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할 오늘] 무덤 없는 '누벨 프랑스'의 개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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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스부르크 왕국과 프로이센의 '7년 전쟁(1756~1763)'을 작은 세계대전이라 부르는 까닭은 유럽의 거의 모든 국가가 참전해 유럽과 해외 식민지에서 벌인 전쟁이기 때문이다.
오랜 앙숙 영국과 프랑스는 북미 식민지 캐나다를 두고 '프렌치 인디언 전쟁'(1754~1763)을 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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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스부르크 왕국과 프로이센의 ‘7년 전쟁(1756~1763)’을 작은 세계대전이라 부르는 까닭은 유럽의 거의 모든 국가가 참전해 유럽과 해외 식민지에서 벌인 전쟁이기 때문이다. 오랜 앙숙 영국과 프랑스는 북미 식민지 캐나다를 두고 ‘프렌치 인디언 전쟁’(1754~1763)을 벌였다. 영국이 승리했고 프랑스는 한때 북미 대륙 동쪽 절반에 이르던 ‘누벨 프랑스’의 모든 땅을 잃었다. 그 거점이 퀘벡(Quebec)주다.
누벨 프랑스의 개척자로 퀘벡 초대 총독을 지낸 프랑스 탐험가 사뮈엘 드 샹플랭(Samuel de Champlain, 1567 ?~1635.12.25)은 퀘벡 주민 절대 다수인 프랑스계 시민들이 ‘건국의 아버지’로 받드는 인물이다. 상선 선장의 아들로 태어나 프랑스-스페인 전쟁에도 참전한 그는 국왕 앙리 4세의 명령으로 북미를 여러 차례 탐험하며 세인트로렌스강 물줄기를 중심으로 한 대륙 동부의 광대한 지도를 그렸고, 항해 기록과 현장 풍물 및 자연을 기록했고, 퀘벡 정착지를 건설함으로써 ‘누벨 프랑스의 영광’을 개척했다. 숨을 거둔 곳도 퀘벡이었다. 지금도 그의 이름을 딴 거리와 장소, 건축물이 허다하고, 동상과 기념비들이 서 있다.
하지만 정작 그의 무덤은 없다. 그의 시신은 별도의 능묘가 건설될 때까지 퀘벡의 한 성당 부속건물에 안치됐지만, 1640년 성당이 화재로 소실되면서 묻히지 못했고, 재건된 성당 공동묘지에 묻혔으리라는 추정만 있을 뿐 정확한 기록이나 흔적이 사라졌다. 1850년대 도시 상수도 공사 도중 그의 이름을 새긴 석관이 발견됐다는 기록이 있지만, 어디에 안치했는지 기록한 문서는 없다. 프렌치 인디언 전쟁으로 퀘벡의 주요 건물들이 파괴된 점, 영국 통치가 시작된 점 등이 그의 흔적을 지우는 데 일조했을 것이다.
사학자들은 문헌과 고지도 등을 근거로 오늘날 몽모랑시공원 국립사적지 지하 어딘가에 그의 석관이 있으리라 다만 짐작하고 있다.
최윤필 기자 proos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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