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미라는 ‘얼음인간 외치’와 태생이 다른가요[이기환의 Hi-story](64)
미라 하면 고대 이집트의 파라오(왕)인 투탕카멘(재위 기원전 1361∼기원전 1352)을 가장 먼저 떠올리게 되죠.
아홉 살의 어린 나이로 등극한 뒤 불과 9년 만인 열여덟 살에 죽는 바람에 별다른 업적은 기록되지 않은 군주죠. 1922년 영국 고고학자 하워드 카터(1874~1939)에 의해 그의 미라가 발견됨으로써 일약 유명세를 탔죠. 그런데 이집트 미라는 모든 장기를 제거하고 방부 처리하는 인위적인 과정을 거쳤죠. 한마디로 ‘인공 미라’입니다.
얼음인간 ‘외치’가 나타났다 1991년 9월 알프스의 빙하지대에서 유럽은 물론 전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한 ‘자연 미라’가 발견됩니다.
독일인 등산객 부부가 알프스 빙하지대인 외츠탈에서 반쯤 녹은 빙하에 엎어져 있던 시신을 본 겁니다.
분석 결과 기원전 3300년 무렵에 살았던 선사인의 미라라는 사실이 확인됐습니다. ‘외츠탈’에서 발견된 이 미라에는 ‘외치’라는 이름이 붙었습니다. 이후 각 분야 전문가들의 융합연구로 ‘외치’의 정체가 속속들이 밝혀졌습니다.
외치의 키는 160㎝에 몸무게 50㎏ 내외, 45세 O형 남성으로 추정됐고요. 몸에는 수십 군데 문신한 흔적이 보였습니다. 고인의 식생활과 사인 등도 속속 규명됐는데요. 심지어 마지막 식사로 밀과 고사리, 염소와 붉은 사슴 스테이크를 먹은 것까지 밝혀냈습니다. 법의학까지 동원된 사인규명도 흥미로웠습니다. X-레이로 등에 박힌 화살촉을 찾아냈는데요.
분석 결과 외치가 죽기 며칠 전부터 누군가와 격투를 벌였고, 운명의 그날 사망장소까지 올라갔다가 등 뒤에서 누군가가 쏜 화살에 치명상을 입고 쓰러져 숨진 것으로 추정됐습니다.
외치의 소유권을 둘러싸고 오스트리아와 이탈리아가 치열한 법정 투쟁을 벌였습니다. 알프스산맥에 명확한 국경선을 그어놓은 상태가 아니었기 때문이죠. 결국 축구 VAR(Video Assistant Referees)를 연상케 하는 항공사진 판독을 동원했는데요.
그 결과 외치의 발견장소가 ‘이탈리아 쪽으로 93m 정도 들어간 곳’으로 밝혀졌습니다.
외치는 1999년 1월 오스트리아 인스브루크를 떠나 이탈리아 볼차노시의 사우스 티롤 고고학박물관으로 옮겨졌습니다.
댕기머리 소년 미라의 출현 ‘미라’는 남의 나라 이야기일까요. 아닙니다. 한국에서도 외치처럼 모든 장기가 보존된 미라가 종종 발굴되고 있답니다.
유교사회의 독특한 장례문화 중 하나인 ‘회곽묘’에서 주로 나타나는데요. 회곽묘는 석회, 가는모래, 황토를 3:1:1로 섞어 무덤 구덩이와 곽에 싸바르는 무덤 조성 방식입니다. 이렇게 회다짐한 무덤은 돌처럼 단단하게 밀봉됩니다.
조상의 무덤이 물에 잠기거나 동식물 등에 의해 훼손되면 그것이 곧 ‘불효’라 여겼으니까요.
그래서 한국의 ‘자연 미라’는 뇌와 척수는 물론 내부 장기까지 온전히 갖춘 상태로 노출됩니다. ‘얼음인간 외치’처럼 수백년 전의 식생활과 건강, 몸 상태 등과 관련된 정보를 더 얻어낼 수 있습니다. 또 미라 상당수가 가문의 선산에 묻히고, 족보나 비석에 주인공의 내력을 기록하잖아요. 염습의 등 부장품이 있기 때문에 신원을 가늠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습니다.
2001년 11월 15일이었습니다. 경기 양주 해평 윤씨 선산의 무덤을 이장하는 과정에서 미라 1구가 확인됐습니다.
조선시대 회곽묘에서 ‘댕기머리를 한 소년’이 마치 금방 잠든 것처럼 누워 있었습니다. 연구결과 이 댕기머리 소년은 1680~1683년 사이에 4.5~6.6세의 나이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됐습니다. 또 적혈구가 기도 내의 기관지에서 혈병을 형성하고 있었습니다. 내부 장기를 덮는 복막에서 작은 결절이 널리 퍼져 있었습니다. 폐렴이나 폐결핵에 의한 객혈의 흔적이 아닐까요. 이 소년은 결핵균에 감염됐지만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해 사망한 것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출산 도중 사망한 모자 1년 후인 2002년 9월이었습니다. 경기 파주 교하의 파평 윤씨 묘역 중 무연고 묘에서 여성 미라가 확인됐습니다.
