 떨어뜨리는 나무, 은빛 갈대, 개울 속의 조약돌, 들풀 냄새, 겨울 채비를 하는 모든 것이 쓸쓸하다.

웅석봉熊石峰(1,099m)은 산꼭대기 형상이 곰을 닮았다고, 절벽에 곰이 떨어져 죽을 만큼 산세가 험해 곰 바위산으로 부른다. 정상에 제단이 있어 기우제를 지내기도 한다. 경상남도 산청군 산청읍·삼장면·단성면 경계의 험준한 산세와 정상에서 바라보는 조망이 압권이다. 서쪽으로 지리산 천왕봉, 북쪽으로는 산청 읍내가 발아래 있고 멀리 1,000m급 산들의 파노라마, 지리산의 장쾌한 능선을 바라보는 것 또한 즐거움이다. 계곡의 곰골은 암벽 등반으로 많이 찾는다.

만추의 선녀계곡

떨칠 수 없는 선녀계곡의 유혹

너무 일찍 온 것일까? 주차장에 차 한 대 없다. 깊은 계곡 높은 산들이 겹겹이 에워쌌다. 맨 꼭대기 웅석봉이 보인다. 오른쪽 지곡사, 심적사 올라가는 길 두고 왼쪽 개울을 건너간다. 낙엽송이 전봇대처럼 높이 섰다. 15분쯤 걸어 임도 합류 지점부터 지리산둘레길(선녀탕 1.2·내리저수지 0.5km)이다.

계곡마다 단풍의 유혹을 떨칠 수 없다. 히어리·느티·고로쇠·박쥐·난티개암·낙엽송·뽕나무가 지천이다. 오전 8시쯤, 오른쪽이 선녀탕인데 물소리가 산을 깨운다. 한여름 무성했던 나뭇잎 하나둘 떨어지는 낙엽 밟는 길. 바닥에 뒹구는 이파리와 앙상한 나뭇가지를 보면 마음도 같이 쓸쓸해진다.

"시몬, 나뭇잎 떨어진 숲으로 가자. 낙엽은 버림받고 땅 위에 흩어져 있다. 발로 밟으면 영혼처럼 운다. ~ 낙엽은 날개 소리와 여자의 옷자락 소리를 낸다.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

한국의 명수名水라는 선녀탕, 등산 안내판(왕재 1.8·내리저수지 1.1·십자봉 3.7km)에서부터 본격적인 산길이다. 왼쪽으로 물소리 두고 오른다. 히어리·생강나무 노란 이파리가 지난밤 서리에 물들었다. 발밑에 이끼 쌓인 돌과 바위는 파릇하다. 개모시풀·새,비목·누리장·싸리·고추나무가 보인다.

지리산둘레길
웅석봉 들머리 내리.

8시15분 아직도 계곡 물소리가 들린다. 우산나물·조릿대, 고추·작살·좀작살·비목·밤·쪽동백·때죽나무를 만나고 8시40분 샘터에서 잠깐 휴식이다. 얼마나 깊은가? 구중심처 선녀 계곡. 물소리는 나무다리를 따라간다. 흘러가는 너럭바위 주변에 노란 잎은 많이도 떨어졌다. 바위고사리·생강·좀깨잎나무, 산수국은 산간계곡에 잘 자라선지 빼곡하다. 10분 더 지나 두 번째 나무계단. 참나물과 산당귀, 둥굴레·고사리는 여름빛을 잃지 않았다.

9시경 곰이 떨어졌을 법한 바위지대 깊은 너덜겅을 걸어 오른다. 돌계단 위로 다람쥐 쪼르르 달려가고 쑥부쟁이꽃 홀로 피었는데 아마도 이 산의 올해 마지막 꽃이리라. 정상만 바라보며 산을 오르면 무슨 재미? 산길을 걸으면서도 주제가 있어야 덜 지루하다. 오늘은 동그란 잎 히어리에서 의미를 찾기로 했다.

히어리는 백운산·지리산을 중심으로 자라는 우리나라 특산식물이다. 이른 봄 이삭처럼 생긴 꽃송이가 주렁주렁 달린다. 일제강점기 조계산 송광사 근처에서 처음 발견, '송광납판화松廣蠟瓣花'로 불렀다. 꽃이 밀랍蜜蠟 같다고 해서 납판화로 붙인 이름. 광복 후 지역의 사투리 히어리(십오리→시오리→히어리)가 정식이름이 됐다.

