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멸의 씨앗 키워왔다…노동운동의 초심과 변심[朝鮮칼럼]

전상인 서울대 명예교수·사회학 2022. 12. 26. 0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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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바 ‘안전운임제’의 기간 연장 및 품목 확대를 요구하며 시작된 화물연대 파업이 보름여 만에 막을 내렸다. 하지만 그걸로 모든 게 끝난 것은 아니다. 후폭풍으로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노총)이 전대미문의 위기를 맞고 있기 때문이다. 산하 공공운수노조 소속 화물연대를 지원하기 위해 민노총은 총파업 카드까지 꺼내 들었으나 결국 ‘백기 투항’으로 마감했다. 1995년 11월에 발족한 민노총이 자진 파업 철회로 정부에 완패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에 대해 ‘업무개시명령’ 등 법과 원칙에 입각한 정부의 강경 대응이 통했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하지만 그것이 먹힐 정도로 그동안 민노총 스스로 자멸의 씨앗을 키워온 측면도 간과할 수 없다. 언제부턴가 민노총은 노동운동의 정도(正道)에서 한참 벗어나 왔다. 막강한 ‘노동 권력’으로 자라나 노동자들의 먹고사는 문제보다 정치 파업에 더욱더 열심이고 진심이었다. 그러는 사이 조직 자체는 ‘괴물’처럼 변했다. 이른바 ‘노동 귀족’이 노동운동 전반을 사유화하는 가운데 동료 노동자를 겁박하고 저주하는 조폭 같은 행태까지 예사로 벌어졌다. 그러던 자칭 ‘천하무적 민노총’이 이번에 물러선 것은 아무래도 국민 여론 악화와 조직 내부로부터의 이반을 더 이상 감내할 수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무릇 노동운동의 생명은 명분과 진정성에 있다. 비록 배경과 맥락은 다르지만 서양음악사에 널리 알려진 에피소드 하나는 낭만과 실리를 고루 챙긴 일종의 노동쟁의 성공 사례에 관한 것이다. 훗날 ‘고별’이라는 부제를 얻게 된 하이든의 교향곡 45번의 마지막 악장은 중반쯤 템포가 아다지오로 느려지면서 연주자들이 악기를 거두고 보면(譜面) 위의 촛불을 끈 다음 차례차례 무대를 떠나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자신의 고용주였던 헝가리의 에스테르하지 후작을 향해 하이든이 연출한 휴가 청원 퍼포먼스였는데, 다음 날 오케스트라 단원들 모두 뜻을 이루었다고 한다.

노동운동사에서 ‘그레브 드 젤(grève du zèle)’, 곧 준법투쟁을 통해 자신의 권리와 이익을 쟁취하는 방법을 생각해 낸 것은 20세기 초 파리 시내 택시 운전사들이었다. 도로교통법상 세세한 규정 모두를 철저히 준수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심각한 교통 체증이 초래되는 효과를 노린 것이다. 물론 준법투쟁 자체의 정당성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하지만 이는 합법적이고 평화적인 파업 전술로서뿐만 아니라 노동자들의 보이지 않는 숙련과 현장 지식, 그리고 그에 따른 소리 없는 노고와 티 나지 않는 헌신이 이 세상을 돌아가게 만드는 데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온 국민이 절감하는 기회가 되기도 한다. 노동운동에 있어 폭력과 불법이 결코 능사나 상책이 아니라는 의미다.

노동운동의 순수함과 인간미와 관련하여 내가 쉽게 잊지 못하는 유년 시절의 추억도 하나 있다. 이는 기존의 한국노동운동사 서술 어디에도 나오지 않는 장면이다. 1960년대 중반 산업화 초기, 대구 변두리 공단 근처에서 철부지 소년으로 뛰어놀던 어느 날 나는 봉급날 해 질 녘만 되면 젖먹이를 둘러멘 동네 아낙들이 공장 정문 앞에 삼삼오오 모여든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처음에 나는 근로자 남편들이 월급 봉투를 들고 딴 데 새지 않도록 대비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임금 체불이 예외가 아니라 관행이었던 그 시절, 그것은 노동운동이라는 이름조차 얻지 못한, 지극히 한국적인 노동운동 전사(前史)였다. 피켓도 없고 함성도 없었지만 메시지는 분명했다. 오늘 봉급을 받지 못하면 온 가족이 굶게 생겼다는 무언(無言)의 절규 말이다. 그리고 내 기억에 온 동네 사람이 이를 마음으로 성원했다.

돌이켜보면 참으로 애잔한, 그리고 너무나 간절했던 우리나라 노동운동의 초심(初心)이자 출발이었다. 노동운동의 선진화를 외면한 채 투쟁과 폭력, 부패와 불법에 도취해 있는 작금의 민노총을 보노라면 실로 격세지감이 아닐 수 없다. 특권 노조의 ‘약자 코스프레’가 대다수 국민에게 무슨 감동을 주겠는가? 대한민국이 언필칭 세계 10위권 경제대국임에도 각종 노사관계 국가경쟁력 지표는 일제히 100위권 바깥으로 밀려나 있는 현실은 누가 봐도 모순이자 기형이다. 화물연대 파업 철회는 차제에 본격적인 노동 개혁으로 이어져야 한다. 노동운동의 변심과 변질이 노동 개혁의 매를 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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