미라의 홑바지 옷고름에는 ‘병인년 윤시월’(1566년 윤시월)이라는 명문이 있었는데요. 이 미라의 상태를 지켜본 김한겸 고려대 의대교수 연구팀은 깜짝 놀랐답니다. 죽은 지 440년 가까이 됐는데, 피부의 탄력이 살아 있었답니다. 아직 인체에 수분이 남아 있다는 증거였죠. 무엇보다 심하게 부풀어 오른 옆구리가 수상했습니다. 처음엔 암 덩어리인 줄 알았답니다.
X-레이 촬영결과는 더 충격적이었습니다. 태아의 골격이 보였던 겁니다. 암 덩어리가 아니라 태아가 뱃속에 있었습니다. 한 사람이 아닌 ‘모자(母子) 미라’였던 겁니다. 분만 도중 사망한 산모와 태아 미라가 한꺼번에 확인된 것은 세계적으로 유례없는 일이었습니다. 왜냐면 임신이나 분만 도중에 사망하는 경우 부패 가스가 장기에 차서 태아를 밀어내버리거든요.
출산과정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던 걸까요. 이유가 드러났습니다. 산모의 자궁벽에서 파열 흔적이 선명했습니다. 결국 여인은 출산 직전에 자궁파열에 의한 저혈량 쇼크로 태아와 함께 안타깝게 세상을 떠난 겁니다.
애기부들 꽃가루의 정체 2004년 대전에서 ‘학봉장군’ 미라가, 2016년 경기 의정부에서 ‘김의정’ 미라가 각각 나왔는데요.
두 미라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위와 소장, 대장에서 애기부들 꽃가루가 다량 확인됐다는 건데요. 애기부들은 6~7월 사이 연못이나 강가에서 자생하는 식물이죠. <동의보감>에 따르면 애기부들 꽃가루는 포황(蒲黃)이라는 지혈제로 사용됩니다.
과연 그랬습니다. ‘학봉장군’ 미라는 기관지 확장증과 같은 중증 폐질환을 앓고 있었습니다. ‘김의정’ 미라에서도 왼쪽 폐에서 폐흡충의 성충과 수많은 알이 미라 상태로 확인됐습니다. 폐흡충은 민물고기를 날것이나 덜 익혀 먹었을 때 감염되는데요.
객혈이나 가슴 통증 등을 유발하죠. 결국 ‘학봉장군’, ‘김의정’ 등 두 사람은 피를 토하는 폐질환을 앓았고요. 지혈을 위해 ‘애기부들 꽃가루’를 약으로 먹다가 숨진 것으로 추정됐습니다.
2010년 4월 18일 경북 문경시 흥덕동 회곽묘에서 조선시대 미라가 확인됐는데요.
분석 결과 35~50세 사이에 사망한 키 150㎝ 정도의 여성으로 판명됐습니다. 관 위를 덮고 있던 명정(銘旌·죽은 사람의 관직과 성씨 따위를 적은 기)에 ‘진성이낭지구(眞城李娘之柩·진성 이씨 가문 여성의 관)’라는 글씨가 있었습니다.
이 미라의 직접 사인은 ‘죽상동맥경화증에 의한 심혈관 질환’으로 추정됐습니다. 죽상동맥경화증은 나쁜(LDL) 콜레스테롤이 동맥 안에 쌓이면서 혈관이 좁아지는 질환입니다.
미라는 무연고 시신인가, 문화재인가 물론 이집트 투탕카멘이나 알프스의 외치처럼 세계적으로 유명한 미라는 아니죠.
그러나 한국의 미라는 시신 훼손을 ‘천고의 불효’로 낙인찍는 유교 전통의 사회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남게’ 됐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지금까지 한국에서 인골이나 미라가 그동안 어떤 취급을 받았는지 아십니까.
불과 얼마 전까지 ‘일반 분묘에서 나오는 무연고 시신’(‘장사 등에 관한 법률’ 제4장 제28조)으로 처리되고 있었습니다. 인골·미라의 법적인 지위는 그저 ‘무연고 시신’일 뿐이었습니다. 그랬기에 국내의 인골·미라는 대부분 1차 연구를 마치고 화장 혹은 재매장됐습니다. 이 대목에서 이런 질문을 하는 분들도 있겠네요. 아니 그게 뭐 어려운 일이냐, 수백·수천년 전의 정보를 담고 있는 미라·인골이라면 당연히 ‘문화재(유산)’의 반열에 올려놓으면 되는 것 아니냐, 뭐 이렇게요.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먼저 문화재 보호법이 규정한 문화유산의 개념은 ‘유형문화재는 건조물, 전적(典籍·글과 그림을 묶은 책), 고문서, 회화, 조각, 공예품 등 유형의 문화적 소산’(문화재 보호법 제2조 2항)이라 했습니다.
눈을 씻고 찾아봐도 인골·미라는 ‘해당사항 없음’ 입니다.
게다가 인골·미라를 문화유산이라 해서 국보나 보물로 지정할 경우 예기치 않은 어려움에 봉착할 수도 있습니다.
