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칼럼] 가진 자와 강한 자가 더 자유롭다
지난 22일 교육부가 발표한 ‘2022 개정 교육과정’에 결국 ‘자유 민주주의’ 용어가 명시됐다. “교육과정심의회는 자문기구이기 때문에 표결 의무가 없으며, 과거 심의회에서도 표결을 진행한 전례가 없다”면서 표결조차 거부한 결정이었다. 하지만 11월7일 반대 수정안이 제출되었고 12월2일 찬반 표결이 진행된 바 있다. 게다가 이 표결에 참여한 14명의 심의위원 가운데 13명이 ‘자유’를 추가하는 표기 방식에 반대했다.
수년 전 역사 교과서 논쟁에서 제기되었던 보수 진영의 논리와 윤석열 대통령의 자유 사랑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1987년 제정된 현행 헌법이 ‘자유 민주적 기본 질서’를 언급하고 있으므로 역사 교과서에도 ‘자유’라는 표현을 넣어야 한다는 것이 이른바 ‘자유 민주주의자들’의 주장이었다. 윤 대통령도 자유 민주주의 수호를 언급하면서 정계에 진출했다.
정치·경제적으로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발전한 지금 1987년 헌법은 더 이상 적실성이 없어 개정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하지만 이 헌법에 규정된 ‘자유 민주적 기본 질서’의 의미만 되새겨 보더라도 자유 민주주의자들의 논리는 문제가 적지 않다. 헌법 전문은 “조국의 민주 개혁과 평화적 통일의 사명에 입각하여 (…) 자율과 조화를 바탕으로 자유 민주적 기본 질서를 더욱 확고히 하여 정치·경제·사회·문화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각인의 기회를 균등히 하고”라고 명시되어 있다. 이때 자유 민주주의는 기본 이념이 아니라 기본 질서일 뿐이다. 자유 민주주의라는 질서를 통해 완수해야 할 사명은 ‘민주 개혁과 평화 통일’이며, 궁극적으로 도달해야 할 목표의 하나는 ‘모든 영역에서의 각인의 기회 균등’이다. 물론 사회 복지 측면에서 볼 때 ‘기회의 평등’은 ‘결과의 평등’으로 보완되어야 할 것이며, 이것 또한 87년 헌법의 개정 이유 중 하나다.
이처럼 현행 헌법에서도 ‘자유 민주적 기본 질서’는 독재나 전체주의에 반대되는 정치 체제 혹은 정치 질서를 지칭하는 말이다. 이 정치 질서를 통해 모든 분야에서 각인이 행복을 추구할 균등한 기회를 보장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귀결되는 조항이 바로 제1장 총강의 제1조 1항 ‘대한민국은 민주 공화국이다’라는 규정이다. 대한민국은 ‘자유 민주 공화국’이 아니라 ‘민주 공화국’인 것이다.
민주주의(democracy)의 어원이 인민(demos)과 지배(kratos)의 합성어라는 것은 상식이다. 신분 사회가 아닌 현대 사회에서 이것은 ‘인민의 자치’를 의미한다. 그리고 ‘인민의 자치’는 ‘누구도 지배하지 않고 아무도 지배받지 않는’ 조건에서 가능하다. 다시 말해 ‘모든 사람 혹은 각인이 지배받지 않을 자유로운 상태’와 ‘어떠한 개인도 지배할 특권을 갖지 않는 평등한 상태’를 전제한다. 민주주의의 핵심은 ‘각인의 평등한 자유’ 혹은 ‘자유로운 각인의 평등’이다. 민주주의에 이미 각인의 자유와 평등이 포함되어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굳이 ‘자유’라는 수식어를 붙이는 것은 평등을 경시하는 것이며, 거꾸로 ‘평등’이라는 수식어를 붙이는 것은 자유를 경시하는 결과가 된다. 심지어 극단적 자유주의자들은 자유를 최고의 가치로 설정해 민주주의라는 정치 질서를 자유 보장의 수단이라고까지 주장한다.
극과 극은 통한다고 했다. 자유를 희생해 평등을 추구하는 북한 같은 경우는 ‘인민 민주주의’를 외친다. 실상은 평등을 새로운 권력 수단으로 사용한다. 조지 오웰의 <동물 농장>에 빗대어 표현하자면, ‘모든 인민은 평등하다. 관료와 당원은 더 평등하다’라고 할 수 있다. 굳이 자유를 강조하는 사람들도 자유를 권력의 수단으로 이용한다. ‘모든 국민은 자유롭다. 가진 자와 강한 자는 더 자유롭다.’
2020년 윤석열 당시 검찰총장은 신임 검사 신고식에서 “자유 민주주의는 평등을 무시하고 자유만 중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민주주의라는 허울을 쓰고 있는 독재와 전체주의를 배격하는 진짜 민주주의를 말하는 것입니다”라고 주장했다. 적어도 이때는 민주주의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2021년 대선 출마 선언에서는 “민주주의는 자유를 지키기 위한 것”이라고 규정했고, 올해 12월13일 국무회의에서는 “자유를 제거하려는 사람들, 거짓 선동과 협박을 일삼는 세력과는 함께할 수 없습니다”라고 선언했다.
백년대계 교육과정에 ‘자유 민주주의’가 표결 절차 없이 강행된 이유를 이해할 수 있는 대목이다. 표결도 무시하고 최고 권력자의 의도를 반영하는 것이 과연 자유 민주적 기본 질서에 부합하는 것인가. 비민주적 수단을 통해서라도 가진 자와 강한 자의 자유를 지키려 한다고 보면 비논리적인 판단인가.
정병기 영남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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