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만한 당신] 기부자들을 야단친 자선활동가

최윤필 2022. 12. 26. 0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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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는 개인의 삶과 운명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가장 너른 공적 영역이다.

법은 시민의 의무에는 한없이 엄격한 반면 국가의 의무, 국가가 보장해야 할 시민의 권리에는 대체로 너그러웠다.

그가 태어나 성장한 20세기 전반부는 혈통(민족)이 국가보다 더 개인의 삶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던 광기의 시대였고, 나치 집권 이전부터 유대인과 롬인(Roma, 집시)에 대한 핍박이 유난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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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blo Eisenberg(1932.7.1~ 2022.10.18)
파블로 아이젠버그는 공직자로서 20대 말부터 해외 봉사를 시작해 평생 자선 기부 관련 비영리단체에서 일한 활동가다. 그는 70년대 기부자들의 자선 연구모임인 '파일러 위원회'의 편협함을 비판하며 자선-공익사업은 시혜-수혜의 우열적 관계가 아닌 대등한 파트너십으로 기획되고 실천돼야 한다는 윤리적 원칙을 정립하고 누구보다 힘차게 실천했다. 그는 '밥 주는 사람(기부자)의 손도 서슴없이 깨무는 사람'으로 유명했다. mccourt.georgetown.edu

국가는 개인의 삶과 운명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가장 너른 공적 영역이다. 둘의 관계는 개인이 태어나는 순간부터 권리-의무의 사회계약을 통해 운명적으로 성립된다. 냉정히 말해 실존적 개인이란 관념의 허상일 뿐, 우리는 사회 구성원으로서 즉 ‘시민’으로서 존재한다.
하지만,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어느 세대 어떤 시민도 온전한 국가를 가져본 적이 없다. 법은 시민의 의무에는 한없이 엄격한 반면 국가의 의무, 국가가 보장해야 할 시민의 권리에는 대체로 너그러웠다. 16세기를 기점으로 잡는 근대 국가 500년 역사는 한마디로 ‘국가 실패의 역사’였고, 국가의 실패는 곧 시민의 고통이었다. 그 사이 공산주의자들이 내세운 국가 소멸의 이상도, 아나키스트들이 시도한 무정부주의 공동체 실험도 무참히 실패했다.
그 대안으로 20세기의 시민들이 국가를 감시-비판하고 보완하고자 만들어낸 장치가 비정부기구(NGO)다. 흔히 박애(philanthropy)라 불리는 기부와 자선이 종교 단체나 독지가 개인의 선행을 넘어 시민의 일로, 재단이나 비영리단체로 조직화- 제도화한 것도 20세기부터였다.

미국 비영리 기부 자선 매체 ‘The Chronicle of Philanthropy’는 ‘철강왕’ 앤드루 카네디(1835~1919)의 말 한마디로 자선의 20세기가 시작됐다고 설명한다. “부유한 자들이 잉여 재산을 사회적 명분을 위해 쓰지 않고 죽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다.” 19세기 말 이른바 ‘도금시대’ 산업 성장의 상징적 존재인 카네기는 독과점과 노동 탄압으로 ‘강도 남작(robber baron)’이란 오명으로도 불리지만, 1901년 은퇴 후 거의 전 재산을 공공도서관 건립과 문맹 퇴치, 교육-연구사업에 쏟아부었고, ‘부의 복음(The Gospel of Wealth, 1889)’ 등 에세이와 저서를 통해 부의 공적 책임을 부각했다.
하지만 그 배경에도 19세기 말 유럽서 밀려온 수많은 이민자와 남부 흑인 노동자의 비참, 그 현실에 개입하지 못한(않은) ‘국가의 실패’가 있었다. 금융가 러셀 세이지의 상속녀인 마거릿 올리비아 슬로컴 세이지(Margaret Olivia Slocum Sage)가 1907년 미국 최초로 ‘러셀-세이지 재단’을 설립해 빈민 주택 구제사업을 시작했고, 사회사업가 에밀리 비셀(Emily Bissell)이 그해 크리스마스 실을 발매했다. 1909년 전미유색인종지위향상협회(NAACP)가 만들어졌고, 카네기 재단(1911)과 록펠러 재단(1913)이 잇달아 출범했다. 첫 지역기반 자선단체(커뮤니티 재단)도 1914년 클리블랜드에서 탄생했다.
1913년 ‘개인 소득세’를 걷기 시작한 미 의회가 4년 뒤 기부금 세금 공제제도(기업 공제는 1935년)를 도입하면서 시민 기부의 제도적 발판이 마련됐고, 1919년 YMCA를 시작으로 모금을 전담하는 조직과 단체들도 잇달아 만들어졌다. 연방-주 정부는 공적 서비스 대행계약 등을 통해 비영리 단체를 지원했고, 2차대전 전후 경제성장과 60년대 중산층의 확대 등으로 비영리 자선단체는 비약적으로 성장했다.