9시 반 계속되는 너덜겅, 숨 가쁜 오르막 땀 뻘뻘 흘리면서도 두 팔 흔들어 대니 한결 낫다. 히어리는 나무의 고향인 광양 백운산보다 이곳이 개체수가 훨씬 많다. 부석 같은 돌이 채이고 투구꽃은 잎만 푸르다.

물안개 핀 호수 위의 웅석봉

곰과 선녀가 생각나는 길

9시40분 드디어 능선 안부 왕재(1,005m, 웅석봉 2·밤머리재 3.3·선녀탕 2km)에서 신갈나무·비목·히어리를 만난다. 노린재나무는 아직 푸르다. 산꼭대기에서 한 줄기 빛이 내려오고 바위에 돌을 얹었는데 사람들은 무슨 염원을 했을까? 바위에서 떨어진 곰의 왕생극락을 빌었을까?

곰熊은 인간이 되기 위해 쑥과 마늘을 먹으며 동굴에서 스무하루를 견뎌 여인으로 변해 환웅 사이에서 단군을 낳았다. 곰의 끈기는 인내심이 강한 동물로, 웅녀가 국모 신이 됨에 따라 겨레 여성의 표상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상서롭고 크다는 것과 신국神國의 의미도 있다.

잠시 앉아 쉬려니 떨어지는 나뭇잎이 코끝을 간질인다. 까마귀 창공을 날고 바위산 아래는 단풍 세상 병풍 같은 산들의 파노라마, 산의 끝은 어디며, 하늘 끝은 또 어디인가? 구름이 둥실 떴다. 능선길 노송은 산의 역사를 말하는 듯하고 선녀 계곡 발아래 두고 앉았는데 목욕하던 선녀들은 모두 어디로 갔는가?

발밑에는 여전히 낙엽 밟히는 소리 사각사각, 철쭉·신갈·산앵도·진달래·히어리…. 10시15분 내려가는 길에 웅석봉 닮은 돌이 발에 챈다. 잠시 후 평지와 오르막 내리막이 반복되는 구간의 당단풍나무는 계절을 보내기 싫은 듯 주먹을 움켜쥐고 있다. 초원지대 전나무 숲 너머 정상이 보인다. 10시40분 헬기장(정상 0.3·청계 8.1·밤머리재 5.0·내리 5.0·우물 0.5km) 안부에 닿는다.

웅석봉 정상, 그 너머 지리산 능선.

나무계단 오르는 길, 온 산에 단풍이 들었는데 독야청청 홀로 푸른 전나무 숲이 멋스럽다. 오른쪽 어천 갈림길(어천 2.5·내리 5.3·밤머리재 5.3·청계 8.4km)에서 처음 등산객을 만났는데 반갑다. 지겨우면서도 그리운 것이 사람. 외딴곳에서는 더욱 그렇다.

산불감시초소 지나 곧바로 해발 1,099m 웅석봉 정상에 닿는다. 뒤에 지리산 천왕봉은 구름에 흐리고, 왼쪽으로 산청 읍내, 그 너머 황석산·기백산·황매산·정수산, 오른쪽 아래는 덕천강·경호강이 보인다. 정상 밑에 제단을 만들었는데 산신제를 올리는지 몇 사람 절을 한다. 산청은 원래 '산음山陰'이었는데 조선 명종 때 산청으로 불렸다. 산고수청山高水淸 수곡산회水谷山回, 맑은 물이 굽이치고 높은 산이 감돌아들어 습속이 간소하고 질박하다고 알려졌다.

신갈나무와 붉게 물든 진달래를 두고 내리저수지 방향으로 내려선다. 11시경 바위에 앉아 물 한 잔 마시고 멀리 바라보니 길 따라 흘러가는 물줄기, 이내 밧줄을 잡고 내려간다. 낙엽이 바위를 덮어서 더 미끄럽고 위험한 구간이다. 산 아래 달리는 자동차 소리가 바로 옆에서 들리는 듯 가깝다. 낙엽, 바위, 흙, 가을바람에 하나둘 떨어지는 나뭇잎 쌓인 곳에 오소리굴, 신갈나무 고목 안에 또 다른 나무가 자란다. 아낌없이 주는 나무다.

