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민시론] 기록만 남고 기억은 사라지는 시대에 살고 있다
주민들의 ‘장소기억’ 대신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
열심히 장소를 기록한다
지도는 현재형이다.
당연한 소리 같지만 지도는 늘 현재형이다. 길을 찾기 위해 지도 애플리케이션을 켰을 때도, 다양한 목적으로 인쇄된 지도들도, 어린이들이 그린 마을지도도 늘 현재형이다. “예전에는 이 도로가 없었는데 지금은 생겼고요, 그 탓에 100년 가까이 된 나무를 베어버렸어요” 등의 구구절절한 설명은 들어있지 않다. 지금 우리가 기반 삼고 있는 지역의 구조와 길을 집약적으로 보여준다. 요즘에는 워낙 내비게이션 시스템이 잘 되어있어 알려주는 대로 가면 빠른 길을 찾을 수 있지만, 간혹 기억 속 ‘알던 길’을 가다 보면 예상치 못한 장면에 당혹스러울 때가 있다. 얼마 전, 유년시절의 기억이 가득 담긴 춘천 학곡리를 우연히 방문했을 때가 그랬다. 이쯤 터미널 종점이 있고 길을 따라 가다보면 슈퍼가 있고, 빌라가 나오면 우리집인데… 길이 없어졌다. 기억 속의 흙길, 이제 막 깔리던 아스팔트 위로 피어나는 열기, 학곡리 꼭대기에 있던 군부대 차량들의 이미지는 기억 속에만 존재하는 것이다. 지역 주민들의 장소 기억이 형성된 등나무, 슈퍼(라는 이름의 커뮤니티 공간), 다리방(이라는 이름의 놀이터)은 머릿속에서만 생생하게 존재한다. 지도를 켜면 “예전에 이런 게 있었지”라고 얘기해주면 좋겠다고 상상해보지만 누가 좋아할까 싶다. 사람들은 길을 빨리 찾기 위해 지도를 켜니까.
최근 도시공간과 공간인지 대한 연구 중 흥미로운 연구결과가 있었다. 애플리케이션 기반 길찾기 기능 도입과 동시에 도시여행자들이 도시를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고 ‘랜드마크’, ‘큰 길’, ‘교통인프라’를 중심으로 기억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도시의 광장, 지구(District), 결절점, 통로 등은 어디론가 가기 위한 ‘수단’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보니 이들이 가진 우연성의 가치가 확연히 떨어지게 된다. 이를테면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접점의 기능이 대폭 축소되는 것이다. 인간과 환경이 소통하면서 만들어내는 ‘장소성’, ‘장소기억’의 기능은 쇠퇴하고, 스마트폰이 대신 열심히 장소를 기록하는 것이다. 실제로 스마트폰은 몇초에 한번씩, 점으로 우리 활동을 기록해 준다고 한다. 기억 대신 자동 기록에 의존하는 삶이다. 휴대폰이 꺼지기라도 하면 세계를 잃어버린 사람처럼 불안에 떨곤 한다. 그렇지만 그제야 고개를 들고 건물을, 길을, 하늘을, 사람을 보게 되는 것이다. 내가 가진 감각을 총동원하여 주변을 둘러보게 되니 애플리케이션으로 길을 찾을 때보다 많은 것이 머릿속에 기록된다.
지난 8∼11월 춘천의 비밀기지를 사색하고 자신만의 관점으로 도시를 기록하는 ‘도시편집자’ 프로젝트를 기획·운영했다. 전주에서 활동 중인 김성혁 센터장(놀라운 예술터&뜻밖의 미술관)이 총괄 PM으로 참여한 가운데 춘천지역 도시편집자 16명이 도시기록을 함께 탐구한 시간이었다. 그중 내가 잘 아는 장소도 있었고, 한번도 가보지 않았던 장소도 있었다. 프로젝트가 진행되는 동안 나는 가급적 애플리케이션 없이 머릿속으로 장소를 찾아보고자 했다. 예전에 살던 어느 한 시점의 우리집을 출발점으로 삼아 학교를 지나 목적지까지 도착하는 형태의 길찾기를 했다. 놀랍게도 유년시절에서 학창시절까지 그 거리에서 만났던 사람들, 점포들, 교통수단, 계절의 냄새 등이 떠올랐다. 서랍 깊은 곳의 일기장을 꺼내면 더 구체적인 기억이 살아날 것이었다. 아무튼, 도시편집자들의 옛 기억과 도시 기록이 진행됨에 따라 저마다 ‘맞아’, ‘그 앞엔 육교가 있었어요.’ 등의 집단기억이 우리를 한 시대로 엮어주고 있었다. 집단기억은 결국 지역주민의 커뮤니티와 정체성, 문화와도 밀접하게 연관되기에 많은 도시들이 ‘장소성’에 대해 언급한다. 그러나 그 ‘장소성’이 지역을 사는 시민들의 관점에서 해석되고 기록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남는다.
‘도시편집자’의 기록물은 두차례 전시되었는데, 어떤 분은 자신이 살아온 시대를 쭉 나열해 보는 것 같아서 마치 앨범을 들여다보는 기분이었다고 했다. ‘앨범’이라는 단어가 무척 낯설게 느껴졌다. 최근에는 스마트폰 ‘갤러리’, ‘사진첩’이 더 익숙하기 때문이었다. 스마트폰을 쓰면 언제든, 어떤 형태로든 쉽게 기록하고 기억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그 기능으로 무엇을 기록하고자 하는지는 잘 모르겠다. 정작 나의 ‘앨범’만 해도 손으로 쓰기 복잡한 글들을 촬영해서 기록하고, 인증을 위한 사진기록이 더 많지 않았나. 심지어 어떤 때에는 ‘왜 이걸 찍었지?’, ‘왜 이런 메모를 했지?’ 싶은 기록들이 수두룩하다.
기록만 남고 기억은 사라지는 시대에 살고 있다. GPS는 우리의 생활패턴을 기록해주지만 일상을 기억해주진 않는다. 이번 주는 스마트한 스마트폰을 내려놓고, 조금은 허술한 ‘나’의 시선과 감각으로 주변을 기록해보는 건 어떨까.윤한 소양하다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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