비영리단체의 수적 팽창과 더불어 변질과 타락 사례도 늘어났다. 영리 활동을 무색케 하는 과열모금 경쟁, 불투명한 운영, 세제 혜택과 국가 감시의 허점을 악용한 사이비 자선단체들도 우후죽순 생겨났다. 1960년 미국의 기업 재단은 약 1,200여 개에 달했고, 상당수는 탈세 창구에 불과했다. 1969년 의회는 청문회를 열고 비영리단체 조직 운영 등의 세금 혜택 기준 강화 등을 골자로 한 세금개혁법을 마련했다. 텍사스 등 미국 여러 주들도 각각 비영리단체 목줄 죄기에 나섰다.

록펠러 3세(John D. Rockfeller III)가 자선 경영인으로 이름난 에트나 보험회사 CEO 존 파일러(John Filer)를 의장으로 ‘민간자선 및 공공수요 위원회(일명 파일러 위원회)’를 구성한 게 그 무렵인 1972년 말이었다. 재단 및 자선단체가 스스로 활동 취지와 원칙을 점검하고, 세제 등 제도적 장치에 대한 대안을 마련하기 위해 구성한 민간 자율기구. 기업인과 종교인, 전직 관료, 시민단체 대표, 교육자, 재단 대표 등 비영리 자선분야의 명망가 23명이 위원으로 참여했다.

20세기 들어 자선-기부 활동도 종교단체나 일부 독지가의 선행에서 벗어나 시민 일반의 몫으로 조직화-제도화됐다. 아이젠버그는 국가의 실패, 즉 경제 정의와 복지의 구멍을 비영리 자선활동으로 메울 수 있다고, 세상도 바꿀 수 있다고 믿었다. pxhere.com

73년 1월, 그들의 야심찬 출발에 찬물을 끼얹는 글 한 편이 ‘그랜츠맨십 센터 뉴스’라는 무명 잡지에 실렸다. ‘파일러 위원회’는 최상층 기부자들의 협소한 관점과 이해를 대변하는 엘리트 집단일 뿐이며, 정작 자선 활동의 가치를 구현할 수혜자들의 입장과 요구는 철저히 무시되고 있다는 게 글의 요지였다.
그 글의 필자가 당시 만 40세 무명의 자선활동가 파블로 아이젠버그(Pablo Eisenberg, 1932.7.1~2022.10.18)였다. 위원회가 자선활동의 공적 책임과 형평성 등의 문제를 원천적으로 외면하고 있다는 그의 주장이 주요 언론에 소개되면서 대중적 호응을 얻었고, 그 덕에 수혜자 및 영세단체 대표(일명 도니 그룹)들이 대등하게 논의에 참여했다. 자선이 시혜-수혜의 우열관계가 아닌 대등한 파트너십에 기초해야 하고, 실천이 시혜자의 일방적 선택과 판단이 아니라 협의의 산물이어야 한다는 원칙이 그렇게 만들어졌다. 75년 위원회 최종 보고서 발표 후 그는 기부- 자선의 윤리 및 효율성에 대한 상설 감시기구인 '대응적 박애를 위한 전미위원회(NCRP)'를 설립했다. 그리고, 기부자들의 특권의식과 생색내기식 활동, 기부편의주의를 끊임없이 비판하며 어려운 이들의 권익을 대변했고, 자선을 통한 사회의 변화를 추구하는 조직 ’센터 포 커뮤니티 체인지(Center for Community Change)’를 만 23년간 이끌었다. 20세기 기부-자선의 윤리적 원칙을 정립한, 약자의 대변인 아이젠버그가 별세했다. 향년 만 90세.

그는 유대인 부모의 1남1녀 중 장남으로 프랑스 파리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나 성장한 20세기 전반부는 혈통(민족)이 국가보다 더 개인의 삶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던 광기의 시대였고, 나치 집권 이전부터 유대인과 롬인(Roma, 집시)에 대한 핍박이 유난스러웠다. 무명 첼리스트였던 아버지는 나치가 프랑스를 점령하기 직전인 1939년 9월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도피, 뉴저지 주 메이플우드(Maplewood)에 정착했다. 아이젠버그는 프린스턴대(1954년)와 영국 옥스퍼드 머튼 칼리지(57년)를 졸업했다. 유년의 꿈은 아버지처럼, 아니 자신의 대부인 파블로 카잘스처럼 유명한 첼리스트가 돼 ‘스트라디바리우스’를 연주하는 거였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첼로보다 테니스로 두각을 나타냈다. 그는 두 대학 테니스부 주장을 맡아 윔블던 복식 본선에 5차례 출전해 55년 4강에 올랐고, 앞서 53년엔 유대인 올림픽이라 불리는 ‘마카비아 대회(Maccabiah Games)’에서 테니스 복식 금메달을 땄다. 그는 54년 기준 미국 테니스 복식 랭킹 9위였다.