과학적인 분석을 위해서라면 인골 일부를 잘게 자를 수 있어야 하고, 미라를 해부할 수도 있어야 하잖습니까. 국보·보물에 손을 대면 어찌 됩니까. 유물 파괴 혹은 훼손으로 처벌받게 되겠죠.
무엇보다 ‘죽은 자의 인권’도 보장해줘야 한다는 여론이 만만치 않죠. ‘죽은 자는 말이 없다’고 해서 함부로 문화재니 뭐니 하고 자격을 부여하고, 멋대로 해체하고, 해부하는 행위가 정당하냐, 뭐 이런 주장이 나올 수 있죠.
인골·미라는 ‘중요출토자료’ 그래서 문화재청은 차선책으로 법·제도를 마련했습니다. 인골·미라를 ‘문화유산’으로는 치지 않지만 ‘중요출토자료’로 분류한 겁니다. 2021년 7월 신설된 ‘매장문화재법’(제14조 제2항)은 “발굴기관은 인골·미라 등 역사·학술적인 자료가 출토되면 그 출토 사실을 문화재청장에게 신고해야 한다”고 규정했습니다.
이 법은 “신고된 인골·미라가 무연고이거나 연고자의 동의를 얻은 경우 연구 및 보관조치 할 수 있다”고 덧붙였습니다. 또 ‘중요자료로 분류된 미라·인골을 연구 보관할 전문기관(학교·박물관·의료기관)’을 지정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정리하자면, 인골·미라를 예전처럼 ‘무연고 시신’으로 처리하지 않겠다, 그렇다고 현상변경이 불가능한 문화재(유산)로 영영 묶어둘 수는 없다, 그 중간 단계로 ‘중요출토자료’라는 지위를 부여하자, 그런 다음 역사·학술자료로 충분히 연구·분석·활용한 뒤에 그후의 처리방안을 신축적으로 논의해보자, 뭐 이런 식으로 정리한 겁니다.
한마디로 인골·미라를 ‘무연고 시신’ 취급도, ‘문화유산’ 대우도 아니지만 일단 ‘중요출토자료’의 자격을 부여한다는 겁니다.
파평 윤씨 모자 미라의 운명은? 지난 12월 13일 문화재청은 2021년 7월 신설된 ‘인골·미라법’의 정착을 위한 정책공청회를 열었는데요.
모처럼 제도화된 법과 정책을 관계자들에게 널리 알리고, 원활한 추진을 위한 의견을 수렴하기 위해 마련했답니다.
이 시점에서 몇 가지 해결해야 할 문제를 지적하고 싶습니다. 짧은 기간에 한국 미라학의 토대를 구축하는 데 수훈을 세운 미라들이 있죠. ‘파평 윤씨 모자 미라’ 등 기존 무연고 묘 등에서 출토된 미라의 거취 말입니다. 이걸 해결해야 할 것 같아요.
2021년 신설된 ‘인골·미라법’이 있지만 이 법은 향후, 그것도 발굴현장에서 출토된 인골·미라에게 우선 적용됩니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과거의 수많은 정보를 전해준 미라를 어찌할까요. 물론 지금껏 임무를 완수한 이상 이제는 화장, 혹은 재매장을 통해 영면할 기회를 주는 게 도리가 아니냐는 말도 나올 수 있습니다. 일리 있습니다. 반론도 만만치 않습니다.
이집트 미라에 열광하고 ‘얼음인간’ 외치에 눈길을 돌리면서 정작 한국의 미라는 외면하는 풍조는 뭐냐는 겁니다.
용도 폐기냐, 영면의 기회 부여냐 또 있습니다. 예컨대 ‘파평 윤씨 미라’나 ‘댕기머리 소년(윤호) 미라’가 임무를 완수했다고요? 외치의 경우도 다양한 연구와 첨단 분석 기법 개발로 새로운 성과들이 계속 발표되고 있습니다.
기존의 국내 인골·미라들도 마찬가지랍니다. 외치처럼 잘 보관·전시하고 있다면 얼마든지 새로운 연구성과를 낼 기회가 생깁니다. 며칠 전 고인골(古人骨) 연구자인 김재현 동아대 교수가 인골 400여점을 국립문화재연구원에 기증했는데요. 미라 역시 국립문화재연구원 같은 국가기관에 기증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드네요. 하지만 그게 또 쉽지 않답니다. 국립문화재연구원에 미라를 연구할 인력이 없고, 미라를 보관할 공간(냉동실)도 부족하다는 겁니다. 역시 예산과 인력 문제가 거론되는군요.
이 시점에서 염두에 둘 것이 있습니다. 며칠 전(12월 15일)부터 예술의전당 서울서예박물관에서 네덜란드 국립고고학박물관 소장 이집트 미라를 전시하고 있습니다. ‘얼음인간 외치’를 두고 소유권 다툼을 벌인 오스트리아와 이탈리아의 경우는 또 어떻습니까. ‘파평 윤씨 모자 미라’를 ‘임무 끝’이라 해서 그냥 화장시키는 것이 옳을까요.
이기환 역사 스토리텔러 kh074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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