정상에서 내려보는 사람들

밧줄구간 지나자 바위 능선 올라오던 반대편 계곡 단풍은 곱기도 하다. 내려가는 낙엽 쌓인 능선길. 신갈나무 고목지점(웅석봉1.0·지곡사 3.7km)

11시 반, 이 산에 보기 드물게 소나무가 반갑다. "군계일학이 아니라 신갈나무 무리 속의 소나무, 군신일송이다."

비목은 노랗게 색이 바랬고 피나무는 빨갛게 물들었다. 4시간 넘게 걸으니 술독은 빠진 듯한데 어젯밤은 술집에서 무너졌고 오늘은 산에서 다 망가졌다. 곧 오른쪽으로 어천 갈림길(어천 4.0·내리 4.3·웅석봉 1.2km), 바위 구간 웅석봉을 바라보기 좋은 곳 십자봉일 것이다. 10년 전 이쪽으로 올랐던 바위지대 기억이 생생한데 천왕봉은 아직도 보여 주지 않는다. 대신 검은 바위에 얹힌 소나무 몇 폭의 풍경에 만족하며 단감 한입으로 피로를 달랜다.

그 무렵 점심 연락이 왔다. 어젯밤 함께 밤을 지새우던 목소리, 거울처럼 맑은 경호강鏡湖江변에 어탕국수 잘 하는 집들이 줄지어 있다는 것. 생초에 있는 어서리는 민물고기 동네다. 피라미·메기·빙어·미꾸라지·쏘가리·꺽지·잉어 등 다양한 물고기가 많아 어서리魚棲里, 아니 늘비마을 어서리於西里다.

신갈나무숲의 왕재.

울긋불긋 황홀한 숲길

바위능선 타고 내려가는데 대팻집나무 가지는 배낭을 잡고 늘어져 노란 잎 우수수 떨어진다. 진달래는 서리에 밤새 앓았는지 피를 쏟은 듯 검붉다. 신갈나무 노랗게 물들었고, 검게 퇴색된 철쭉, 노란 히어리, 쪽동백나무는 아직 연록색, 잎이 돌돌 말린 노각나무. 생강나무는 노랗다 못해 눈부시다. 형형색색形形色色, 만산홍엽滿山紅葉 정오를 지나 히어리나무 숲속은 요정妖精이 노란 불을 켠 듯 화사하다. 울긋불긋 황홀한 자태, 나무에 대한 감동으로 숨이 막힐 지경이다. 금방이라도 불쑥 도깨비나 숲의 정령이 나올 것만 같다. 내려갈수록 잎은 확실히 더 크다.

12시20분 '참샘'에는 물이 거의 말랐다. 다 내려온 듯한데 이파리에 낙서를 당한 나무는 잎을 떼어 내려는 듯 안쓰럽다. 목책 너머 임도가 보이고 길가에 핀 쑥부쟁이는 마지막 꽃잎을 흔든다.

12시40분 지름길 같은 갈림길(내리저수지 0.5·선녀탕 1.2km) 5분 더 걸어서 주차장으로 되돌아왔다. 넓은 주차장에 달랑 두 대뿐. 지곡사 거쳐 심적사까지 약수 찾아 한참 올라갔다가 허탕 쳤다. 갈대와 달뿌리풀의 자잘한 흔들림, 일렁이는 잔물결 없이 저수지는 더 맑아졌다. 만추의 단풍, 불을 켠 듯한 히어리 노란 숲속은 아직도 눈에 선하다.

요정이 나올 듯한 히어리 숲.

산행길잡이

산청읍 내리저수지 주차장 ~ 계곡 건너 둘레길 ~ 계곡 ~ 선녀탕 ~ 왕재 ~ 초원지대 ~ 헬기장 ~ 정상 ~ 바위능선 ~ 십자봉 ~ 히어리 군락지 ~ 참샘 ~ 주차장(원점회귀. 약 9.2㎞, 5시간 15분 정도).

교통

대전통영고속도로

산청IC → 산청읍 내리 지곡마을 → 내리저수지(주차장)

국도 3호선

산청읍 → 산청읍 내리 지곡마을 → 내리저수지(주차장)

※ 산청읍에서 내리저수지까지 15분 정도 걸린다.

숙식

산청 읍내에 식당과 숙소가 많다(생초면 경호강 주변 민물고기 식당).

주변 볼거리

동의보감촌, 남명조식 유적지, 남사예담촌, 경호강 비경, 지리산 등

월간산 12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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