아이젠버그는 대학 졸업 후 육군에 입대해 만 2년 복무를 마친 뒤 미국 정보국(USIA)에 취업해 1960~63년 아프리카 세네갈에서 근무했다. USIA는 냉전기 미 국무부가 제3세계를 우방으로 포섭하고자 운영한 일종의 대민 문화홍보기구. 그는 아프리카 청소년들의 문화교류 프로그램인 ‘아프리카 교차로작전(Operation Crossroad)’의 프로그램 책임자로 만 2년 일했다. 그 활동은 이후 J.F. 케네디가 조직한 ‘평화봉사단’의 준거모델이 됐다. 이후 그는 연방 경제기회평등국(OEO) 펜실베이니아지부 국장 등 여러 공직을 거쳐 다양한 민간 비영리단체에서 이력을 쌓았다.
USIA 시절, 구소련(러시아) 공연팀이 세네갈에서 공연을 펼친 일이 있었다. 미국 팀들과 달리 러시아 팀은 현지인들이 좋아하는 곡들로 레퍼토리를 편성해 자국어가 아닌 현지어로 노래했고, 진행자도 프랑스어를 구사했다고 한다. 그는 현지 문화와 수요에 맞춰 기획된 러시아 팀의 공연과 그간 미국 팀이 보여온 우월적 태도와 자국 중심 공연을 비교, “러시아인들이 냉전에서 승리하고 있다”는 요지의 보고서를 만들어 직속 상관뿐 아니라 국무부 고위 관료들에게 한꺼번에 발송했다. 그는 세네갈 대사의 적극적인 중재 덕에 해고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훗날 한 인터뷰에서 그는 “다치지 않고 진짜 하고 싶은 말을 하려면 최대한 많은 이들이 들을 수 있도록 큰 소리로 말해야 한다”고 농담처럼 말했다.

75년의 파일러 위원회 비판도 그런 예였다. 록펠러의 세무담당 변호사 출신인 당시 위원회 사무국장(Leonard L. Silverstein)은 아이젠버그의 ‘간섭’을 못마땅해 하며 사사건건 트집을 잡곤 했다고 한다. ‘도니 그룹’이 논의에 참여할 수 있게 된 것은 위원장 존 파일러 덕이었다. 파일러는 두 번째 회동 때 아이젠버그에게 “위원들이 읽을 수 있도록 공식 제안서를 작성해달라”고, “대신 그런 사람들(corporate types)은 긴 글은 잘 안 읽으니까 3, 4페이지 이내로 되도록 짧게 작성해달라”고 청했다고 한다.

토론회 패널로 아이젠버그를 자주 만났다는 미국 보수 싱크탱크 ‘허드슨위원회’의 윌리엄 샘브라(William Schambra)는 “아이젠버그는 자신에게 먹이를 주는 손도 서슴없이 무는 사람으로 유명했다”고, “자기 단체 기부자에게도 인색하다고, 부끄러운 줄 알라고 호통을 치기 일쑤였다”고 말했다.

성노예로 납치되거나 팔려가는 여성과 소녀들을 돕는 '소말리 맘(Somaly Mam, 사진 오른쪽 ) 재단' 홍보 사진. 배우 앤젤리나 졸리, 수전 서랜던, 페이스북 COO 셰릴 샌드버그 등의 지지를 받던 재단은 하지만 2014년 뉴스위크 등의 탐사보도를 통해 활동내역과 사연 대부분이 허구이거나 조작된 것으로 들통났다. 2009년 타임지 선정 '가장 영향력 있는 100인'에도 선정됐던 설립자 맘은 2014년 재단을 청산했다. betterplace.org/

그는 후원재단 운영주체인 이사회를 자주 비판했다. 2006년 NPR 인터뷰에서 그는 “그들은 대부분 갑부들이거나 미국서 최고의 연봉을 받는 전문가들이다. 평범한 교사나 종교인, 풀뿌리단체 대표나 사회봉사자, 노동조합원과 소상공인들의 자리는 거기 없다”고 말했다. 그는 “예컨대 ‘당신처럼 좋은 대학 나온 신사가 하층민들(great unwashed) 일에 왜 그렇게 집착하는지 이해를 못 하겠다’고 말한 파일러위원회 사무국장이 그런 예”라고도 말했다.

그는 박애주의자라 불리는 걸 좋아하는 자산가들과 재단 운영진을 싸잡아 ‘배짱 없는 생색쟁이들(gutless wonderers)’이라 부르곤 했다. 아이비리그 대학들이나, 이미 부유한 대형 병원들, 후원자들이 줄을 선 박물관에 돈을 퍼주면서 세제 혜택이나 받으려는 자들이라는 의미였다. 사모펀드 칼라일 그룹 창업자 데이비드 루벤스타인이 2012년 워싱턴D.C 국립동물원 판다 후원금으로 450만 달러를 기부한 일이 있었다. 언론도 그의 선행에 박수를 보냈지만, 아이젠버그는 “그의 돈이 더 가치 있는 일에 쓰여야 하는 것 아니냐고 묻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며 언론까지 비판했다. 앞서 97년 뉴멕시코 주 샌타페이에서 열린 한 콘퍼런스에서 그는 '배짱 없는 생색쟁이'들을 떠받드는 언론인들을 ‘치어리더들’이라고, 큰손 후원자들에게 굽실거리는 대학들을 ‘고등교육 카스트제도’를 지탱하는 집단이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대형 자선단체들도 그의 비판을 면치 못했다. ‘후원금으로 호화로운 사무실을 꾸며 놓고 앉아 고액 연봉을 받으면서 장작 자선사업은 뒷전인 단체들’이 그의 타깃이었다. 그런 와중에도 자선단체의 후원금 전용 등 추문 사례는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보스턴칼리지 로스쿨 교수 레이 매도프(Ray Madoff)는 “스스로 선행을 베푼다고 자부하던 소위 큰손 기부자들에게 그는 무척 성가시고 못마땅한 존재였다”고, “더러 후원을 끊겠다고 협박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그는 결코 목청을 낮추는 법이 없었다”고 말했다. 그에게 기부와 자선은 더 나은 사회를 만들기 위한 시민의 의무이자 권리였고, 후원금 못지않게 수혜자들의 존엄과 자존감이 중요했다.

재단의 구성과 운영방식도 점차 변화했다. 이사진에 참여한 여성과 비백인 비율도 점차 높아졌다. 하지만 그는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라고, “그들 여성과 비백인들 역시 계급적으로는 예전 엘리트 풀의 일원일 뿐이며,(…) 삶의 경험으로 자선-후원의 가치를 체험해본 적 없이 특권적 생활을 누려온 이들”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영리 기업들처럼 성공지향적으로 운영되는 비영리단체도 많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위험을 감수하며, 장기적인 비전을 갖고 프로그램을 기획하지 않는다”고도 비판했다. 그것이 자선기관들이 열정을 상실한 이유이고, 비영리 집단에 대중이 분노하는 이유라고 주장했다.

아이젠버그는 1998년 6월, 만 23년간 이끌어온 ‘CCC’ 사무총장직에서 물러났다. 고별 파티에서 한 자선단체 대표는 그에게 망치를 선물했다. 망치질 같은 비판으로 자신을 두드려 패준 데 대한 보답이었다. 그 무렵 인터뷰에서 그는 “이제 더 이상 재단들에게 후원을 부탁하러 다니지 않아도 된다는 게 가장 큰 위안”이라고 말했다.
은퇴 후 그는 조지타운대 공공정책대학원 겸임교수직을 맡아 학생과 현역 활동가 등을 대상으로 강의하며 2004년 책 ‘비영리 박애의 도전’ 등 책과 칼럼을 썼고, 여러 비영리단체를 위해 자문했다. 현역 시절 출장 때마다 가장 싼 항공권을 검색해서 구매하고 저가 호텔에서만 머물렀고, 경비를 아끼기 위해 단체 법인 차량을 마다하던 그였다. 그는 대학 급여 일부와 자문료 대부분을 조지타운대에서 공익사업을 전공하는 학생들의 장학금으로 기탁했다. 조지타운대 매코트 공공정책대학원은 2006년 그의 40여 년 사회경제적 정의를 위한 헌신을 기려 '아이젠버그 공익 펠로십'을 제정했다. 그에겐 만 62년 해로하고 연초 작고한 아내(Helen Cierniak)와 딸(Marina)이 있었다.

평생 건강한 기부와 후원이 세상을 바꾸는 데 기여하리라 희망하고 믿었던 그의 모토는 “세상은 나서는 이들에 의해 움직인다”는 거였다고 한다.

최윤필 기자 proos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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